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ached the ending with a death route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57
제57화
끄덕끄덕.
하긴.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황태자께 소문이 들어갔다고 하나?”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소렌 상단이 수도에 전했다는 말도 있고요. 용병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서 수도까지 흘러갔다는 말도 있고요.”
“끄응, 오비엥 백작님은 뭐라고 하시나?”
“얼른 수도로 가라고 하시죠.”
“그게 다야?”
“네.”
그동안 돈도 주고, 영토도 주었는데 고작 이거야?
황제께 갈 때 어떻게 하라는 둥, 황태자께선 뭘 좋아하시니 그걸 챙겨 가라는 둥, 소소한 팁이라도 줄 수 있잖아?
물론 그의 조언 따위 없어도 고인물인 내가 다 알긴 하지만.
‘그래, 처먹기만 하는 새끼. 두고 보자.’
황제가 오라고 했으니 가기는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지에 막 오자마자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결혼식은 미룬다 하더라도 그동안 영지가 잘 관리되고 있었는지 점검이 먼저였다.
영지는 덩치가 커진 만큼 내실도 계속 다져지고 있었다.
고블린 던전에서 나오는 사체도 비료로 쓰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었고.
가죽이 질겨 이걸 팔아서 얻는 수입이 꽤 짭짤했다.
초석 밭은 조성할 때 꽤나 꼼꼼하게 지시를 했었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다.
수십 개의 언덕 중에 한 개를 골라 초석을 만들어 봤는데 실패한 것.
완전 실패는 아니고, 얻은 게 고작 한 주먹 정도?
원래 똥 반죽 안에 초석 결정이 송골송골 맺혀야 하는데 이게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언덕 하나에서 얻은 게 주먹 하나의 양이라면 크게 실망이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잠재 기억을 끄집어내는 노력을 해 가면서 만든 건데 양이 너무 적었다.
‘6개월 정도 투자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관둘까?’
그래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화약은 큰 무기였기에 포기하는 건 성급한 것 같기도 했다.
고블린 사체로 만든 구덩이는 건들지 않고, 다른 구덩이처럼 6개월 후를 기약하기로 했다.
한편 영지는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는지 이제 운영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섬머와 레이몬드가 재정을 잘 관리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영지민들이 활기차게 일하는 걸 보면 나도 기운이 쑥쑥 날 정도니까.
“남작님, 저 없는 동안에 수고하셨습니다.”
관리의 총책임자는 실버훈이었으니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수도에 갈 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나?”
“역시 남작님은 잘 아시는군요.”
도박에 빠지긴 했지만 이전에 영주이기도 했고, 나이도 있으니 뇌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물론 선물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 거지만.
황제에게 바치는 뇌물이냐고?
맞다. 그런데 이번엔 한 명 더 추가해야 한다.
날 보고 싶어 한 황태자.
황제나 황태자나 세상 부족할 게 없는 인간이지만, 사람 사는 법이 오가는 게 있어야 없던 정도 생기는 거다.
좋은 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더 있으면 좋은 거고.
이 좋은 게 재물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난 적당한 선에서 맞춰서 할 생각이었다.
‘내 수준에 맞게.’
황제에겐 이 지역의 특산물 같은 좀 특별한 걸 골라야 했다.
재물을 바치고 싶어도 돈도 없으니까.
특산물로 고른 건… 없었다.
이 지역에 특산물 자체가 없는 게 이유였다.
결국 고심 끝에 정한 건!
“폐하께는 빅자이언트의 해골을 가져갈까 합니다.”
“흐윽, 그 괴물의 해골을? 좋아하실까?”
실버훈은 질색했다.
“수도에선 볼 수 없는 거잖습니까?”
“수도가 아니라 어디서도 보기 힘들긴 하지. 자이언트는 몰라도 빅자이언트는 절대 흔하게 나오는 놈이 아니니까.”
“그래서 가져가려 합니다.”
“으음, 난 잘 모르겠네. 폐하께서 기뻐하실 수도 있고, 어쩌면 왜 이딴 걸 가져왔냐 하실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냥 가져가겠습니다. 마땅한 선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빅자이언트의 해골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살은 다 썩어서 없어졌고, 이제 해골만 남았지만 여전히 이 거대한 건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황제는 이걸로 어찌해 본다 하더라도 문제는 황태자였다.
황태자로도 플레이를 해 봤는데 그의 성격은 다소 권위적이고, 다소 으스대기를 좋아하며, 다소 사치를 즐기며, 여자도 어느 정도 밝히는 편이었다.
쉽게 말하면 평범한 수준의 황태자란 소리.
이게 평범하다고?
그렇다.
겸손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허세가 없고, 근검절약하고, 여자를 함부로 여기지 않는 그런 황태자는 특이한 거다.
자기가 관심이 있어서 불렀음에도 선물을 안 주면 불이익이 있을 수 있었다.
‘후우, 황태자 선물은 뭐로 해야 하나? 2황자나 3황자는 어떻게 하지?’
황제에겐 세 아들이 있다.
2황자와 3황자는 어떠냐고?
2황자는 어떤 면에선 황태자보다도 훨씬 더 권위적이지만 음주가무를 무척이나 좋아하며 자유분방한 면도 있다.
여색도 물론 밝히고.
좋게 말하면 남자답고 호탕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한량 기질이 많은 거고.
이런 2황자임에도 황태자와 세력 다툼을 벌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현 황후이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의 어머니는 10년 전에 죽었다.
이때 후궁이자, 2황자의 어머니였던 현 황후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3황자는 누구냐?
지지 기반이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이.
변방에 위치한 체르니아 왕국의 공주였던 어머니가 후궁이긴 했는데, 너무 예뻐서 죽은 황후와 현 황후에게 똑같이 질투를 받았으며 둘 중에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중독사했다.
고인물인 나는 물론 범인을 알고 있다.
‘범행은 현 황후가 저질렀지만 전 황후의 묵인이 있었지.’
여하튼 어머니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심을 가슴속에 품고 복수를 꿈꾸지만, 도와주는 이가 없는 3황자는 플레이어가 나서지 않는다면 후계자 구도에서 초반에 밀려나 내전 초기에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3명의 황자 이야기는 이렇고.
‘끄응, 황태자 선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판에 2황자, 3황자를 챙길 여유가 어디 있어? 무시하자.’
수중에 가진 게 천 골드.
‘젠장, 왜 불러서 날 괴롭히는 거냐! 황태자에게 줄 선물이라면 만 골드에서 10만 골드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이 정도 가격대라 해도 일반적인 선물의 수준.
황태자 선물은 시간이 없으니 수도에 가서 마련하기로 했다.
돈 마련도 수도에서 하기로 했다.
어떻게?
‘으음, 수도에 가서 열심히 던전을 돌아야겠네. 방법은 그것밖에 없겠어.’
다행인 건 수도에는 던전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있다는 거였다.
첫 번째 던전은 오물을 버리는 하수구에 있었고, 두 번째 던전은 황성 지하에 있는 죽은 황제들의 무덤에 있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는 빈민가에 있었다.
‘세 군데를 돌면 만 골드 이상은 벌 수 있을 테니 그걸로 선물을 사자.’
출발 전에 재정을 맡은 섬머와 레이몬드가 선물을 걱정했다.
“폐하께는 빅자이언트 해골을 가져갈 거고, 황태자 전하의 선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두 사람은 영지 재정만 신경 쓰면 된다.”
“혹시 따로 챙겨 두신 돈이 있으십니까?”
섬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크, 어쩌지? 들켰네? 내가 아무렴 비상금조차 남기지 않고 펑펑 써 버렸겠나?”
“호호, 그랬나요?”
“다행입니다. 정말 걱정했습니다.”
두 사람은 안도하며 웃었다.
나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고인물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물론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
레아, 아나이스, 이자벨을 하나씩 불러 수도로 갈 건데 동행할 건지 물어보았다.
“제, 제가 가도 될까요?”
실버훈이 말썽을 부리며 사교계에 데뷔조차 못해 본 레아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럼요. 가면 수도에서 벌어지는 파티에도 참석하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반짝반짝.
“파티…….”
레아의 두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귀족이지만 태어나서 사교 파티 같은 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실버훈이 영지를 팔아먹기 전에도 몇 년이나 도박에 빠져 있었기에 레아는 이런 모임에 나갈 기회조차 가지질 못했다.
“하, 하지만 저까지 간다면 경비가 만만치 않게 들 텐데요?”
그렇지.
경비는 꽤 든다.
파티라는 게 그냥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복을 갖춰야 한다. 여자라면 드레스.
파티 드레스는 한두 푼짜리가 아니라 수백에서 수천 골드나 되는 비싼 옷이다.
그뿐만 아니라 액세서리도 있어야 한다.
보석이 들어가는 액세서리의 경우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 골드가 될 수도 있으니 한도가 없다고 봐야 한다.
꾸미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고 가면 무시만 당할 뿐이니 파티에 나가지 않음보다 못하게 된다.
‘레아만 아니라 아나이스와 이자벨까지 함께한다면 더 많이 들 테지.’
이렇게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데리고 가려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작 작위도 받으며, 황태자의 관심까지 받았는데 파티 초대를 받고 거절할 수는 없는 일.
초대가 없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아마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파티 참석은 나에게 있어선 의무적인 일이었다.
다음으로 파티에 참석해야 얻을 수 있는 이스터 에그가 있다.
‘커플이 있어야 하는 파티라 함께할 이가 있어야 해.’
커플이라면 셋 중에 하나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렇긴 하다.
‘그런데 누굴 데리고 가?’
하나만 데리고 가면 나머지 둘은 삐질 텐데.
사실 딱 하나만 정하라면 레아이긴 했다.
사교계에 데뷔는 못했어도 춤은 배웠으니까.
하지만 아나이스와 이자벨은 배웠을 리가 없다.
춤은 제대로 교습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돈이 드는 거다.
아나이스는 가난했고, 이자벨은 수녀원에 있는데 무슨 돈이 있었겠나.
그럼 나는?
나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전령이 오고 난 후로부터 도든에게 정식으로 춤을 배우고 있었다.
귀족 예절은 전에 배웠지만, 춤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었다.
수도로 빨리 가야 했기에 단기 속성으로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쉬지 않고 춤만 배웠다.
“영지전에서 번 돈이 아직 남아 있으니 경비는 너무 걱정 말아요.”
사실은 걱정해야 할 수준이지만, 돈 없다는 말을 하기 싫었다.
“그, 그럼 가고 싶어요. 꼭! 꼭! 가고 싶어요.”
처음엔 주저하더니 금세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사실 수도 나들이라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지방에 처박혀 있는 이름 모를 귀족의 자제는 평생 수도에 가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레아 다음은 아나이스.
“파, 파티는 좀…….”
춤을 못 추는 아나이스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파티에 간다고 꼭 춤을 춰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나도 도든에게 배우고 있으니 아나이스도 춤을 함께 배워요.”
“그, 글쎄요. 배워도 잘할 수 있을지…….”
“자신감을 가져요. 그리고 수도에 가더라도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몰라요.”
“네? 왜요?”
“황제 폐하께서 보시겠다고 해야 볼 수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영주님을 부르신 건…….”
끄덕끄덕.
“물론 저는 불러서 가는 입장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수도에 가서 만나는 건 또 별개의 얘기랍니다.”
오라고 해서 온 거지만 만남의 상대는 황제.
내가 보고 싶다고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길면 몇 달.
짧으면 며칠.
완전 복불복이고, 고인물인 나도 이 부분은 딱히 어찌할 바가 없었다.
운에 맡기는 게 전부였다.
‘제발 빨리 만났으면.’
수도에서의 하루하루는 전부 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