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87
에밀리나는 그 상태로 굳어 버린 키르젠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조용히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평소라면 꼬리라도 조금씩 흔들고 있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대로 얼어붙은 모양새였다.
결국 이번에도 에밀리나가 먼저 나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계속 있을 건가요?”
“…….”
그러나 키르젠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면,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없는 건가?”
“…….”
조금은 냉정하게, 혹은 쌀쌀맞게 말투를 고쳐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삼킨 에밀리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이면 나도 어쩔 수 없는데.”
그리고 앞으로 다신 얼굴 볼 생각 말라며 등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키르젠이 그제야 반응을 보인 것이다.
머리를 조금 앞으로 내밀고서, 그녀의 허벅다리를 툭 밀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이대로 떠나지 말라는 것처럼, 행동으로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지만, 거기서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서 차가운 시선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대화할 준비를 갖춰.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나를 기만할 속셈인데.”
사실, 이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은 유연한 분위기로, 살살 달래어가며 부드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키르젠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에밀리나는 강경하게 행동했다.
무르게 대했다가는 결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거 같았다.
키르젠이 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으면 했고, 스스로 입을 열어주었으면 했다.
그가 먼저 나서 설명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키르젠이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내뱉은 것은 아니다.
그는 입술을 여러 차례 여닫기를 반복하고서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내었다.
“……미안합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모습으로 말이다.
에밀리나는 그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가 흑표범인 상태에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제법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을 할 수 있었으면서도, 짐승의 소리나 내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에밀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 할 수 있었어요?”
아직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터라 말투는 반말과 존대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키르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받았다.
“이 모습으론…… 아무래도 보기 흉하니까요.”
에밀리나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키르젠이 앓는 소리를 내듯 목을 가볍게 그르렁거렸다.
그리고 더는 말을 뱉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고개를 틀어 버렸다.
솔직히, 그래. 보기에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놀라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고.
저 모습으로 계속 대화를 나누자니 기분이 어딘가 이상하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상당히 오묘한 느낌이어서 보기 흉하다는 말보다는 괴상망측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생명체를 마주친 것처럼 말이다.
살면서 익숙하게 접하는 광경은 아니다 보니 생소함에 거부감이 먼저 치민 거 같았다.
이마저도 계속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러나 키르젠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인지 괜한 말을 꺼낸 것처럼 괴로운 탄식을 흘렸다.
어쩐지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이라 에밀리나는 사과를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어. 보기 흉한 건 아니고, 그저…… 익숙하질 않아서 그래요.”
그녀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무지 말을 하는 키르젠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키르젠이 다시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묵을 지킬 뿐.
에밀리나로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하…… 이거 완전 상황이 이상해졌네.’
그녀는 이럴 생각으로 키르젠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낼 건 내고, 따질 건 따져서 그동안의 오해와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사과를 건네는 일도 적잖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식으로 말려들어서 단순히 상황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하지만 더는 그런 단호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게끔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급변한 분위기에 지난 며칠간 곱씹어 왔던 감정이 쑥 내려가 버리기도 했다.
물론 이는 키르젠의 처량한 모습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에밀리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키르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사람은 같은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드는 거냐고.’
모습만 다르지, 속 안에 든 건 분명 똑같은 키르젠이었다.
하지만 흑표범의 모습을 한 키르젠은 좀 더 추억을 공유한 키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무른 태도가 나왔다.
지금까지 공유해 왔던 편안한 시간이 그녀를 한없이 무르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풀어지니 굳게 먹은 마음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에밀리나는 제 줏대 없는 모습에 실소마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될까 봐 의식적으로 ‘키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을 동일시하지 않고 오직 ‘키르젠’만 보자고 다짐해 왔는데도, 결국 키르젠이 ‘키르’라고 생각하니 강경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만약, 키르젠이 흑표범이 아닌 사람의 모습이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으리라.
에밀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그래도 태도는 확실히 해야 했다.
말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고민되었다.
안 그러면, 별다른 소득도 얻지 못하고 관계가 이전으로 돌아갈 테니까.
게다가 전처럼 대하기도 애매해 말투가 상당히 어중간했다.
에밀리나는 그게 점점 거슬렸고, 그래서 방향을 잡고자 말문을 열었다.
“그 모습으로 대화하기 싫으면 인간으로 변하기라도 하는 게 어때요. 공작님이 키르젠이든, 키르든. 우리 할 말이 아주 많잖아요. 아니면, 여전히 말할 생각이 없는 건가요?”
키르젠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변해요, 당장.”
에밀리나가 거침없는 답변을 돌려주며 바닥을 가리키던 순간이었다.
타닷!
키르젠이 단박에 자리를 뛰쳐나갔다.
“뭐……?”
에밀리나의 눈빛이 당혹감에 흔들렸다.
그녀는 한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으니까.
‘설마…… 에이. 진짜, 설마.’
이대로 도망쳤다고?
정말로 나를 내버려 두고서?
당장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변명조차 하나 없이?
“……진짜 미친 건가?”
에밀리나는 비속어까지 내뱉을 정도로 황당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멍청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자신을 안 볼 생각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키르젠이?
‘그럴 리가.’
에밀리나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하.”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탄식을 뱉었다.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야! 당장 거기 안 서?!”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 * *
그러나 잠시 후. 에밀리나는 크게 분노했던 제 모습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숨까지 씨근덕거리며 필사적으로 키르젠을 쫓아와 봤는데, 그가 저택 현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나온 모양인지 머리칼은 잔뜩 흐트러지고 셔츠 단추는 잘못 끼운 채였다.
누가 봐도 저를 만나기 위해 서두른 모양새라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따져 묻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게, 말 한마디 없이 무작정 뛰쳐나가는데 당연히 오해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문제를 파고들었더니, 돌아오는 말이 아주 할 말을 없게 만들었다.
당장 변하라는 말에 어쩔 수 없었다며 사과를 건넨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다.
‘옷, 그래. 옷…… 입어야지. 응…….’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뻘쭘함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키르젠은 옷을 입고자 저택에 들른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사람으로 변했더라면 아주…… 아주 민망한 상황이 연출됐으니까.
에밀리나는 어릴 적 아무것도 입지 않은 키르젠의 민낯을 떠올리며 짧게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