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btained a Mythic Item RAW novel - Chapter 339
339화 단 하나의 약속
새하얀 장검을 쥔 채, 자신을 겨누고 있는 소녀의 모습.
이를 바라보는 재현의 동공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것은 자신이 절대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왔던 것이었다.
―동기화율이 99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서이나.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인물에게 동기화되어 버린 것이다.
재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입가에 뜨거운 핏방울이 흘러내린다.
그와 함께 그의 머릿속에 몇몇의 짧은 기억이 스친다.
처음 서이나와 만났던 신입생 사냥.
그때까지만 해도 재현은 그녀를 믿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이용해 시험을 통과하려 눈치만 살폈을 뿐.
하지만 그 감정은 조금씩 흐릿해졌고, 어느새 그녀는 자신의 동료가 되었다.
이후 그녀를 믿게 되었던 모의 던전 공략 당시.
재현은 김유정과 어머니를 제외하고 믿을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 그녀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의 위험 앞에서, 서이나는 한계까지 마력을 개방해 자신을 구하려 했으니까. 그때부터 재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미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고백을 받았던 수학여행.
그때는 재현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 자신에게 사랑은 과분한 감정이었다.
늘 죽음의 위협과 싸워야 하는 직업. 그게 레이더였으니까.
더구나 자신에게는 재능도, 돈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쳐냈다.
지독한 자기 비관에 빠져 있던 그에게는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서이나는 재현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자신을 신뢰하며, 다시 답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재현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조금씩 찾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한테는 이렇게 선명한데….’
재현은 슬픔에 차 흐릿해진 두 눈으로 서이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떠올렸던 것 외에도, 서이나와 함께했던 무수한 기억이 누름돌이 되어 재현의 어깨를 짓눌렀다.
바깥은 온통 어둠이었다.
창가에 비쳐오는 달빛이 차분히 고고한 흑발에 내려앉는다.
아래의 치솟는 불길.
그것은 재현의 마음을 쉴 새 없이 어지러이 흔들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재현은 그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를 무슨 말로 설득해야 할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나를 기억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그 어떤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을 때였다.
챙그랑.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쇳소리가 났다.
이를 들은 재현이 즉시 고개를 들었다.
서이나. 그녀가 자신의 검을 버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과 달리 따뜻한…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로.
“이나…야?”
그녀의 닫혀 있던 오밀조밀한 입이 열리며, 청아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검을 쥐는 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재현은 그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하기 위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터벅. 터벅.
각반을 신은 그녀의 발걸음이 서서히 재현을 향해 다가온다. 공허한 성의 최상층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직 걸음을 떼는 소리뿐이었다.
재현은 그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재현의 앞에 도달한 서이나가 픽 하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내가 널 잊었을 거라 생각한 거야?”
“날… 기억하고 있었어?”
“…응.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서이나는 담담하게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재현은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약간은 헷갈렸다. 자신이 느끼는 지금의 감정은 대체 무엇인 건지. 그저 이그드라실의 장난인지조차 이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재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약속 지켜줬구나.”
“…응. 노력했어.”
그 순간, 창문 너머로 동이 터오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고, 서서히 어둠이 걷혀간다. 아래의 불길이 거셌지만, 재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서이나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진다.
재현은 주변을 보았다.
거의 며칠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자신은 그녀를 진작에 구하러 왔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격을 얻지 못한 그녀가 어떻게 동기화율 99퍼센트에 도달한 상태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성의 꼭대기 벽 면면에 몇 번이고 수없이 닳을 정도로 돌로 새겨둔 이름.
민재현.
잊으면 안 돼.
잊으면 안 되는 사람….
재현은 수없이 쓰인 자신의 이름을 보며 눈가가 촉촉이 젖는 것을 느꼈다.
서이나가 손을 뻗어온다. 자신을 향해 조심스럽게.
재현은 그대로 가만히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자신의 얼굴에 닿는다.
서이나가 옅게 웃었다.
“…나, 이거 용기 많이 낸 건데….”
재현은 답하지 않았지만, 가슴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그는 알았다.
서이나는 그저 정신력이 뛰어나서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깊은 감정. 그게 그녀를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잊지 않게 한 것이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 감정에 확실히 답할 수 없다는 것.
그게 가장 그를 슬프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극에 어울려 주어야 했다. 재현이 입을 열었다.
퀘스트의 마지막 클리어 조건.
“좋아해.”
그것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재현의 말과 함께 시스템 음이 들려왔다.
―이그드라실의 《제3계층: 용살자(龍殺者)와 비극의 노래》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재현은 그 순간.
차오르던 자신의 감정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허나, 서이나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던 그 모든 감정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기억해주었다는 벅참과 잇닿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달리 연심이라 부를 만한 그것은 사라졌다.
적어도 그렇게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나야.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응. 너는?”
“나도 괜찮았어.”
“어어어―어쨌든 퀘스트를 클리어 하―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요!”
라타토스크 역시 반기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번 계층에서 그는 굉장한 활약을 했다. 재현이 스토리를 파악하고, 시구르드와 브륀힐트의 이야기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도운 게 그였으니까.
재현은 이제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자. 다음으로.”
재현은 이제 다음 계층으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하셨습니다.
―페널티가 모두 사라집니다.
―이그드라실 나선탑의 《제3계층: 어느 흔한 빙의물의 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이그드라실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를 재생합니다.
에필로그?
서이나와 재현이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환한 빛이 두 사람과 라타토스크를 집어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재현아!”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손을 깍지를 끼고 꽉 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놓치게 될까 봐 저도 모르게 걱정되었던 탓이었다.
재현과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이내 어느 항구 도시의 저잣거리에 전송되었다.
다행히 곁에는 서이나도 함께였다.
* * *
“이―이곳은 과거 존재했던 하하하―항구 도시입니다. 마찬가지로 시구르드와 브륀힐트의 이―이야기가 있었던 시대인 것 같습니다요!”
“…이해가 안 가. 에필로그를 보여준다면서 어째서 이그드라실은 우리를 이곳으로 전송한 걸까?”
“나도 잘은 모르겠….”
재현이 서이나의 말에 답하던 때. 갑작스레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인들의 목소리였다.
“여기 그 대단한 마법사가 왔다는 게 사실인가?”
“아, 글쎄 그렇다니까. 엄청난 명마까지 타고 있더군. 다리가 여덟 개라던가?”
들려오는 말에 재현의 미간이 잠시 구겨졌다.
익숙한 신화의 이야기가 이들의 입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명마에 관한 이야기라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재현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허허, 그래서 그 마법사 이름이 대체 뭔가?”
“워다나즈(Wōdanaz)…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아마?”
재현은 상인들의 마지막 대화에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즉시 뒤로 돌아서 그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소리치며 물었다.
“당신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대마법사가 왔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느냐고요!”
재현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리는 손을, 전혀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워다나즈라고 했소만….”
“그 마법사라는 놈.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재현이 거칠게 붙잡은 어깨에 힘을 주며 묻자, 그에게 잡힌 상인이 어물쩍거리며 검지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아, 아까 항구 쪽으로 가던데… 아마 배를 타고 타국으로 이동하려는 게 아닐지….”
재현은 그를 밀친 뒤, 곧바로 항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서이나와 라타토스크는 재현이 달리자 덩달아, 자신들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재현아 무슨 일…이야?”
서이나의 물음에도 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는 격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앞은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어린놈의 새끼가…!”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허나 재현은 무시했다.
재현은 앞을 가로막은 수많은 사람들을 밀치고, 넘어뜨리면서도 항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한 사람을 발견했다.
긴 챙을 자랑하는 허름한 모자와 회색의 남루한 노브를 입은 노인.
그는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었는데, 아마 배에 오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재현은 그의 뒤에 선 뒤 사납게 물었다.
“당신이 워다나즈인가?”
그 물음에 노인은 뒤를 돌지도 않은 채 답했다.
“그렇소만…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어찌하여 내게 관심을 두는 건지 모르겠군. 혹여 내게 볼 일이라도 있는 겐가?”
재현은 그의 말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몸의 모든 마력을 단번에 해방했다.
“볼일이라면 아주 많지.”
“꽤 실력을 갖춘 것 같지만… 자네는 아직 어리네. 오래 수련하고 정진하지 않고서야 내게 그런 살의를 보이는 것은….”
“워다나즈.”
재현은 전투를 만류하는 워다나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건 네 진짜 이름이 아니잖아.”
그 말에서만큼은 워다나즈 역시 충격에 빠진 듯했다. 그가 잠시 수염을 쓸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재현의 시야에는 익숙하지만 익숙지 않은 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한쪽 눈을 가리고, 까마귀를 어깨에 태운 모습의 노인.
그가 낮게 가라앉은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진짜 이름을… 그대는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 재현은 그의 정체를 확신하며 짓씹듯 말했다.
“오딘. 너는 오딘이다.”
재현은 알고 있었다.
워다나즈.
그것은 원시 게르만족의 언어로 오딘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신격을 개방합니다.
―액티브 스킬 《빙결의 대지 Lv 5》를 발동합니다.
콰아아아앙!
그때, 오딘이 손에 쥔 스태프에서 뿜어져 나온 거친 태풍과 재현의 빙결의 대지가 맞부딪혔다.
두 마법이 항구 도시의 한복판에 격돌하며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워다나즈, 아니 오딘이 재현을 보며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격을 가진 존재구먼.”
여행자로서 세계 각지를 다니며 수많은 이들을 만났던 오딘.
재현은 그의 기억의 파편 중 하나를.
이곳에서 막 조우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