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34
제34화
08. 바다가 부르는 소리 (4)
“한차현 헌터께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휘황찬란한 로브는 온데간데없이 수수한 차림을 한 이강토가 멀건 수프를 휘휘 저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차현이 산뜻하게 웃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죠.”
이강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런 사람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상식인처럼 보였지만 역시 한차현도 황야의 일원이었다. 황야 놈들은 늘 제정신이 아니라 백야를 손가락질했지만 이강토가 보기엔 오십보백보였다.
퀘스트에 대한 힌트를 얻겠답시고 npc들 사이에 위장 취업하다니. 정상은 아니었다.
‘대학원생들은 다 이상하다더니 그래서 그런 건가?’
지난밤, 한차현은 축제기간 동안 헬리움 대신전에서 사역할 신도를 구한다는 공고문을 보여 주더니, 아침이 밝자마자 이강토를 끌고 신전으로 갔다.
어느 틈에 숙지했는지 헬리움 교의 의례와 규칙을 완벽히 꿰고 있는 한차현 덕에 두 사람은 의심받지 않고 봉사자들 사이에 숨어들 수 있었다.
“대단한 침투력…….”
이강토가 한차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강토 씨 쪽은 별다른 일 없었습니까?”
“아직 첫날인걸요. 시키는 일 해치우기도 바빠요. 허드렛일도 처음 하려니까 만만치 않더라고요. 한차현 헌터는요?”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좀 이상한 게 있는데…….”
한차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npc들 사이에 섞인 두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강토는 대부분의 사역자가 그러하듯 대신전 청소를 명받았다. 신뢰감을 주는 외견 덕분일까 한차현은 따로 차출되어 제기(祭器)를 닦고 옮기는 일에 배정되었다.
“제 스킬에 대해서 아시나요?”
“오래된 장소나 물건과 관련된 스킬이라고 하셨죠?”
“예, 전 유서 깊은 것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것들로부터는 특수효과를 얻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얘긴 갑자기 왜?”
“대신전 내에서 제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한차현의 말에 이강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킬이 시전되지 않는다고요?”
“진정하시죠. 동네방네 소문 다 내실 생각입니까?”
“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그, 스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거예요?”
고개를 가로저은 한차현이 자신이 느낀 것을 설명했다.
한차현은 대신전에 발을 들인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창세 신화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신의 신전이니 본래라면 입장과 동시에 오래된 역사로부터 기원한 힘이 충만하게 차올라야 한다.
하지만 이 신전에서는 특수 효과는커녕, 제대로 된 기억조차 읽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킬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인벤토리의 아이템으로 확인해 본 결과, 스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스킬이 아니라, 이 신전이 이상한 겁니다.”
한차현의 스킬, ‘온고지신’은 최대 S급으로 수렴하는 스킬이지만, 쉽게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적어도 5세기는 넘은 것이어야 그럭저럭 써먹을 만한 효과가 발현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읽는 것은 좀 더 쉽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 100년은 되어야 했다.
고서점에서 읽은 문헌에 의하면, 이 계층은 최소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한차현의 스킬은 발동되어야 마땅했다.
“제기들을 만져도 반응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말은…….”
“이 신전에는 오래된 물건이 하나도 없단 소립니다.”
물론 저희가 보지 못한 걸 수도 있습니다. 한차현이 덧붙였다.
겨우 몇 시간 본 것으로 속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으레 이런 종교 건물들은 사람들이 신을, 사제를 경외하게 만들기 위해 누구나 볼 수 있는 장소에 오래된 상징을 배치한다.
그런데 조각상이며, 제단, 제기, 신전 건물까지 모두 새것이었다. 거기에 윤가호가 보낸 신화의 다른 판본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저, 사실 아까 뭘 좀 봤는데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이강토가 자신이 본 것을 설명했다.
신전 외부를 청소하던 이강토는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신전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믿을 게 없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잡신을 믿냐고. 사람들을 보고 배은망덕하다고도 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너무 오래 살아서 노망이 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했어요.”
잠시 고민하던 한차현이 품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는 종이를 한 장 찢어 내 무언가를 적은 뒤 그것을 이강토에게 건넸다.
“다음에 또 그 사람이 오면 여기 적힌 것들을 물어보세요.”
“이 질문들은…….”
“아무래도 그 노인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줄 것 같아요.”
빙그레 웃던 한차현이 헌터워치를 보고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보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연락이 없네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최권영 길드장님께서 오셨다면서요. 별일 없을 거예요. 깜빡하신 게 아닐까요?”
“흠, 조금 더 기다려 보죠.”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뵙죠. 괜히 어디 돌아다니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
“그럼요. 제가 무슨 어린애인가요? 얌전히 들어가 잘게요.”
미심쩍은 눈으로 이강토를 보던 한차현이 먼저 식당을 떴다.
한차현의 기척이 사라지자 이강토가 씩 웃으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길드장님! 퀘스트, 퀘스트 창 확인해 보세요!
[서브퀘스트, 아직 여기 있노라고(A)– 잔여 시간 : 50:02:43]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우스에 다녀온 것까지 해도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텐데.
퀘스트 창을 확인한 최권영이 혀를 찼다.
– 제 불찰입니다.
– 예?
–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제가 부주의했어요.
최권영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필드, 현자의 공방은 바깥과의 시간 배율이 다른 공간이란다. 높은 등급의 특수필드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 대략 열 배 정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요.
이게 나쁘지 않은 거라고?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최권영이 덧붙였다.
– 러시아의 공략팀이 세 달간 실종되었단 얘기, 들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 당연하죠. 그때 얼마나 난리였는데요. 설마…….
–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특수필드에서 만 하루가 안 되는 시간을 보냈을 뿐이라 하더군요.
그 정도면 거의 100배 정도의 배율이다. 납득했냐는 듯 최권영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100배에 비하면 10배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 빨리 복귀하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나가기 전에 크라켄의 다리를 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와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최권영이 손을 보태 준 덕분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내게 들러붙으려는 크라켄을 따돌리고 필드 밖으로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이미 주변이 어두웠다.
특수필드 내부가 통신 불가 지역이었던 건지 벗어나기 무섭게 헌터워치가 요란하게 울렸다.
[- 발신인 : 차태양저희 저녁 먹으러 갈 건데 언제 오세요?] [- 발신인 : 윤수호
(사진)
바닷가에서 발견했다. 그쪽에도 있는 건가?] [- 발신인 : 차태양
먼저 다녀올게요(^0^)/] [- 발신인 : 한차현
시간이 되었는데도 보고가 없어 연락합니다.
회신 부탁드립니다.]
지잉-!
언니ㅣ 무슨 일 있어요?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방금 도착한 차태양의 메시지부터 답장했다. 답장하기 무섭게 빨리 오라며 차태양이 우리를 재촉했다.
‘이크, 많이 걱정했나 본데.’
다른 메시지는 하우스에 간 다음에 대답해야겠다.
***
“언니!”
“저희가 연락도 없이 너무 늦었죠? 저녁은 잘 먹었어요?”
“프, 플레이어님들이 크라켄한테 당한 줄로만 알았어요!”
아테라가 차태양의 뒤에서 얼굴을 내민 채 소리쳤다.
“어린 김 서방이 엄청 걱정했다구! 자기가 괜한 얘기를 해서 김 서방을 위험하게 했다나.”
“소리, 제가 언제요!”
“아까 계속 그랬잖아. 나 귀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용서해 주시겠어요?”
소매로 쓱쓱 얼굴을 문지른 아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현에게 메시지로 대강의 사정을 전달한 다음,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하루 간의 일을 공유했다. 최권영이 내가 크라켄을 상대했다 말한 덕분에 과하게 주목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게 그 소라고둥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는 거죠?”
차태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 나도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어째 세계탑 등반한 뒤로 일이 순순히 풀리지 않는단 말이지.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오늘은 너무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저, 저는 오늘도 괜찮아요!”
“아테라?”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최권영을 바라보자 그가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차태양 역시 괜찮다며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우리가 필드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에 1시간 뒤 소라고둥을 사용하기로 했다.
“바다에 가깝고, 지대가 높은 곳일수록 좋아요.”
“항구 앞에 종탑이 있어요! 완전 괜찮지 않아요?”
“음, 거긴…….”
“윤가호 헌터, 무슨 문제라도?”
최권영이 모르는 척 빙그레 웃었다. 저 인간은……. 내가 왜 찜찜해 하는지 알면서.
종탑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는 차태양이 별로냐며 물어왔다.
조건상으로는 딱 들어맞는 곳이긴 하다. 그래도 아테라를 거기에 데려가기엔 좀…….
“아뇨. 좋습니다.”
모르겠다. 별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한편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npc인 아테라는 사정을 모르니 내 찜찜함만 털어 내면 될 것이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조금 쉬었을 뿐인데 어느덧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번잡스럽던 낮과 달리, 거리는 고요했다. 외진 곳에 있는 종탑 부근은 더욱더 그러했다. 혹시 누가 있으면 어쩌지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주위에는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아테라, 꽉 잡아!”
종탑에 출입하는 문이 잠겨있어 종루를 통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동스킬이 없는 아테라는 차태양이 안아 든 채 이동했다.
종루 가운데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투박한 종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응? 여기 와 본 적 있으세요?”
“이 종이 제16계층의 소명의 종입니다.”
“소명의 종이요?”
계층 공략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소명의 종.
이 종은 최권영이 수많은 바다사람들의 소원을 부순 순간 울렸다.
그리고 지금, 바다사람과 뭍사람의 피를 이은 아이가 두 종족의 운명을 가른 종 앞에 섰다.
심호흡한 아테라가 소라고둥에 입을 댔다.
– 드넓은 물 아래 잠든 나의 아이야.
앳된 목소리가 머릿속을 두들겼다. 바다정령 앞에서 불렀던 그 노래였다.
어쩌면, 어쩌면 이 종이 바다사람들을 위해 울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헛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야 말았다.
– 긴긴밤 요람 아래 꿈꾸어라.
다정한 자장가가 비정한 종소리를 대신하여 밤하늘을 울렸다.
가장 짧은 밤까지 사흘이 남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