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23. 꼭꼭 숨어라 (1)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루, 칸칸이 열 맞춰 들어찬 세간살이, 구수한 밥 내음까지. 반나절 만에 너와집은 귀신 들린 집이라는 오명을 완벽하게 탈피했다.
개다리소반 위, 소담하게 차려진 5첩 찬을 본 청재가 눈을 반짝였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제가 실력 발휘 좀 했죠. 자, 어서 절 찬양하세요!”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솔직히 이강토가 의기양양하게 부엌에 들어갈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간을 봐달라며 내민 멧돼지 구이를 한 입 먹은 뒤로는 이강토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저 김 서방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강토의 가사 실력은 훌륭했다. 나와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말이다. 나사 하나 빠진 듯한 평소 모습에선 연상할 수 없는 의외의 일면이었다.
“역시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나 봅니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조금 더 노닥거리게 놔두고 싶었으나 벌써 하늘에 불그스름한 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집 주인이 돌아올 때가 다 되었단 말이다.
가사 비법을 전수하던 이강토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만 갑시다.”
“예? 벌써요?”
“말이 좋아 보은이지, 저희 지금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겁니다. 집주인이랑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귀찮아지니 얼른 가죠.”
도둑으로 의심받는 건 사양이다. 집주인과 마찰을 만들었다 청재가 입을 다물 위험도 무시할 수 없고. 밤에 다시 올 테니 조용히 나오라고 말하려는데 도깨비가 선수를 채갔다.
“이미 늦은 것 같아, 김 서방.”
이어 말하길, 근처에서 인간의 발소리가 들린단다. 귀신 들린 집을 찾는 괴짜가 우리 말고 있을 리 없으니 집주인임이 분명했다.
“그 김 서방에게 눈이 있다면 곧 우리가 보일걸?”
“눈이 있는 정도가 아니에요! 은인님은 약초꾼이라 매처럼 눈이 좋으시답니다. 들키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해요!”
아직 어둠이 내려앉으려면 먼 데다가, 하물며 주변은 탁 트인 강가. 이제 와 어설프게 도망갔다가는 들킬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숨는 편이 낫겠네요.”
겨우 세 칸짜리 집 어디에 숨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민하던 그때,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이강토가 커다란 담요 같은 것을 꺼냈다. 모 게임에서 나오는 길리 슈트처럼 가짜 덩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럴 땐 카모플라쥬 마스크죠!”
설명 대신 시범을 보여 주겠다며 이강토가 담요를 뒤집어썼다. 이어 그의 모습이 스르륵 주변 배경에 녹아 사라졌다.
“와!”
“김 서방, 소리도 그거 해 볼래! 지금!”
“확실히 도움이 되겠네요.”
우리의 감탄사를 들었는지 이강토가 담요 사이로 고개를 쏙 뺐다. 공중에 동동 뜬 채 으스대는 얼굴이 기이하면서도,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지 말고 얼른 여기로 오세요!”
담요를 벗은 이강토가 조르르 장독대 옆으로 달려가 쭈그려 앉았다. 신나선 굴러가는 도깨비를 따라 자리를 옮기려는데 청재가 나를 붙들었다.
“저는요?”
“부엌으로 가시죠. 우렁이로 변하실 수 있다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청재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이 영물 왜 이러는 거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기복이었다.
‘은인님께서 만들어 준 보금자리도 있답니다. 정말로 다정하신 분이죠?’
이강토가 청소하는 동안 청재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우렁이인 척 국그릇에 얌전히 있느라 힘들었단 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급기야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까지 하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저 수도꼭지가 또 열리면 쉽사리 잠기지 않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부엌에 있으면 은인님의 반응을 못 보는걸요. 흑, 그럼 서천 꽃밭에 가는 그날까지 미련이 남을 거예요. 아니, 거기 가서도…… 으흐흑!”
“제발, 제발 울지 마세요.”
“김 서방,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설상가상으로 어렴풋이 저 멀리서 인간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청재를 데리고 위장 담요 아래로 들어갔다. 이강토가 좁다고 아우성쳤기는 했으나, 어찌저찌 세 명의 인형(人形)과 하나의 방울이 들어갈 수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들키겠지만.’
바깥에서 담요 안쪽을 볼 수 없는 것과 달리, 안쪽에선 바깥이 훤히 보였다. 상황을 살펴볼 수 있으니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샌드위치처럼 청재와 이강토 사이 낀 채로 점점 다가오는 집주인의 인영을 응시했다.
“헉, 윤수호 헌터보다 큰 것 같지 않아요?”
이강토의 말대로였다. 윤수호보다 흉곽 어림이 조금 좁았으나, 신장은 그보다 컸다. 윤수호가 190 초반이란 걸 감안하면, 저 사내는 거의 2m에 육박해 보였다.
“정말로 약초꾼 맞습니까?”
사내가 다가올수록 더더욱 의문스러워졌다. 저건 속 빈 강정처럼 덩치만 큰 몸이 아니다. 보따리와 지팡이만 아니었다면 사냥꾼, 아니 무관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청재?”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슬쩍 고개를 돌리니 발그레한 뺨이 보였다. 양손으로 턱을 괸 청재는 내가 저를 부르는 줄도 모르고 사내를 쳐다보기 바빴다. 저것이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보은은 무슨. 사심 때문이었네.’
청재가 부산스럽게 구는 통에 담요가 들썩였다. 집주인이 거의 도달했을 무렵이어서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다녀왔다.”
사내는 듣는 이 없는 인사를 하며 마당에 들어섰다.
무언가 바뀐 것을 느낀 것인지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그를 본 청재가 숨을 멈추었다. 방에 차려진 밥상을 보면 무슨 반응이려나. 괜히 나까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사내는 우리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들고 있던 것을 팽개치더니, 다급하게 부엌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곤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한참 나더니 사내가 터벅터벅 마당으로 나왔다.
저 덩치를 보고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긴 하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사탕을 떨어뜨린 어린 애 같았다.
“은인님이 이상해요. 뭔가 잘못…….”
“쉿!”
속닥대는 입은 틀어막았으나, 동동거리는 청재의 발은 제지하지 못했다. 그래 봤자 담요가 두어 번 가볍게 흔들렸을 뿐이건만 사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허망했던 낯을 싹 지운 사내가 정확히 우리가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뉘십니까.”
사내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내려놓았던 막대기를 주운 뒤 우리를 향해 직진했다. 인내심이 얕은 사내가 다시금 물었다.
“정녕 경을 쳐야 모습을 드러내시겠습니까?”
소리 없이 막대기가 휘둘러지고, 그 끝이 내 이마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별다른 가공을 하지 않은 평범한 나무 지팡이였으나 그것에 실린 예기는 범상치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 사람, 보통 인물이 아니야.’
저 때문에 들켰다는 걸 알긴 하는지 청재가 와들와들 떨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걸 보자니 미약하게 일었던 짜증도 사라졌다. 귀찮니 뭐니 했지만 도둑으로 오해받는다 한들, 우리는 도망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청재에게 이 오해의 무게는 전혀 같지 않았다.
‘모자란 솜씨지만 그렇게 정성을 다해 왔잖아.’
인벤토리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청재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은인을 뵈는 순간인데 눈물범벅이어서 되겠습니까?”
“예에?”
내가 속삭인 말에 청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그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위에 덮여있던 담요가 스르르 떨어졌다.
사내에겐 우리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텐데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그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부뚜막 위의 토라(土螺)를 보셨습니까?”
‘뭐야, 이 뜬금없는 질문은? 우리의 정체를 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다 토, 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예상 답안을 쓸 수 없게 되어 입을 어물거리는데 청재가 상기된 목소리로 내게 속닥였다.
“은인님이 절 찾고 계시나 봐요!”
“토라는 저 이가 당신에게 붙여준 이름입니까?”
“그럴 리가요! 우렁이를 이르는 이명이에요. 흑, 너무 감동이에요. 은인님이 저를 이리도 생각해 주시다니.”
청재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꾹꾹 닦아 냈다. 사내는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들었을 텐데도 대답을 기다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작전 선회다.’
이강토가 집을 정리하는 동안, 청재와 방에 갇힌 나는 그로부터 강제로 집주인의 이야기를 주입당했다. 사내는 청재를 말벗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가장 자주 화제로 오른 것이 그의 누이이다.
‘동재골의 사목영이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었대요!’
사목영은 높으신 분들이 친히 찾아올 정도로 뛰어난 의원이었다. 또한 동시에 그는 아픈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의인이었다고 한다. 귀한 자와 비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치료했다고 하니 그 성품을 짐작할 만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의 누이를 핑계로 삼으려 했다. 과거 당신의 누이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왔다고 하면 적어도 도둑놈 취급은 면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사내가 우렁이, 그러니까 청재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안 지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인 때가 있는 법이다.
‘반려동물이 사실 동물이 아니었다면 당황하긴 하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
마음속으로 사내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청재를 사내의 앞으로 떠밀었다. 거구의 사내 앞에서 파르르 몸을 떠는 청재의 모습이 마치 고목 앞에 선 갈대 같았다.
“이 여인이 당신의 토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