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91
제291화
67. 달가림 (4)
“사방천지에 넋이야, 넋이로구나!”
생사의 경계를 밟고 태어난 이의 손짓을 따라, 푸른 불꽃이 춤을 추었다.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괘(卦)를 따라 카랑카랑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익히 보아온 광경이었으나, 어딘가 낯설었다.
귀문은 감히 주인을 해하려는 삿된 것을 물리는 영험한 문이다. 이곳이 너의 자리라며 호령하니 죄 없는 산자조차도 와들와들 떨었더랬다. 가차 없이 혼백들을 무릎 꿇리고 인도하는 모습은 마치 적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내는 대장군 같았다.
그러나 태양이의 선택 아래 ‘살풀이 신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입게 된 문은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바람이 따뜻해.’
분주한 보폭을 따라 봉우리처럼 한껏 부풀었던 치맛자락이 폭 가라앉고, 상서로운 푸른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오색 찬란한 안개가 물결처럼 널리 번졌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이는 대로, 인도하는 대로 약수 삼천리에 가셨다더라.”
원진 안의 문양이 하나둘 완성될 무렵, 딸랑! 먼발치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들렸던 것과는 음색이며 높낮이가 미묘하게 달랐다. 차태양은 그 차이를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태양아! 역시 너일 줄 알았어. 드디어 문을 열었구나!”
“문이 뭐, 뭐죠? 혹시 흑마법과…….”
“흥, 꿈 깨. 소리가 미쳤다고 부정 탄 김 서방한테 그걸 알려줘?”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온 것인지. 꾀죄죄한 꼴이 된 이강토의 어깨 위에서 발을 흔들던 소리가 태양이에게 날아왔다.
내가 있는 곳으로 잠깐 시선이 머무는 듯하더니, 소리는 곧바로 태양이의 뺨을 꼭 껴안았다. 흰 뺨을 한가득 품은 팔다리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알고 있지? 태양이 너는 우리들의 자랑이자…….”
“가장 큰 선물이야!”
“잊지 마렴. 하늘만큼 땅만큼, 태양만큼 달만큼 우린 널 사랑하고 있어.”
“절대로 안 잊어! 기억할게. 언제 어디서든, 나도 너흴 사랑해!”
“언제 이렇게 착하고 예쁘게 컸을까.”
마음을 전한 소리가 봉긋 솟아오른 뺨을 떠났다. 포르르 멀어지는 뒷모습이 왜인지 장성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등 같았다. 아니, 그러했다.
“들려줘, 태양아.”
노래보다도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소리가 아껴두었던 힘을 풀어놓았다. 작은 인영 주변에서 반짝반짝 별빛을 닮은 가루가 흩날렸다. 안개를 타고 흐르는 방울 소리가 커지니, 그에 비례하여 영롱한 이채가 강해졌다.
가장 큰 지지자의 응원 아래, 태양이가 눈을 감은 채 합장했다.
“사나요, 사나소사. 극락을 바라보시고 연화대로만 다 사날까요!”
여느 때와 달리, 문이 추락하며 나던 굉음은 나지 않았다. 대신 흥겨운 풍물 장단이 방울의 금속음 위로 덧대지니. 그야말로 신명 나는 놀음판이 벌어진 듯했다.
그때였다. 덩실덩실 박자를 따라 흔들리던 태양이의 손에 기다란 무명천이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뻗어지는 팔을 따라 하얀 무명천이 파공음을 냈다. 푸른 하늘에 시원스럽게 그어지는 흰 직선들이 완성된 줄로만 알았던 원진에 획을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뵙고저, 인정과 사정으로 비노니. 가시 문 벗고 극락 문 피리다.”
자욱한 안개에 가리었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고, 푸르렀다. 환구단을 중심에 두고 펼쳐진 푸른 꽃밭은 아찔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살랑, 때마침 스친 바람에 푸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꽃잎들이 춤을 췄다.
“어때요, 언니?”
“좋아, 너무. 너다운 선택을 했구나.”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닿지 않았을 대답인데. 태양이는 확신 가득한 어조로 말하며 활짝 웃었다. 파랗게 물든 미소를 보고, 나는 차마 마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판을 벌였으니 이제는 다 같이 놀아야죠!”
경쾌하게 선언한 태양이가 무명천을 쥔 채 춤사위를 선보였다. 여태 남아 있던 장단을 반주 삼아 움직이는 걸음을 따라 푸른 꽃잎이 휘날렸다.
처음에는 하나. 그다음은 둘, 셋.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이……. 셋. 창공을 수놓는 꽃잎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죽은 헌터들의 파편이구나.’
필드의 눈을 통해 보고 있는 덕분에 겨우 알아차렸다. 폐허가 된 서울 이곳저곳에는 마수가 되고 남은 흔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태양이는 그들을 모두 포용하고자 했다.
갈 길 잃고 떠돌던 자들이 꽃잎의 마중을 타고 하나둘 떠내려오고, 신명 나는 환대가 그들을 맞이했다. 지친 영혼들이 비로소 푸른 불꽃의 보호 아래 잠드니. 법도에 따라 돌려보낸다는 천도제의 이름에 가히 걸맞은 광경이었다.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 태양이는 장단을 고조시키며 쉴 새 없이 파편들을 불러 모았다. 일견 모든 일이 마냥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오므라드는 봉우리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매초 마다 가까워지는 파국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걸로는 안 돼.”
지금까지 도착한 것은 전부 파편. 떨어져 나간 조각들뿐이었다.
여기서 만족해도 될 텐데. 태양이는 기어코 그들의 원류, 그러니까 마수들 속에 심긴 혼백까지 구원하고자 했다. 매사에 물러나는 일이 없으며, 작은 바람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이다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마수들은 빼어난 능력을 지닌 장인이 직접 비틀어 만들어 낸 존재. 얽히고설킨 인과에 갇혀 혼백들은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태양이만 잡는 꼴이 될 거야.’
당기면 당길수록 부담이 가중되는 게 보이건만. 그럼에도 태양이는 포기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무서울 것 없이 소리를 높이던 풍악마저도 달아나고, 꽃잎들이 찢어 발겨질지언정 빛은 사그라지지 않으니. 어떻게든 모두를 구하겠다는 결의가 빛났다.
“태양아, 이제 그만해!”
“싫어!”
“그러다 너까지 끌려간다고! 저편으로 가면 전부 끝이라는 걸 몰라?”
“끝이 아니야. 아직, 아직 다 끝나지 않았잖아!”
소리의 만류의 호기롭게 쳐냈지만, 태양이의 낯빛은 시시각각 창백해졌다. 상대가 너무 나빴다.
“혼자라면, 말이야.”
장인은 장인이 상대해야 하는 법.
감히 스스로에게 ‘장인’의 칭호를 붙일 수 있는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이 장인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이름을 달고자 했다. 태양이가 보여 준 용기에 힘입어.
어린 후배의 의지는 갈림길 앞에 서 있던 그 자신의 미래를 바꾸었다. 나 또한.
“명색에 길잡이인데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
낭떠러지라고 여겼던 막막한 길목 앞에서 푸른 희망을 보았다. 그러니 이제는 어디를 겨누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내게는 여전히 낭떠러지로 향하는 선택일지라도.
“태양아, 뒤를 부탁해.”
“……언니?”
“넌 정말로 좋은 헌터가 될 거야. 아니, 지금도 이미 그래.”
이 말만큼은 닿았으면 좋겠는데. 기원하며 컨트롤러를 놓았다.
푸른 꽃밭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까마득한 창공 위로 나는 돌아왔다. 어지러이 펼쳐진 노스텔지어의 회로가 나를 반겼다.
아이러니한 일이지.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기민하게 내 의지를 읽은 세계탑이 물었다.
[필드, 노스텔지어(?)에 간섭하시겠습니까?]“그래.”
원하는 바는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태양이의 부름이, 빛이 모두에게 닿기를.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나는 금지당한 영역에 손을 댔다. 바른 자리를 찾고 그곳에 나의 흔적을 새겼다.
고약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회로였다. 선을 그을 때마다 살점을 떼어내는 것 같은 통증이 일고, 연결을 위해 회로를 비틀 때는 시야가 까맣게 멀어졌다. 복잡하긴 또 얼마나 복잡한지. 부족한 지식을 짜내느라 머리 깨질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여태껏 겪은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수백 번 되뇌며 나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윤가호! 너 대체 지금 뭘…….”
아, 벌써 일어났나. 슬쩍 뒤를 도니 당황하여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윤수호가 보였다. 아마도 턱이며 눈가를 적신 피 때문이리라. 주제에 넘치는 짓을 벌인 대가였다.
“미안. 약속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 아무래도 좋다. 당장 그만둬!”
“유감스럽게도, 이미 늦었어.”
마지막 획 하나만이 남았으니까. 나는 윤수호의 말을 듣지 못한 체하며 식을 완성했다.
고작해야 덧씌운 것뿐인데 몸이 주르륵 고꾸라졌다. 점차 아득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며 활을 소환했다.
“하나 더, 이것까지만…….”
가지를 펴고, 깊숙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알맞은 터가 필요하지 않나. 이 화살이 고유 회로가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길을 내어 주리라.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화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한 궤적을 그렸다.
“릴리즈.”
짧은 시동어를 내뱉은 순간, 세계식이 뒤틀리고 세계가 개변했다. 마치, 과거의 어느 날 우리의 세계가 그러했듯이.
[‘필드, 노스텔지어(?)’에 플레이어 윤가호의 고유 회로 ‘침식’이 적용됩니다.] [■레이■ 윤가호의 고유 회로에 인챈트, ‘갈피’의 효과가 중첩됩니다.]화살이 회로를 앞질러 내달리니, 그를 따라 회로들 역시 유순히 푸른 꽃밭으로 향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기운에 태양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러나 이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멈추었던 춤사위를 이어갔다.
무엇이든 퍼뜨리고, 파헤치는 회로의 비호 아래 그는 거침없이 길을 열었다. 의지를 관철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찬란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푸르고 흰 휘광이 서울 전체로 번져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겨우 세우고 있던 상체마저 무너졌다. 뒤이어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졌다.
꿈결 같은 흐릿한 잔상 사이, 선명한 것은 오로지 하나뿐.
[플■이어 ■가호에게 분■점이 제시■■다.] [당신의 선택에 세계탑의 축복이 깃들길.]비틀비틀 내게로 달려오는 윤수호의 위로 비치는 글자들을 보며, 나는 감히 지껄였다.
“축복은 개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