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49
“자네는 두렵지도 않나? 리오네프 군이 코앞까지 왔다잖아.”
“두렵기야 하지. 하지만 가족을 지키려면 이 나라를 지킬 수밖에.”
“우리 같은 말단이 그런 사명감을 가져 봤자 무슨 소용인가. 쯧, 옆집 의사 놈 말대로 진작 도망칠 걸 그랬어.”
말을 꺼낸 병사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 순간, 짐승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그것도 꽤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다 보니 두 병사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자네, 방금 들었나?”
“어, 어. 똑똑히 들었네. 분명히 들짐승 소리인데…… 이상하지?”
일평생 성문을 지키며 짐승 한 마리 마주친 적 없는 그들이었다.
이곳에서 들려선 안 되는 소리에 두 병사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병사의 말대로 섬뜩한 기운이 퍼져 있었다.
가족이 있는 병사가 신중히 말을 꺼냈다.
“내 사과하지. 자네 말대로 분위기가 정말 이상해. 아무래도 보고를 해야 할 거 같아. 얼른 다녀오겠네.”
“이봐, 잠깐…… 커헉!”
그를 붙잡으려던 병사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보고하기 위해 움직이던 병사는 그 상태로 몸이 굳어 버렸다.
선득한 혈향이 코끝을 간지럽힌 탓이다.
병사가 공포에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끄윽!”
그 역시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병사들 위에는, 태양을 삼킨 듯한 황금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 * *
제노바의 성문이 개방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성 내부에 있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들의 침입을 알리기도 전 죽음을 맞이했다.
제노바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왕궁이 디트리오 공작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뒤였다.
이에 신하들은 훗날을 도모하며 가지 않겠다는 왕을 억지로 도주시키려 했지만, 공작의 유능한 수하에 의해 저지당하게 된다.
그렇게 디트리오 공작 앞에 무릎 꿇게 된 제노바 왕.
그가 굴욕적이라는 얼굴로 말을 뱉었다.
“다른 이들은 살려……!”
하지만 문장을 끝맺진 못했다.
키르젠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른 탓이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실로 단순하고도 허무한 끝이었다.
제노바 왕의 충격적인 죽음에 그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을 유능한 수하라 자부하던 제롬마저도.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
그렇게 소름 끼치는 적막만이 궁 안을 가득 채웠을 때, 키르젠은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손끝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제노바 왕을 잡기 위해 적을 베어 넘긴 흔적이 가득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왜 어려운 길이라 여겼는지.
파도처럼 밀려오는 공허함에 키르젠은 눈을 감았다.
멀리서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가 느릿하게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수도로 돌아간다.”
아득하게만 여겨지던 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 * *
제노바 왕의 죽음이 리오네프 전역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리오네프 왕은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 축제를 열었다.
형제국이었던 제노바는 그간 리오네프와 사사건건 비교 대상이 되던 나라였다.
특히나 그 비교가 극에 달한 건 선선대 때부터 이어진 통치였다.
민생을 하나하나 굽어살피며 이로운 통치를 하던 제노바 국왕은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각국의 정상들마저 본받아 마땅하다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이니, 리오네프 왕은 열등감에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그런 제노바 왕이, 단 한 순간의 실수로 그에게 명분을 쥐여 주었다.
두 왕국이 맞닿는 접경지에서, 제노바 군사가 화적 때를 소탕하다 국경을 침범한 것이다.
평소 제노바를 눈엣가시로 여긴 리오네프 왕은 그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깔보던 제노바 왕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전쟁을 벌였고, 마침내 숙원을 이뤘다.
이제 더는 자신의 위명과 비교할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흡족하였다.
다만 반발심이 강할 제노바민을 생각하면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들을 복속시키기까지 많은 난관을 거칠 거로 예상되었다.
빌어먹을 제노바 왕 때문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제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칠 순 없다며 민심을 챙기는 위선을 떨었다.
더욱이 죽음이 닥친 그 순간까지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걸하려는 가증스러움을 보였다고 한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신파극이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결국 승자는 자신인 것을.
그들은 패전국의 백성으로 승전국의 지배자인 자신의 말을 따라야 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디트리오 공작의 어떠한 부탁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현재의 그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 * *
그리고 그런 리오네프 왕의 생각이 현실이 되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잔당을 정리하자마자 키르젠 디트리오가 리오네프 왕에게 개선식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깔끔하게 절단된 제노바 왕의 머리와 함께.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내온 선물이라면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개선식 허가를 두고 일부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몬테이로 백작을 필두로 한 귀족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 정도였다.
그들의 거친 항변에 리오네프 왕이 불쾌한 낯을 했다.
로이뎅 몬테이로가 흥분한 귀족들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왕을 설득했다.
“전하, 명령을 재고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몬테이로 백작. 이번만큼은 자네 부탁이라도 어쩔 수 없네. 그간 나라를 위해 고생한 이들이 아닌가, 마땅히 승전의 영예를 누려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나, 앞날을 내다보셔야지요. 전쟁을 치르느라 나라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한순간의 명예를 위해 국고를 탕진할 수 없는 노릇. 제 마음도 헤아려 주십시오.”
개선식을 여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고를 탕진할 수준은 아니다.
당장 왕가의 사재까지 털어 축제를 벌인 마당에, 정작 전쟁 영웅들은 국고가 비어 홀대한다?
민심을 잃기 딱 좋은 이유였다.
최근 승전 소식을 알리며 왕의 권위를 공고히 한 그였다.
걸리적거리던 제노바 왕이 사라진 지금은 명망을 쌓을 수 있는 적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얄팍한 명분을 내세워 제 앞날에 잿물을 뿌리려 하다니.
리오네프 왕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언행이었다.
물론 로이뎅 역시 완벽한 명분이 될 수 없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더구나 이젠 복속될 제노바민을 보살펴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터전, 식량, 생활의 안정까지. 끊임없는 지원이 필요할 텐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 것입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지요.”
로이뎅이 구슬리듯 말을 이었다.
“눈앞의 민심은 개의치 마십시오. 당장은 반발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힐 터이니. 지금은 제노바민을 챙겨 덕망을 쌓는 게 앞날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됩니다.”
실제로 개선식을 열게 되면 제노바민의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더욱 오래 걸릴지 몰랐다.
나라 잃은 슬픔과 제 가족을 죽였을지 모를 적군의 금의환향에, 그 누가 순순히 축하 인사를 건네겠는가.
증오로 똘똘 뭉쳐 반감을 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확실히, 그들에겐 자비로운 승자의 아량이 필요한 시점일지 모르겠다.
리오네프 왕이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치자, 이를 놓치지 않은 개선식 반대파 무리가 하나둘씩 첨언했다.
“몬테이로 백작 말이 맞습니다. 그들의 민심을 보살펴 치세를 누리셔야지요. 모두가 전하를 칭송할 것입니다.”
“패전국의 백성들을 잘 포용하면 그 또한 대단한 업적 아니겠습니까? 성군으로 이름을 남기시는 겁니다. 제노바 왕가도 하지 못한 일이지요.”
입바른 아첨들이 줄줄이 따르며 리오네프 왕을 흔들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반대 주장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체이스 후작이 여상히 입을 열었다.
일찍이 그는 개선식을 여는 것에 있어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전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하지. 말해 보시게, 후작.”
“개선식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봅니다. 최대한 성대하게 말이지요.”
“이유는?”
“그들의 명성에 전하가 가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은 디트리오 공작이 될 테고요.”
“……그게 좋은 의미로는 들리지 않는데, 체이스 후작.”
리오네프 왕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체이스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가 감히 전하께 누를 끼칠 만한 제안을 하겠습니까. 이는 분명 전하에게도, 제노바민을 수용해야 할 우리 귀족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일입니다.”
체이스 후작의 발언에 대다수의 귀족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후작의 의도를 간파했으므로.
분위기가 후작 쪽으로 넘어가니 반대파에 있는 귀족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체이스 후작. 그 말은 디트리오 공작의 명성이 전하의 명성보다 높아져도 괜찮다는 말이오?”
“졸타 자작,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군. 전하의 명성이 고작 그 정도에 흔들릴 거로 생각하는가? 그 전제 자체가 전하를 모독하는 발언이네.”
체이스 후작의 말대로 리오네프 왕은 졸타 자작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다른 노귀족이 혀를 끌어 차며 훈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