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a Mobile From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
46화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종합 병원의 특실은 아직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이 특실의 주인은 나이든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기력은 많이 쇠해 보였지만, 특유의 분위기는 아직 남아있었다.
노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중년인이 정 자세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퇴원한 뒤에도 특별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 말대로 유출되었거나, 혹은 실험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해외에 치료가 된 사람들이 나왔을 때 알아차린 거였어. 다만, 좀 더 끈이 남아있었으면 했는데….”
특실을 홀로 쓰는 노인, 백산 그룹의 회장은 중년인의 말에 혀를 쳤다.
회사의 정보망에 해외에서도 비슷한 병이 나았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회장은 오히려 실망했다. 여태까지의 감시가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되었다. 차라리 EV란 곳에다 하소연하는 편이 빠르겠어.”
더 기다려보았지만 결국 예상대로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회장이 손을 내저었고 중년인이 병실 밖으로 물러났다.
병실 밖에는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 둘과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그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아, 유 실장은 이제 슬슬 본업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생각을 바꾸실 듯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그의 말에 눈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애들도 철수시킬까요?”
“슬슬 우리도 다른 곳과 발을 맞춰야 합니다. 곧 기획실에서 새로운 오더가 내려갈 테니 준비하고 계십시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세 남자의 인사를 받으며 중년 남자는 병실을 벗어났다. 그는 복도를 걸으면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회장님이 조금 전에 신약 추적을 멈추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포기를 하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출근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나가면서 불을 끈 탓에 병실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하정길 회장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고통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것도 있지만, 아직 멀쩡한 자신을 두고 다른 줄로 갈아타려는 부하들을 보기가 심란했기 때문이었다.
‘하, 멀쩡한 게 아닌가?’
회장은 어두운 방 안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흘렀다. 밤이 깊어졌다. 잠 못 이루던 하 회장도 어설프게 잠이 들었다.
환자들은 모두 잠든 시각.
퍽. 퍽. 퍽.
하 회장은 문밖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회장의 눈에 병실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하 회장은 잠이 확 달아났다.
끼이익.
밤이라서 그런지, 문 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열린 문에서 복도의 빛을 가리며 한 남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문을 열어 놓고,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병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회장은 유 실장마저 질질 끌려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경비원들은 모르겠지만, 유 실장은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었다.
하 회장이 놀라건 말건, 기절한 세 남자를 병실 안으로 끌어들인 남자는 등에 멘 배낭에서 줄을 꺼내더니, 세 사람을 포박하고 재갈을 물렸다.
일을 마친 그는 병실의 불을 켰다. 복면을 한 건장한 남자였다.
하 회장은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앉아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사람이었다. 생명을 노렸으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진행할 리가 없었다.
복면을 쓴 남자는 회장이 깬 것을 보더니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삼 분의 일쯤 담긴 유리병이었다.
회장의 눈이 유리병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복면 남자는 유리병을 침대 옆 캐비닛에 올려놓았다. 그제야 회장은 유리병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우리를 찾아다녔다고?”
복면 남자의 음성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나이대도 알 수 없었고,개성도 느낄 수 없었다. 거기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유리병 속의 액체를 본 순간 회장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원식에게 약을 준 자이자, 해외 거부들에게 치료약을 보내준 세력이었다.
“EV 인가?”
회장의 말에 복면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EV? 그렇게 생각했나?”
회장은 속으로 아쉬워했다.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낚싯줄을 던져보았지만, 상대는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원하나?”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치료된 사람들은 모두 큰 부자였었다. 당연히 많은 돈을 냈을 게 분명했다.
회장의 말에 복면 남자는 팔짱을 끼었다. 별로 내켜 하지 않는 모습에 회장은 어리둥절했다.
“돈이 필요하면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일을 복잡하게 할 이유가 없지.”
“그럼, 무엇을 원하나.”
“요즘 이 나라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각성자 협회라고 하나?”
복면 남자의 말에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 약을 파는 쪽은 돌연변이 인간들이 분명했다. EV인지 아니면 다른 파벌인지 모르겠지만, 벌써 이렇게 세력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난 사업가일세. 그런 일은 아는 바가 없어.”
하 회장의 말에 상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각성자 협회에 이 나라 재벌들이 작업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쪽 회사도 한 다리 걸친 것도.”
회장은 상대의 정보력에 표정이 굳었다.
“지금 가져온 분량은 원래 분량의 삼 분의 일이야. 각성자 협회에 건 작업과 각성자와 돌연변이에 관해 진행하고 있던 일을 메일로 보내주면 삼분의 일을 더 주지.”
“협력사들의 등을 치고, 회사의 기밀을 팔라는 건가?”
“맞아.”
복면 남자는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은 상대의 대답에 어이없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싫으면 말고. 거래하러 왔을 뿐이니까.”
복면 남자를 노려보던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외통수였다. 협상이나 조율 같은 것이 먹히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교차 확인을 할 테니까. 제대로 된 게 아니면 다음 약은 없을 거야.”
이어진 말에 회장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렇게 하겠네. 그럼 나머지 삼 분의 일은 언제 줄 건가.”
“일이 잘 처리된 것을 확인한 뒤에 연락하지. 다른 사람들보다 할인해줄 테니, 돈을 준비해 두도록.”
결국, 돈도 받겠다는 말에 회장은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복면 남자, 경훈은 그에게 메일 주소를 적은 쪽지를 주었다.
해외에 세탁된 회사도 있고, 이브도 있으니 이제 추적당할 염려는 하지 않았다.
경훈은 유리병을 남겨 둔 채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회장은 경훈이 사라진 뒤에도 비상벨을 울리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캐비닛 위에 놓인 유리병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뒤, 하 회장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딸기 향이 병실에 멤돌았다.
뜻밖의 향기에 조금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회장은 바로 유리병의 액체를 들이켰다.
꿀꺽.
회장은 병을 옆에 놓고, 눈을 감고 기다렸다.
두근, 두근.
효과가 있었다. 고통이 가라앉고 힘이 솟았다. 회장은 계속 기다렸다. 플라시보 효과도 아니었고, 환각도 아니었다. 병이 차도가 있었다. 내일 제대로 된 진찰을 받아야겠지만, 회장은 자신의 몸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완치를 하려면 약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회장은 눈을 빛냈다. 희망이 보였는데 놓칠 이유가 없었다.
회장은 캐비넷 위에 있는 전화를 들었다. 한밤중이었지만, 금방 전화가 연결되었다.
-네. 회장님.
“내일 아침 바로 병실로 와. 각성자 협회 쪽 일 진행하는 것 가지고.”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이건, 애들한테도 알리지 마.”
-…네! 알겠습니다.
회장은 쓰러져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호원도 새로 데려오고. 이번에는 좀 튼튼한 놈들로.”
하 회장은 전화를 끊었고 생각에 잠겼다.
부하들이 줄을 바꿔 타려고 하던 것처럼, 자신도 줄을 바꿔 타야 할지도 몰랐다.
사냥감으로 생각하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뒤에 범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
선택을 잘해야 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회사의 앞날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회장은 고민은 뒤로 한 채 흐릿한 미소만 지었다. 위기는 곧 기회였고, 자신 앞에는 미래를 뒤바꿀 선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아니 오늘부터는 과거 무기력했던 날들과 완전히 다른 날이 될 게 분명했다.
회장은 침대 옆에 서서 아침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
병원을 빠져 나와,공원 화장실에서 복면과 겉옷을 갈아입은 경훈은 배낭을 메고 집을 향해 걸었다.
“CCTV는 최대한 피했지?”
-네, 최대한 사각지대로 움직이셨고, 혹시 잡혔다고 하더라도, 이 밤에 CCTV 화질로는 주인님의 움직임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추적당할 염려는 없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도 확실했다. 경훈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브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진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폭력을 동반한 협박이라니…. 위험이 큰 방법이었습니다.
“협상이야, 협상. 그리고 잘 마무리되었잖아.”
-아직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닙니다.
이브의 지적에 경훈이 피식 웃었다.
“일을 진행할 때는 과감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은 칼을 찌를 타이밍이었어.”
-그 부분은 제가 아직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에 대한 공부가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브의 대답과 달리, 이브는 조금씩 인간을 닮아가고 있었다. 경훈은 이브의 대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틀 뒤, 경훈은 메일함으로 상당한 양의 문서를 받게 되었다.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있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각성자 협회에 관한 내용이었다.
-각성자가 공개되기도 전에 재벌 일부는 각성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재벌들은 미리부터 각성자들을 회사 내로 흡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걸림돌이 될 각성자 협회를 해체하거나 망가뜨리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 계획 중 하나가 이번 돌연변이 사냥 시연입니다. 사고를 일으켜서 사냥에 실패하도록 할 생각이었습니다.
경훈도 화면에 적혀있는 계획서를 보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보다 하 회장님 회사가 발을 깊게 들여놓았던 모양이야.”
-재계 순위 20위권 안에 있는 회사입니다. 한국 내에서 본다면 무시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예상보다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브가 경훈에게 물었다.
-이 자료를 공개하실 겁니까?
“아니, 작전을 미리 알았는데 공개할 이유가 어디 있어. 괜히 공개했다가 다른 걸 들고 오면 곤란해. 그냥 현장에서 막아버리면 돼.
-주인님이라면 그럴 거로 생각했습니다.
“훌륭해. 점점 사람의 심리를 이해해가고 있어.”
-….사람의 심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경훈은 자료를 받은 뒤,하 회장에게 약속한 포션 삼 분의 일을 보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남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약속한 5일째였다.
그 시각, 무인도에서는 각성자 협회 일행이 바닥에 누워 경훈과 진혁을 욕하고 있었다.
“죽겠다.”
“악마 교관, 죽어라.”
“방독면 아저씨, 나빠!”
“일반인이 아니잖아요. 우릴 속였어. 흑.”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었지만, 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팬 바위와 자기 주먹을 번갈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47화 < 블랙 스미스〉
그날 해가 질 무렵 경훈은 일행이 훈련을 받는 섬에 돌아왔다.
섬까지 올 동안 살펴본 근처 바다와 남도의 어촌들의 분위기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지방의 일반 국도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외의 도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권력을 정식으로 동원하지 않는 한 단합 대회 기간 안에 섬을 찾기는 불가능 합니다.
경훈은 이브의 말을 들으며 배에 실린 짐을 백사장에 내려놓았다.
백사장에는 각성자 협회 일행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누워있었다. 그들은 경훈이 도착한 것을 원망의 눈길로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백사장 위로 아이스박스와 음식이 든 것처럼 보이는 가방들이 던져지자 일행은 벌떡 일어났다.
“설마…. 먹을 거?”
“전투 식량은 이제 싫어요!”
“고기! 샐러드! 제대로 된 음식!”
다행히, 경훈이 가져온 박스들은 고기와 각종 요리 재료가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일행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신나게 야외 파티를 시작했다.
확실히 각성자의 몸은 달랐다. 조금 전까지 죽어가던 사람들이 금방 쌩쌩해져서 신나게 먹고 떠들었다.
경훈과 진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훈련은 괜찮았어?”
“전투에 잘 안 맞는 사람도 있긴 했어요.”
그는 꼬치를 물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본적인 스팩이 다르니,훈련들은 잘 따라왔어요. 모두 익숙해지게 하는 것뿐 이었죠.”
“사격들도 잘하고?”
“사냥용 엽총으로 한 훈련이긴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도 있고 해서 다들 총에 익숙해지긴 했습니다.”
경훈의 배낭 안에는 홍콩에서 구한 개조 총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하지만, 아직 한국 안에서 꺼내놓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 특성이라는 것들을 전투에 활용하기는 만만찮을 것 같아요. 실전이 좀 있어야 감이 잡힐 것 같은데….”
진혁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말한 진혁이 말을 멈추었다. 잠시 뒤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훈련하면서 형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님도 각성자라면서요. 저들을 구한 것도 형님이었고. 솔직히 어느 정도 의심을 하긴 했습니다. 처음 돌연변이 괴물과 마주쳐서 멀쩡하게 살아나고, 뒤에 사건에서도 무사하고.”
진혁의 말에 경훈이 피식 웃었다.
“내 옛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며.”
“그래서 반신반의였죠.”
진혁도 슬쩍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어느 정도 이야기해 줄 생각이었다. 경훈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공장 돌연변이 사건 직전에 각성한 것으로 말해주었다.
그 뒤에 몇 사건에 휘말리고, 지금은 EV 사이트에 가입해서 한두 가지 일을 도왔다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차원 이동은 당연히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브를 공개할 수 없으니 EV가 자신의 소유라는 것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진혁을 어이없게 만들기 충분했다.
“술 마실 때마다 실업자라고 한탄하던 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군요.”
“뭐, 아직 실업자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주인님의 그 말은 실상을 아는 사람에게 욕을 먹기 딱 좋은 말입니다.
실상을 아는 사람은 이브밖에 없으니, 이브에게 욕을 먹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각성할 것이란 것도 예상했었습니까?”
진혁이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여러 일을 경험하는 동안에 각성자를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할까?”
-제가 없었으면 각성 때까지 알아보지 못했을 게 분명했습니다.
경훈은 이브의 말을 무시하며 진혁에게 질문했다. 진혁은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는 거야?”
전혀 진혁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진혁이 대답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형님처럼 일을 그만두고 숨어지내야 할까요?”
진혁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직장을 잃고 숨어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경훈이 맡긴 일을 제대로 해 준 것이었다.
경훈은 진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각성자가 공무원으로 일하기는 어려울 거야.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야지.”
경훈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겨우 각성자 등록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상황입니다. 사람들도 각성자를 실제로 보면 무서워하고요. 일자리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경훈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하 회장이 보내준 서류에 따르면 재벌 그룹은 벌써 여러 명의 각성자들을 데리고 있었다.
연구용인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데리고 있는 것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취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런 회사에 진혁을 소개할 생각은 없었다.
“새로 취업할 곳이 눈앞에 있잖아. 재력도 나쁘지 않고, 투자도 계속 들어올 거야.” 경훈이 즐겁게 식사를 하는 협회 사람들을 가리켰다.
-협회에 투자를 더 하실 생각입니까? 증자하더라도 지분 투자는 안 받을 듯합니다만…..
지금도 가명으로 얻은 지분이 임원 한 사람 몫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경훈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방법이야 이브와 찾아보면 그만이었다.
경훈의 말에 진혁이 생각에 잠겼다.
경훈은 고민하는 진혁 옆에 앉아 협회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람들은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경훈에게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일 또 고생할 텐데, 지금이라도 즐겁게 지내는 것 같으니 경훈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 일행은 경훈이 타고 온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다.
일행은 육지로 갈 줄 알고 기뻐했다가 배가 다른 무인도로 향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아직 훈련이 남은 건가요?”
울상이 된 다희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전하고 다른 훈련이니 다희는 그리 힘들지 않을 거야.”
경훈의 말에 정규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희는 힘들지 않을 거라니. 그럼 다른 사람들은 힘들 거라는 이야기잖아?”
정규의 말에 사람들은 경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경훈이 쓴 검은 선글라스는 모두를 외면했다.
배는 바위투성이 돌산으로 이루어진 섬에 도착했다.
경훈은 근처 바위에 배를 묶고 일행과 함께 섬에 올랐다.
일행은 각자 짐을 지고 가파른 돌산을 등반했다.
짐은 무겁고 부피가 컸지만 각성한 일행들에게는 등산용 배낭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어, 까만 염소다!”
일행과 함께 섬 둔덕을 오르던 다희가 산 정상을 가리켰다.
높은 바위산 꼭대기에 흑염소가 서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희와 설연은 신기한 듯이 흑염소를 바라보았지만, 다른 남자들은 흑염소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비율이 안 맞았다. 돌산 꼭대기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흑염소가 저렇게 크게 보일 리가 없었다.
진혁이 경훈에게 물었다.
“설마, 돌연변이?”
진혁의 말에 모두가 놀라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을 마쳤으니, 이제 실습입니다.”
“네?”
“거짓말!”
일행의 놀란 목소리가 바위산 위로 메아리쳤다.
군대와 정부가 열심히 돌연변이를 사냥하고 있었지만, 국토 전부에 손이 닿는 것은 아니었다.
비무장 지대에는 처음 보는 괴물이 지나다닌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지리산 깊은 산속에서도 괴수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섬도 마찬가지 였다.
바다 낚시꾼들이 섬에 있는 이상한 동물들을 보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도 했지만, 외진 섬까지 가서 확인해 볼 사람은 없었다.
이브에게서 정보를 얻은 뒤 그는 소문의 섬을 미리 답사했고, 옆에 있는 섬에 베이스캠프를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건 말고, 경훈은 일행이 짊어지고 온 가방에서 장비들을 꺼냈다.
사냥용 엽총들과 전경용 방패. 묵직한 강철봉과 각종 장비. 그나마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장비들이 었다.
“실제 사냥 때는 군대의 지원도 있을 거고, 기본 화기도 쓸 수 있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경훈의 말에 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자가 일반인들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맨몸으로 돌연변이들과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총기를 들고 돌연변이들과 싸우면 지금은 군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번은 각성자들이 나선 게 아니라 상대방이 시비를 건 것이었다.
“그래도 차별된 점을 보여주긴 해야겠죠.”
상대가 일을 벌였다지만, 군인들보다 잘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리가 없었다.
울상이 된 사람들에게 경훈이 장비를 건네주며 말했다.
“전에는 꽤 많은 수의 흑염소가 사는 섬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 흑염소 괴물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성들이 입을 막았다. 경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경훈의 말이 거슬렸는지, 일행을 지켜보던 흑염소 괴물이 고개를 들고 괴성을 질렀다.
메에에에에!
고막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흑염소 괴물이 휙휙 바위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힉! 엄청나게 커!”
일행에게 쑥쑥 다가오자 일행은 괴물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웬만한 승합차만 했다.
경훈은 진혁에게 신호를 보냈고, 진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 훈련한 대로 진형을 갖춰!”
“네?”
“어, 난 어디였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덩치는 군경 방패를 들고 일행의 앞에 자리를 잡았고, 군대 물이 덜 빠진 정규도 금방 엽총을 들고 덩치 뒤에 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 어설펐다. 제자리에 서지도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움직일 뿐 이었다.
“모두 정신 차려!”
진혁이 일행에게 호통을 쳤지만, 경훈은 뒤에서 오합지졸을 바라볼 뿐이었다.
– 괜찮겠습니까?
“진혁이 있으니 문제없을 거야. 정 뭐하면 내가 나서면 되고.”
경훈이 뒤로 돌린 손에는 이미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메고 있는 배낭에는 검 두 자루가 들어있었다.
흑염소 괴물은 금방 들이닥쳤다.
쾅!
다행히 덩치는 흑염소의 진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방패는 그렇지 못했다. 단단히 만든 군경 방패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뒤로는 개판이었다.
“으악!”
“이쪽으로 달려온다!”
탕! 탕!
“총 쏴!”
“으아! 끄떡없어요! 총으로는 안돼요!”
“으앙! 무서워!”
덩치가 몸으로 막고, 진혁이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일행은 흑염소를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결국, 경훈이 나서서 흑염소 괴물을 물러서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줘.”
뒤쪽에서 구경만 했던 다희가 훌쩍거리며 경훈을 노려보았다.
“힘들지 않다고 했으면서……"
그녀는 경훈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끙끙거리는 일행에게 달려갔다.
잠시 뒤, 부상이 나은 일행에게 경훈이 소리쳤다.
“잘 쉬었죠? 다시 합시다. 내일까지 잡아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일행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훈을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진혁도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경훈을 보았다.
네 번에 걸친 경훈의 유인과 사냥으로 일행은 결국 흑염소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덩치가 지친 흑염소의 뿔을 잡고 버티고, 옆에서 총과 각종 무기를 우격다짐으로 쑤셔 넣어서 끝낸 싸움이었다.
일행은 기쁜 기색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졌고, 경훈은 흑염소 괴물의 몸에서 마나석을 채취했다.
“이대로는 쉽지 않겠지?”
-화기를 쓰면 좀 나을 것 같지만, 군인들과의 차별화는 무리 입니다.
“어쩔 수 없다. 예상보다 이르지만, 등장시킬 수밖에 없겠어.”
-지금 진행할까요?
경훈은 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글을 올리겠습니다.
이브의 말이 끝나는 순간, EV 홈페이지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 블랙 스미스: 저 혹시 한국의 각성자 협회와 연결할 방법 없겠습니까?
┗ 네? 무슨 일인데요?
┗ 아, 기사 보니까 무슨 몬스터 잡는 시연 한다고 하지 않았어?
┗ 그거 가능하긴 한 건가요? 힘이 좀 세졌다고 그런 괴물과 싸울 수 있을 리가…….
┗ 그래도 기대가 되긴 해.
┗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말 좀 들어보자고.
┗ 블랙 스미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좀 특이한 특성을 얻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 EV입니다. 블랙 스미스님과 대화를 진행하겠습니다.
┗ 오, 관리자가 나왔어 !
┗ EV 님이다!
┗ …..
┗ …..
갑자기 등장한 관리자에 게시판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EV는 게시판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말을 꺼낸 블랙 스미스라는 아이디도 게시판에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홈페이지 목록이 변했다.
6. 장비 및 아이템 거래
6번 목록에 (작업중)이라는 표시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6번 목록 안에는 두 개의 아이템 이름이 반짝였다.
블랙스미스의 대검 ( 대여 )
블랙스미스의 방패 ( 대여 )
48화 < 배달〉
백산 그룹 본사.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올라타며 하 사장은 뒤따라오는 비서에게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출근하셨다니! 지금 병원에 계셔야 할 분이 왜 회사에 있어!”
“회장 비서실에서 조금 전에 알려줬습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서도 연락이 없었고….
박 비서실장님께서도 알려주시지를 않아서.”
비서의 말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일부러 막으신 거야. 아니, 어떻게 병원을 나오게 되신 거지? 약 찾는 것도 하는 척만 하게 했는데. 설마 연결된 거야?”
하 사장은 바로 회장실이 있는 맨 꼭대기 층을 눌렀다. 회장이자 아버지가 병원에서 나왔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그는 회장실 문 앞에 섰다.
하 사장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비서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실 안쪽 책상 뒤에 하 정일 회장,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노인은 병원에서 봤던 모습과 달랐다. 그는 의자에 허리를 기대지도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한창때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괜찮으신가요? 이제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들의 인사에 회장은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그의 등허리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내가 병원에 있을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더구나.”
회장의 말에 그는 바로 대답했다.
“모든 일은 비서실장 편으로 보고 드렸습니다.”
하 회장은 피식 웃었다. 아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과장하고 축소했지만, 일 자체를 빠뜨린 것은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많은 큰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보면 아예 쓸모 없지는 않아 보였다.
“우선 장난친 건 원래대로 돌려놓아라. 아직 몇 년은 더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듯하니.
” 아버지의 말에 그는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각성자 협회인가에 다른 회사들하고 함께 작업하는 것 있다고 했지?”
회장의 말에 그는 한쪽에 서 있는 비서실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비서실장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회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입맛이 썼다. 열심히 약을 쳤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비서실장 편에 보고 드린 것처럼 다른 그룹과 진행 중인 일에 방해가 되어 작업중입니다. 하지만, 아직 일에서 빠질 수 있습니다.”
건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분명 그 약을 먹은 듯했다.
각성자들과 연관 있는 곳에서 만들어진 약이라고 했다. 그쪽하고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래서는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계속 진행해. 아니, 더 지원해. 최대한.”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다. 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른 건들은 차차 이야기하고, 지금은 네 동생들이나 올려보네.”
예전과 같은 축객령이었다. 하 사장은 인사를 하고 회장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나가자 회장은 슬쩍 의자에 기댔다.
종양도 줄고 병세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신기한 약 으로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며 그는 한쪽에 선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나?”
실장은 한 사장이 나가기를 기다린 듯했다.
“사장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아는 사람이 적은 게 좋아. 어쨌거나 양다리를 걸친 건데 소문나서 좋을 것 없지.”
회장이 아플 때 비서실장은 큰아들 쪽에 섰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알고 있는 회장의 비밀을 하나도 누설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회장이 계속 그를 쓰는 것이었고, 이번에도 용서해준 것이다.
“그런데, 왜 더 지원하라고 하신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손해가 더 커질 텐데요.”
“그래야, 일이 망가졌을 때 의심을 받지 않지. 망가지지 않으면 한몫 잡을 수도 있고, 실패했을 때 손해를 핑계로 빠져나오기도 쉽고.”
회장은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새로운 줄 잡으려면 몇 년 더 기다려. 병이 치료되었다고 해도 난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야.”
비서실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는 회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각성자 협회의 단합 대회 추적에 실패한 감시자들은 그 뒤로 눈이 터지도록 협회 건물을 감시했다.
단합 대회 장소를 찾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 뒤에 위에서 내려온 지시 때문이었다.
“협회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을 체크하고, 택배 물건을 모두 확인하라고요?”
옆 건물에서 망원 렌즈로 협회가 있는 건물을 지켜보던 감시원 하나가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합니까? CIA도 아니고, 이렇게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몇이 나 들켰는데.”
감시 대상을 일반인을 여기고 필요 이상으로 접근했다가 벌써 여러 명이 구치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구치소에서도 잘 빼주지 않아 다들 불만이 상당했다.
“갑자기 외국 놈들도 보이는 것 같고, 정말 무슨 일이래?”
망원 렌즈에 보던 감시자의 질문에 식사하던 선임 교대자가 대답했다.
“돌연변이 놈들이 접속하는 홈페이지에 뭔가 글이 올라왔나 봐. 놈들 중 하나가 만든 무기라나 뭐라나. 덕분에 위쪽이 발칵 뒤집혔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면 또 다른 문제거든."
“쩝, 복잡하네요. 그보다 이번에 새로 나타난 놈은 누구랍니까? 그 녀석도 감시 대상에 넣어야 하나요?”
감시원은 얼마 전에 나타난 덩치 큰 남자에 관해 물었다.
“이번 일로 훈련받으려고 부른 경찰 특공대인 것 같대. 돌연변이 사냥 전문가라나?”
“경찰이면 공무원이잖습니까? 이런 놈들하고 같이 있어도 되는 겁니까?”
“나도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며칠 전에 퇴직했데. 암튼 같이 감시해.”
감시원은 선임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공무원 꿀 보직을 발로 차고 나오다니, 이런 일을 해서 먹고사는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어, 택배?”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구시렁거리던 그가 급하게 선임을 불렀다.
놀란 선임이 수저를 뒤로 던지고 그의 옆으로 달려왔다. 선임은 망원경을 꺼내 건물 입구를 확인했다.
협회 사무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 파란 잠바와 모자를 쓴 택배 기사가 서 있었다.
“어디서 온 거야! 차는 어디 있어?”
“어, 오토바이에요.”
“젠장, 오토바이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덩치 큰 국제 택배라고 했잖아!”
택배 기사가 나타나자 건물 앞 도로도 부산스러워졌다.
벌컥.
다른 건물이나 길가에 세워진 차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새워진 차에는 계속 시동이 걸려 있었다. 의심되는 차가 있으면 차로 막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거기 잠깐!”
“기다려!”
차에서 내린 이들이 택배 기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몇몇은 아예 달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곳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근데, 저렇게 드러내놓고 달려들어도 되는 건가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겠지.”
지켜보던 두 감시원은 예상보다 많이 쏟아져 나온 사람에 어이가 없었다.
아쉽게도 건물 앞 활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택배 기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가 들어가자 바로 유리문이 닫혔다. 달려들던 사람들은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택배 기사는 계단을 올라 3층에 있는 협회 사무실로 들어 갔다.
각성자 협회는 작지 않은 건물의 층 하나를 모두 쓰고 있었다.
협회원 숫자와 비교하면 너무 과한 크기였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펑. 펑.
일행은 사무실 하나에 매트리스를 깔고 한참 진혁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다.
끼익.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등장한 택배 기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누가 물건 샀어요?”
“다희야 물건 받아줘.”
“ 네.”
쪼그리고 앉아 일행이 훈련받는 것을 구경하던 다희가 택배 기사 앞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물건을 받기 위해 양손을 내밀었다.
턱.
그녀 손위에 묵직한 쇳덩어리가 올라갔다.
“무거워!”
강화된 힘 덕분에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게였지만, 예상치 않은 무게에 그녀는 그만 물건을 놓칠뻔했다.
놀란 다희가 손 위에 올려진 물건을 확인했다.
“방패?”
쿵!
그리고, 그녀 옆에 거대한 검이 세워졌다.
검을 세우는 소리에 모두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는 다희와 그녀 옆에 세워진 검을 보게 되었다.
“어, 진짜 왔어 !”
“저거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검하고 방패잖아.”
“정말?”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설연이 먼저 다희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검과 방패는 신경도 쓰지 않고, 택배기사에게 인사했다.
검은 선글라스와 파란 모자를 깊게 눌러쓴 택배 기사가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EV로부터 배달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택배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검은 선글라스를 보고 택배 기사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방독면, 운전기사에 배 선장, 택배 기사까지. 다음에는 뭐로 등장하려나.”
정규의 말을 흘려들으며 다들 경훈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번에도 EV의 일에 경훈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EV와 경훈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에게 배송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사용법은 따로 없는 것 으로 들었습니다. 여태 훈련한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경훈은 방패를 덩치에게 건네주고, 대검을 진혁에게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건이 더 필요하겠습니다.
“별수 없지, 더 뒤져보는 수밖에.”
이브의 말에 입맛을 다신 경훈은 일행에게서 몸을 돌렸다.
“어, 가시려고요?”
놀란 설연의 물음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건을 전해주러 온 것뿐이니까요.”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밥이라도 같이 드시는 게.”
뜬금없는 덩치의 말에 이어, 걱정스러운 종철의 말이 이어졌다.
“그보다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몰래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그의 말에 다희가 신이 나서 의견을 냈다.
“그럼, 똑같은 모습으로 분장하고 같이 나가서 막 혼란하게 만드는 거예요.”
“차를 타고 달리면 못 쫓을 것 같은데.”
다희에 이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의견을 냈지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경훈은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따라 나왔지만, 경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협회를 감시하는 사람들은 택배 기사가 밖으로 나오기를 계속 기다렸다.
나가는 모든 사람을 확인하고, 차량도 감시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택배 기사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택배 기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경훈은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멀리 바람에 흔들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각성자 훈련소]
천호동을 떠나 한나절 동안 달려온 결과였다. 그는 천호동과 송파동을 뚫고, 잠실에 있는 각성자 훈련소에 도착한 것이다.
과거 한국 제일의 실내 놀이시설이 이곳에서는 각성자 훈련소로 변해 있었다.
아쉽게도 각성자 센터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멀찌감치 떨어진 건물 안에서 차원문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저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협회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시연 일은 내일이었다.
경훈은 석촌 호수를 눈에 담고 차원문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