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용서해 주세요
창호살 너머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주대현. 보통 사람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본인이 만나자고 한 거니까 만날 수 있다고 치지만.
그가 있는 장소 역시 문제였다. 취미가 고약한 노인네인지, 서울에서 한참 먼 시골에 틀어박혀 살고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찾아가는 것도 귀찮은 일.
“지금?”
그렇게 되묻자, 주대현이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네놈도 모르지는 않을 터.]“그야…….”
주대현이 하는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루 만에 두 명의 사도와 만났으니, 저쪽도 분명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나 역시 그에 대비하기 위해 사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 주대현에게 정보를 얻는 것이 효율적인 행동이었다.
마계라는 건 대체 뭔지. 그리고 그곳의 지배자라는 사도는 몇 명이나 있는 건지. 그들 각각의 이름과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는지.
‘과연.’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소리나 전달하는 장난감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무데서나 만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이었고. 가능하면 안전한, 누가 훔쳐 듣거나 습격받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곳이 좋아 보였는데.
‘주대현의 저택이 딱이긴 하군.’
그곳만큼 적절한 곳은 없었다.
집행부라고 하는 친구들을 비롯해 많은 정예들이 저택을 감시, 호위하고 있는 데다가.
주대현 본인의 마력으로 오랜 세월 갈고 닦아 온 술진들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으니, 말하자면 요새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수락의 뜻이 담긴 말이 아니었다.
“다음에 보지.”
[뭐라?]그러자 주대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노한 목소리를 뿜어냈다.
창문에 붙여서 만든 간이 창호살이, 마치 정말 그 너머에 주대현이 있는 방과 이어지는 듯한 짙은 기운을 풍겼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여기서 쫄았겠지만. 나는 태연히 말할 수 있었다.
“오늘은 안 돼.”
난 주대현에게 명령을 받는 입장이 아니었다.
주대현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긴 해도, 협력 관계라면 서로 양보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기다리겠다.]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창문에 붙어 있던 창호살 역시 단순한 나무 장식으로 돌아갔다.
“너무 늦으면 화내겠지.”
아무래도 오래 기다리게 만들 순 없을 듯했다.
* * *
“그만하자.”
“응……?”
갑작스러운 말에 클레어가 운전석을 돌아보며 의아한 목소리를 흘렸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도은은 전에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정 표현이 풍부해서 늘 어떤 기분인지 표정에 잘 드러나는 아이가, 드물게도 고요하디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도은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은 운전 중이었다.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함께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그만두자는 말을 꺼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 들었어. 언니 오늘 사실 되게 위험했다는 거.”
“…….”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클레어는 미리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공략할 던전이,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엄청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제 몸 하나 간수하겠다는 이유로 물러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클레어에게는 처음 갖는 팀이자 동료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자신만 한 걸음 물러서 있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실제로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큰 위기를 겪을 뻔했으니.
“그건… 미안해.”
도은에게 전달하지 않은 건 명백히 잘못한 일이었다.
어차피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린 일이고, 괜히 말했다간 걱정만 샀을 테니.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이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지금까지 계속 믿고 의지해 왔는데.’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화를 내도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었다.
“숨긴 것 때문에 화난 거 아냐.”
하지만 도은의 목소리엔 감정적인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감정에 휘둘려서 하는 말이 아닌. 머리로 깊게 생각해 본 후 결론을 내려서 하는 이야기라는 기운이 풍겼다.
도은 역시 로얄 로드의 길드장, 최윤호에게 적지 않은 이야기를 전달받은 상황이었다.
-너무 원망하지는 말고.
최윤호가 오늘 했던 말이었다.
클레어가 이번 임무에 대해서 도은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길드에서 내려온 기밀 지침 때문이라는 이유 또한 있었다.
담당 매니저인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 내용이 뭐냐는 물음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보니, 그걸 말해 준 것만 해도 많이 양보한 거라는 게 느껴졌다.
‘그 사람…….’
밉보였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관대했다.
“저기, 그럼 왜…….”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물음에 도은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위험하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클레어가 위험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든, 숨기는 것이 있든 개의치 않았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클레어가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으면 했다.
“있지, 저번에 가려고 했던 여행. 진짜 지금 가 버릴까?”
언젠가 했던 이야기였다.
갑작스레 병에 걸리는 바람에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날이 풀리고 나면 어디든 다니기 좋을 테니까.
그때와는 달라진 점도 있었다.
“오빠는, 글쎄. 혼자 집이라도 보라고 내버려 두고. 우리 둘이서만.”
그렇게 해서 클레어를 일로부터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이제는 굳이 무리해서 던전 공략에 참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만큼, 한숨 돌릴 시간 정도는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클레어는 거절의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해.”
“…….”
클레어의 대답에 도은은 실망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니도 참.”
못 말리는 일 중독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량은 어느새 클레어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럼. 다음 주에 데리러 올게.”
“어……?”
클레어가 의아하다는 듯이 반응하자 도은이 핀잔을 줬다.
“‘어’는 무슨 ‘어’야? 스케줄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럼 왜? 내가 데리러 오는 거 싫어?”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도은이 눈을 물끄러미 뜨고 있었다.
“나는 저, 그만둔다는 줄 알고…….”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도은이 파하 하고 크게 한숨을 터뜨렸다.
“언니가 안 그만두면 나도 못 그만두지.”
도은이 한쪽 입가를 끌어당기고 씨익 웃었다. 익숙한 그 표정이었다.
“다음에 봅시다.”
“…응.”
클레어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주 스케줄…….”
뭐더라.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미처 잊고 있었다.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건 자신이 아니라 매니저인 도은이 주로 관리하곤 했으니,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괜찮았다. 도은과 공유되어 있는 캘린더 앱을 켜면 일정을 볼 수 있었으니까.
‘이건…….’
다음 주 날짜의 사각형들에 쓰여 있는 글귀들. 소화해야 하는 일정의 목록들 사이에서 한 가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 튀어나왔다.
신정훈 피디.
클레어와 도율이 함께 출현했던 부부 동반 관찰 예능, ‘부부의 세계’를 담당하던 피디였다.
‘그러고 보니…….’
송별회 날. 너무 오랜 공백기 없이 곧 시즌 2를 시작할 거라는 이야기를 귀띔받은 적 있었다.
제작 준비 기간을 고려하면 당장 무언가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도율 역시 집에 도착했다.
“저 왔습니다.”
평소라면 도율이 집에서 클레어가 돌아오는 걸 맞이하는 구도였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다.
그도 그럴 게, 저 사람도 저 사람 나름대로 바쁜 하루를 보냈던 것 같으니까.
자신과 만나기 직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던전 내의 공간에서 클레어를 도운 직후로도 어딘가 바쁘다는 듯 사라졌으니.
“왔어요?”
“네. 뭐 보고 있었어요?”
“그냥…….”
단순히 스케줄을 확인하던 것뿐이었는데.
그러던 클레어가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상기했다.
부부 동반 예능이라는 것은 도율과 함께 출연하는 것. 그러니 도율의 의사 또한 물어봐야만 했다.
“그 예능, 다음 시즌 제작에 들어갈 예정인가 봐요.”
“예능……?”
도율이 의아하게 말 끝을 흐렸다.
클레어와 도율은 둘 다 챙겨 보는 방송이 없었다.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들어도 공통된 화제가 없는데.
떠올리지 못할 줄 예상했다는 듯 클레어가 덧붙였다.
“그, 부부 예능…….”
“아.”
그제야 도율이 이해했다.
그런 도율은 이내 쓰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네, 뭐.”
클레어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도 헌터 활동과 관련되지 않은 일은 거절해 둬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오늘 그런 일을 겪은 직후였다. 본업에서 멀어져 한숨 돌릴 때가 아니라, 다시금 활동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그런 점은 도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한동안은 바쁠 것 같아서.”
사도.
그들과의 갈등이 물밑 위로 올라온 이상, 손 놓고 있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클레어 역시 어렴풋이 그 점을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게, 도율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건…….’
자신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쫓아야 할 상대를 쫓다 보니 겸사 겸사 자신과 동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굳이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질문하면 도율은 너무나도 가볍게 긍정할 듯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뭐가요?”
예능 출연을 거절하게 되어서? 그 정도로 부담스러웠나?
고개를 기울이는 도율을 보며 클레어가 피식 웃고는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게 아니라, 오늘 구해 준 거요.”
“아.”
그쪽 얘기였나.
도율이 멋쩍게 뺨을 긁었다.
태가 나지 않게 가볍게 심호흡을 한번. 호흡을 정돈하고 도율이 답했다.
“다행이네요, 클레어 씨가 무사해서.”
“…네?”
그런 도율의 말에 클레어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맞췄다.
얼마나 놀란 건지 클레어는 할 말을 잃고 눈꺼풀을 쉴 새 없이 위아래로 감았다 떴다. 들여다 보면, 긴 속눈썹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자 도율이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누가 보면 평소에 클레어가 무사하지 않길 고사라도 지내는 사람인 줄 알겠다는 불평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클레어가 뒤늦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당신이라면 분명 지나가는 길에 겸사겸사 그런 거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대답할 줄…….”
나름대로 오랜 기간 도율을 상대해 온 클레어로서.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대답에 놀라고 말았다.
그러자 도율이 한층 더 무뚝뚝하게.
“지나가던 길 아니었는데.”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었다…면요?”
“당연히 클레어 씨를 구하러 간 거죠.”
너무나도 당당한 말에, 클레어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로 인해 사고력에 쇼트가 찾아와서.
“생색내는 건 아니죠?”
그런 소리를 꺼내버 렸다.
“예?”
도율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반문했다.
“아, 아니. 실수! 방금 건 실수! 말이 헛나왔어요……!”
클레어가 필사적으로 정정했다.
생각해 보면 도율의 말에 틀린 점 하나 없었다.
엘리아나라는 여자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게 아니라, 애초에 클레어의 팀을 노리기 위해 자신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도율의 갑작스런 등장에 불청객이 찾아온 듯한 반응이기도 했고.
그러니 도율이 자기 할 일을 하다가 덤으로 클레어를 구해 냈다는 건, 자세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흐음.”
도율의 시선에 클레어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한 차례 시선을 피하고는, 그래도 이대로 도망치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다시 눈동자를 마주쳤다.
치뜬 눈으로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 용서해 주세요…….”
도율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