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88
키르젠의 도망(?)에 화를 내기엔 이유가 너무 정당했다.
그게 제가 화를 내지도 못하고 부끄러워하게 된 계기였다.
에밀리나는 끝내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찾아오게 된 잠깐의 정적.
에밀리나는 키르젠과 함께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기나긴 침묵을 지키며 멋쩍어하고 있으니, 키르젠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전에 없던 당황스러운 태도라 에밀리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렇게 다시 보니 영락없는 키르가 눈앞에 앉아 있던 것이다.
에밀리나는 이렇게나 빨리 달라진 시선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끊어진 대화부터 이어 가고자 말을 던졌다.
“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는 게 어때요?”
“어떤 말을…….”
“그동안, 왜 나를 속였는지에 대해?”
“…….”
“좀 전의 일은 설명이 끝났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야죠. 저는 공작님한테 듣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요.”
물론 자신도 할 말이 아주 많았고.
에밀리나가 직설적으로 그렇게 말하자 키르젠이 올 것이 왔다는 사람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시겠죠. 결과가 아니었을 뿐이지.”
에밀리나가 비뚜름한 태도로 말을 꼬았다.
키르젠이 허둥지둥 답했다.
“정말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그저?”
“그저, 그냥…… 하아.”
키르젠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도무지 이 대화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밀리나에게 설명을 하긴 해야겠는데, 차마 제가 생각한 그대로의 진실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괜한 감정으로 시작된 일이라는 걸, 솔직한 말로 전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진실을 전하자니 그녀에게 경멸을 사게 될까 봐 두려웠다.
겁쟁이라고 해도 좋다. 그만큼 키르젠은 에밀리나가 가질 부정적인 감정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에밀리나는 그런 키르젠을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더 이상의 침묵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히 뜻을 전했다.
“또 입 다물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여기서 더 안 좋아질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제 감정을 신경 쓰느라 눈치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소리였다.
이미 정체를 숨긴 시점부터 그리 좋은 감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키르젠이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기어가듯이.
“……했습니다.”
“뭐라고요?”
“……나서……다고요.”
그 탓에 에밀리나는 다시 묻다가도 짜증스럽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려요. 저한테 말해 줄 생각은 있는 거예요?”
그러자 키르젠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심술이 나서 그랬어요!”
“…….”
“누나가…… 날, 알아봐 주지 못하니까. 그래서, 그래서…… 심술이 나서 그랬다고요…….”
그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몹시 힘든 듯 괴로운 탄식을 흘렸다.
끝에 가서는 거의 울먹이는 소리마저 내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정말 당황했다.
어린아이처럼 구는 키르젠이 너무 낯선 탓이다.
정확히는, 공작의 모습을 한 키르젠이 이질적이었다.
저 모습을 하고 있을 땐 어른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대해 왔으니까.
그래서 그녀 또한 그리 대할 수 있었던 건데. 지금 그 불문율이 깨진 기분이었다.
에밀리나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미, 미안해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나 혼자 오해할 만한 일이 있어서…….”
그녀는 제가 말하면서도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상황이 또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키르젠의 절박한 표정을 보니 사과를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키르젠 또한 자신의 어리숙한 태도를 깨달았는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적절하지 못한 행동에 창피해하고 후회하는 거 같았다.
한 손으로 가려진 손바닥 너머에는 굉장히 신랄한 표정의 얼굴이 자책을 일삼고 있었으니까.
그는 연신 앓는 소리로 입술을 짓씹더니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예. 솔직히 부인께서 저를 알아봐 주질 못하기에 심술이 나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착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는 좀 전의 행동을 만회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투도 고친 상태였다.
에밀리나가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말을 주었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어요.”
키르젠이 씁쓸히 웃었다.
“지금에 와서 말하는 거지만, 부인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행동이 유치해지는 거 같습니다. 안 그러고 싶은데…… 어느 순간 어리광을 부리고 있더군요.”
종종 키르의 모습일 때를 보면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
키르젠이 한숨을 쉬고서 말을 이었다.
“계속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심술도 심술이지만 저를 그다지 반기는 거 같지 않아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담스럽지 않을 때 사실을 전하려고 했고요.”
키르젠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넸다.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속이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에밀리나는 내색하지 않고서 양심을 밑으로 눌렀다.
키르젠이 의외로 정곡을 찌른 탓이다.
그녀는 실제로 키르젠과 마음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헤어질 상대라고 여기며 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남자 주인공인 만큼 언제, 어떻게. 상황이 변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겉으로 드러나긴 했었나 본지 제 불편한 기색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에밀리나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잠시 시선을 피했다.
키르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십시오. 그동안…… 편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는 공작님은요.”
“…….”
에밀리나의 되물음에 키르젠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다.
“…….”
“…….”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사실, 에밀리나는 말을 놓으라면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곧바로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어색했다.
‘게다가 불편해졌어.’
머리로는 그가 키르라는 사실을 알지만, 막상 공작을 보고 있자니 쉽게 말을 놓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에밀리나는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따지고 보면 키르젠은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리지 않은가?
많은 차이는 아니더라도 나이 차가 있는 편이었다.
‘으음…… 연하 남편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어리게만 보이네.’
실제로도 그랬다.
키르젠은 성인이었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새파란 청년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 찌든 자신의 내적 나이보다도 훨씬 푸릇푸릇하다 할 수 있었다.
‘하아……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거기까지 생각하니 에밀리나는 키르를 어리게만 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그녀는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마음을 조금 가볍게 먹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말은 편하게 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후! 그래, 좋아. 내가 먼저 말 놓을게. 너도 괜찮으면…… 말 놓고. 이미 알 거 다 알고, 말도 그렇게 했었잖아.”
에밀리나의 시원한 답변에 키르젠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천천히 바꾸겠습니다.”
“네가 편할 대로 해.”
“예.”
“아무튼, 나도 미안했어. 사정이 있어서 그동안 널 오해했거든.”
“…….”
“그러니까 일부러 피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이 말은 꼭 전해야 할 거 같아서.”
에밀리나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키르젠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에밀리나의 말을 경청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가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도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라니까 뭐…… 그래. 이건 넘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다른 할 말이 혹시 또 있을까?”
그녀의 나직한 물음에 키르젠이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데, 에밀리나가 먼저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만. 나도 더 있긴 한데, 이따가 다시…….”
그때였다.
똑똑. 타이밍 좋게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밀리나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문 너머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여기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신지요.”
집사 록벨이었다.
에밀리나가 키르젠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에밀리나를 보고 있었다.
에밀리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널 찾는 거 같은데. 나가 봐.”
“미안합니다. 빨리 돌려보내고 오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네 볼일 보고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던 참인지라 에밀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