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좋을 대로 해라
“누란주!”
라크자르가 거칠게 문짝을 잡아당기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금속으로 만든 육중한 두께의 문이 라크자르의 우악스러운 손에 종잇장처럼 가볍게 구겨져 복도를 나뒹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그런 라크자르를 반겼다.
색채가 없는 검은 눈동자가 빛 한 줌 반사하지 않고 빨아들이는 남자였다. 그가 느릿한 동작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임무는 끝마쳤나, 조룡주?”
“닥쳐.”
장서주(長逝主).
사도들을 이끄는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사내를 상대로도 라크자르는 거리낌이 없었다.
“누각주는 어디에 있지?”
“다시 한번 묻겠다만.”
장서주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임무는 무사히 끝마쳤나?”
참고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귀찮게 굴 겁니다. 장서주가 그리 덧붙였다.
“칫…….”
라크자르가 혀를 차고는 분을 삭혔다.
지금 당장 누란주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서 그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장서주가 발을 묶겠다고 나서면 일이 몹시 귀찮아졌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 누란주를 찾아 봤자 금방 도망치고 말 거다. 지금은 장서주와의 대화를 끝내는 게 먼저였다.
“임무 말이지.”
라크자르가 의자 위에 뛰어들듯 앉았다.
“반반이다.”
“반반?”
애매모호한 대답에 장서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인가, 그건?”
“우선 전제부터가 틀렸더라고.”
라크자르가 뒤통수에 손을 대고 다리를 꼬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장서주는 그러한 행태에도 별다른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이야기만 똑바로 전해 준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우선, 우리가 생각했던 무게추가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
라크자르가 미리 들었던 내용은 이매에 관해서였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계에 내려간 라크자르가 상대한 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이매라는 여자를 찾기는 했지만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고.
“백건우라고 했던가.”
힘을 품고 있는 건 그런 이름의 남자였다.
“그런가.”
의외의 사실이었지만, 장서주는 저항하는 일 없이 받아들였다.
애초에 사실 확인을 위해 사도 중 하나인 라크자르를 파견한 것이었다. 그가 가져온 정보를 믿지 못한다면 보낸 의미가 없다.
지금은 그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래서 그자는? 돌아갔나?”
그 주인이 누구이건 간에, 앞으로도 그곳에서 계속 힘을 키워준다면 그들의 계획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라크자르는 히죽 웃으며 정말 의외의 답을 말했다.
“여기서 죽었는데?”
“그게 무슨……?”
장서주가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두 세계 사이의 위계에 너무 큰 차이가 있으면 쉽게 넘어갈 수가 없다. 좁은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몸집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조차도 구멍이 너무 작으면 여의치 않았으니. 일단은 저쪽이 성장해 무게를 불리는 걸 기다려야만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룡주? 네가 그를 이곳으로 끌어들였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백건우는 온전히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힘을 키우고, 주변에 있는 이들을 감화시키고 성장시켜 줘야 할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백건우가 이곳에 와서 죽었다는 건 계획이 흐트러졌다는 걸 의미했다.
백건우가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이곳으로 넘어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쓸쓸히 죽어 가려고 마음먹게 되리란 가능성은 너무 적었다.
조룡주 라크자르가 그 사실을 귀띔해 주었거나, 일부러 마계로 끌어들인 것. 진의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 있던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누란주, 그 자식 때문이라니까.”
“누란주가 뭘 했다는 건가?”
“개수작을 부리려 했지.”
백건우의 몸을 덮쳤던 검은 점액은 누란주의 알이었다.
누란주는 벌레와 질병을 다루는 것이 특기인 사도. 그가 부리는 무수히 많은 벌레의 알들이 들어 있는 점액이었다.
검은 점액은 숙주의 몸을 먹어 치우며 기생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원래는 좀 더 조용히 할 생각이었겠지만, 그러지 못했지.”
백건우의 창은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누란주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그가 부리는 종자들 또한 그런 것에 약했다.
그런 창에 찔린 순간 발작하듯 터져나온 건 본의가 아니었을 거다.
“그렇군. 그가 실패에 일조했다는 건 잘 알겠다. 내가 제대로 벌하도록 하지.”
“아니, 그런 건 됐어.”
라크자르에게 작전이 실패한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백건우의 창에 아무런 광채가 없어 누란주의 알이 조용하게 그의 몸에 스며들어, 저쪽 세상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있던 라크자르가 똑바로 일어섰다. 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마쳤다.
남은 건 질문 뿐.
“감히 내 조각에 손을 댄 게 마음에 안 들어.”
라크자르의 손가락에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 있었다. 누란주와의 물리적인 충돌 또한 감수하겠다는 의미였다.
평소 누란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라크자르에겐 그가 자신의 조각에 벌레를 심었다는 사실이 더없이 참기 어려운 모욕으로 느껴졌다.
몰래 했다는 것도 용서하기 어렵지만, 물어봤다 하더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장서주의 반응은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실패에 대한 원인을 보고받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너도 알고 있었나?”
“알 말인가?”
“대답 여하에 따라서 죽인다.”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였다.
가능할지 어떨진 몰라도 같은 사도끼리 반목하는 건 좋지 않았다.
“지시한 건 있지만 방법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맹세하지.”
라크자르는 장서주를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됐어.”
하지만 아무래도 라크자르와 누란주의 마찰은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두 사람이 반목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누란주는 마음만 먹으면 조룡주로부터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누란주의 굴을 상대로 분풀이나 하다가 질리면 금방 그만두겠지.’
장서주가 퇴장을 허락했다.
성을 나서는 라크자르의 눈에 어떤 여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원에 마련된 세련된 가제보 아래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라크자르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차 맛을 음미하는 듯 보였으나.
라크자르는 그녀에게 가까워질 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말라고. 네 얘기는 안 했으니까.”
그러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반쯤 뜨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투니? 마치 내게 켕기는 거라도 있단 것처럼.”
라크자르가 휙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놈을 부른 거, 너잖아.”
라크자르는 본래 이매를 상대하고 있었다.
장서주의 지시로부터 전달받은 목표가 이매였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으나, 상대를 잘못 찾았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되레 도움을 받아 놓고서는.”
“도움이라.”
그런데 그 직후 등장한 백건우라는 남자가 당첨이었던 건,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게다가 그 문을 연 건 라크자르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몰래 틔워 준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게 바로 눈앞의 상대, 요정주(料精主) 세레나였다.
백건우를 그곳에 불러서 일이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론 아니었다.
백건우라는 놈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덕분에 마계와 인간계의 위계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고. 누군가의 몸을 매개체 삼아 점액을 심어 두려던 누란주의 계획도 백건우의 광채에 의해 무산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알고 있었지?’
세레나는 장서주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라크자르는 이내 흥미를 잃은 것처럼 다시 등을 돌려 가던 길을 향했다.
“뭐, 됐어. 난 기본적으로 내 방해를 하는 놈이 아니면 안 건드리니까.”
그 길로 다시 누란주를 찾아내기 위해 길을 떠났다.
* * *
“…그래서. 그 이매라는 여자는 결국 어떻게 된 거냐?”
갑작스런 침묵에 도율이 물었다.
주대현의 이야기에는 결론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매라는 여자가 언제 나타났고,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설립자였던 백건우나 그 동생인 백건영과는 어떤 사이였는지 질리도록 들었는데.
문제는 마지막에 그 이매라는 여자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됐는지. 죽은 걸로 추정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모른다.”
“뭐?”
주대현의 무책임한 말에 도율이 이마를 짚었다.
“이 긴 이야기를 늘어놓고 결론이 모른다는 거냐?”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주대현이 딱잘라 말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들은 건 가족을 잃은 백건영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는 내용뿐이지. 하지만 백건영은 이매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으니, 처음 보는 여자가 헛소리를 하는 걸로만 치부했을 거다.”
백건우를 잃은 것과 동시에 나타난 이상한 여자. 백건영이 엇나가기 시작한 이유로는 충분해 보였다.
이매는 그런 백건영의 곁을, 단순히 소식만 전하고 떠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이 지금 상황이 되어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방은 결국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어진 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백건영은 이매를 써먹기 좋은 소재로, 이매는 백건영을 속죄의 대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건 모두 짐작에 불과하다.”
“…….”
주대현이 도율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일침했다.
제아무리 그럴싸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상 확인할 길은 없었다.
길드가 남아 있었더라면 오랫동안 중책에 앉았던 이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자들은 모두 백건영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 속에 깔려 죽었거나, 법의 심판을 받았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만 여기서 더 노력을 쏟을 이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긴 얘기 잘 들었다.”
도율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도율에게 주대현이 물었다.
“이제부터 어쩔 셈이지?”
모두 백수아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도율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백수아는 백수아의 인생을 살게 두어야 할지, 아니면 망량의 곁에서 이매의 대역을 도맡을지.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할 사람이 더 있지 않나.”
“백우진에게는…….”
“말 안 해.”
이야기 속의 백건영과 백우진이 겪은 백건영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백우진이 느끼기엔 그럴 것이다.
한평생 자신을 억압해 왔던 인간이 과거엔 어땠다는 이야기를 들어 봐야 유익하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동생 쪽.”
이매의 동생인 망량.
누이의 흔적을 찾아 헤맨 자에게는 이 경위를 설명해 주는 것이 좋아 보였다.
“좋을 대로 해라.”
그 부분에 대해선 관여할 생각이 없는 듯, 주대현이 가벼이 허락했다.
“누가 보면 네 허락이라도 필요한 줄 알겠네.”
“……그 이야기, 누구한테 들은 건지 벌써 까먹었나?”
“그건 그렇구만.”
도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차 확인했다.
“아무튼 좋을 대로 하라고 했으니 말해도 되는 거 맞지?”
“…….”
그 뻔뻔함에 질렸다는 듯 주대현이 이마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서 눈앞에서 사라져라.”
“알았다고.”
주대현의 타박에 도율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옛날이야기에선 산골에 혼자 조그맣게 움막을 짓고 살았다더니. 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면 신빙성이 떨어져 보였다.
자기 얘기엔 상당히 많은 각색이 더해졌을지도. 도율이 그렇게 납득했다.
‘다음으로는…….’
다시 한번 망량을 찾아가,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