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동생을 부탁한다
“하핫!”
라크자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그의 손등이 날카로운 창날과 부딪치며 금속성을 울렸다.
그의 손등엔 반짝이는 비늘이 자라 있었다. 그 비늘이 백건우가 지닌 창의 날카로움을 흘려 내고 있었다.
던전에서 발견한 새로운 물질을 인간의 기술로 제련해 마력을 두른, 현재 시대에 인간이 휘두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물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창이었으나.
모두 저 비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까다롭군.’
백건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까다로운 건 방어력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체구와 그렇지 않은 파괴력을 동반하는 공격에 지금까지의 상식과 관념은 소용이 없었다.
백건우는 매 순간 새로운 규칙을 짜내고 대응하며 한 수 한 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럴수록 라크자르는 백건우가 마음에 들었다.
백건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라크자르 역시 아직 가진 힘의 전부를 꺼내 보이지 않았다. 즐길 건 즐기더라도 임무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엇차!”
라크자르가 비탈을 타고 내려오며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지금까지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위력을 가진 발차기. 백건우는 한눈에 알아채고 버티려 하지 않고 창대로 막으며 몸을 뒤로 날렸다.
충격과 함께 뒤로 멀리 뻗어 나가며 백건우가 외쳤다.
“이매!”
라크자르가 바닥에 착지해 자세를 정비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보면 그 여자도 이곳에 함께 있었다. 큰 위협은 되지 않기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지만.
‘협공은 위험하지.’
두 사람은 오래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던 모양이니까. 지금 힘이 약해져 있다 하더라도 백건우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이라면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로 인해 패배하게 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재밌는 경험이지만.
재밌는 싸움을 시시한 실수 한 번으로 단숨에 끝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자, 와라!’
라크자르가 넘실거리는 마력으로 작은 방 크기 정도로 주위를 에워쌌다. 어마어마하게 넓진 않지만, 이 영역에 들어오는 건 뭐든지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떠한 기습이나 협공에도 대응하기 위한 영역.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새로운 공격은 나타나지 않았다. 준비나 작전 설립에 시간이 걸린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터.
“…이봐?”
라크자르의 목소리만이 허공을 메아리쳤다.
* * *
“후우.”
백건우가 한숨 돌렸다는 듯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런 곳이 다 있군.”
백건우가 몸을 숨긴 곳은 거대한 나무의 아래에 있는 옹이구멍이었다. 사람 한 명의 몸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다.
썩 오래 숨어 있을 순 없겠지만, 잠시 눈을 피하는 것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너, 너…….”
같이 들어와 있던 이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튄 거야?”
백건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원하는 흐름에 억지로 붙들려 있을 이유가 없지.”
백건우도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라크자르와는 입장이 달랐다.
그 전투는 라크자르가 원해서 주도하는 싸움이었다. 백건우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에 억지로 어울려 주느라 바빴다.
그보다는 침착하게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정리하고, 라크자르가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선제공격을 통해 다시 이어 가고 싶었다.
영리한 결정이었지만, 단순무식하고 저돌적인 이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이었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해서, 인간들에겐 이런 전법도 있는 법이야.”
“이런 씨…….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이매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지만, 백건우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사실 지난 몇 년간의 싸움을 거듭하며, 이매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간 백건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터였다.
백건우는 이매만큼 회복력이 좋은 요괴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으니. 인간에겐 인간에게 맞는 싸움법이 있었다.
그런 백건우의 반응에 이매가 비아냥거렸다.
“그래, 그래.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이젠 완전히 아저씨 다 됐다 이거지?”
고작 몇 년 새에.
이매가 불만스럽게 투정을 부렸지만, 백건우도 입장이 곤란했다. 그야 인간은 이 나이 정도 되면 다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오히려 헌터 활동을 하느라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단지 인간과 요괴의 시간 개념이 다를 뿐이었다.
이매에게 몇 년은 눈 깜빡할 정도로 잠깐에 불과했고. 백건우에게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농담 삼아 할 정도의 세월이었다.
“나도 불만 있다.”
“뭐?”
“너도 멋대로 사라져 놓고 여태까지 연락 한 번 없었잖아. 듣자 하니 내 소식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건…….”
백건우도 일선에 서는 헌터로 계속해서 활약하면, 새로운 제자를 키워 낸 이매가 잘하고 있다며 한 번쯤은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런 기대를 품고 해가 바뀔 때마다, 아직은 그럴 자격을 갖추지 못한 거라 생각해 더욱 노력을 거듭했다.
그걸 섭섭하게 느낀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매를 앞에 두니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어졌다.
“그런데 말도 없이 저런 것과 싸우고 있었다니.”
라크자르의 강함을 떠올린 백건우가 가볍게 몸서리쳤다.
이름난 던전을 공략하며 인류 최강의 헌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백건우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강자였다. 지금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모자라다. 그걸 실감했지만, 모자라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혹시 내가 못 미더웠나?”
“…그건 아니야.”
이매가 거칠게 머리를 헤집고는 대답했다.
“…바빴어. 그리고 저런 거랑 싸우는 건 나도 사양이야. 멋대로 찾아온 거라고.”
“그런가.”
라크자르는 이매에게 있어서도 당장은 싸우고 싶지 않은 불청객인 것이 사실이었다.
언젠가 쓰러뜨려야 할 복수의 대상인 건 맞지만, 그걸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벌써 뒷덜미를 잡힌 건 실수였다.
“아직도 바쁜가?”
“그건 왜 물어봐?”
“왜겠어. 길드엔 항상 인재가 필요한 법이니까.”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그런 백건우의 제안에 이매는 곤란하게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뭐, 너도 눈치챘겠지만.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야. 조금 사정이 있어서,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야.”
자존심 때문에 입이 비뚤어져도 너보다 약하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너만 괜찮다면, 생각해 봐라.”
그렇게 말한 백건우가 구멍을 나서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어디긴. 이대로 천년만년 숨어 있을 수도 없고. 여기서 탈출하려면 그 녀석을 상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곳은 균열 안의 공간이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면 라크자르를 쓰러뜨려야만 했다.
“슬슬 돌아가야지.”
정신은 미혹 한 점 없이 깨끗했으니.
이제는 온전히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드디어 납셨구만.”
라크자르가 뚱한 얼굴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백건우가 모습을 나타내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핀잔을 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서. 해후를 풀 시간을 준 건 감사히 생각하지.”
“여기가 뭐 동창회냐?”
한 차례 더 투덜거린 라크자르가 폴짝 몸을 일으켰다.
“그래. 시간도 충분히 줬으니 이제는 불만 없지? 이젠 진짜로 신나게 놀아 보자고.”
라크자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백건우 역시 창을 쥐고 상대를 겨눴지만, 웃고 있진 않았다.
“난 놀 생각 없다.”
“호오.”
그런 백건우의 반응에 라크자르가 오히려 더욱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무렴 좋아. 그럼 보여 달라고.”
라크자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백건우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처럼 재빠르게 공방을 주고받는 건 특기가 아니었다. 결코 모자라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가 가진 진면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별이여.”
성창 백건우.
그의 창이 담는 건 별빛이었다. 저 멀리에서 발한 빛이 이곳까지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가늠해보면, 아주 오래전의 과거가 눈에 비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빛의 속도로 이곳에 다다르고 있었으니. 백건우의 창날 또한 광속에 타올랐다.
백건우의 창날은 보이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 참…….”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을 벌이는 백건우에 라크자르도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려 새로운 법칙으로 덮어쓰는 일.
백건우의 마력이 광활한 밤하늘처럼 이곳을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새까만 도화지 위로 하얀 별빛이 촘촘히 빛났다.
“반칙을 쓸 줄은 몰랐네.”
카각!
백건우의 창날이 라크자르의 몸을 꿰뚫었다. 그의 가슴팍을 뒤덮은 비늘을 뚫고 돌처럼 단단한 몸통을 관통했다.
라크자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 오래 놀고 싶었는데.”
그의 머리 위로 새하얀 광채가 솟아올랐다. 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던 주인이 힘을 잃고 무너지고 있었다.
“야! 백건우!”
이매가 멀리서 소리쳤다.
이곳이 완전히 작살 나기 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계속 남아 있었다간, 라크자르가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그가 있던 곳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마계행.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백건우와 이매라 해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건우가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뭐……?”
이매가 우뚝 멈춰 섰다.
“음?”
눈을 감았던 라크자르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한쪽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번에 사용한 ‘조각’ 속에 이상한 게 잠들어 있었다. 백건우의 창이 몸뚱이를 꿰뚫은 덕에 그 껍질이 깨져 안에 들어 있던 것이 쏟아졌다.
푸확!
검고 끈적한 무언가가 창을 타고 백건우의 팔을 덮쳤다.
“이건……?!”
검은 무언가가 팔뚝을 타고 백건우의 목덜미와 배 위로 퍼져 나갔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무언가. 백건우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라크자르는 알고 있었다.
“이…….”
라크자르의 눈동자가 맹금류처럼 날카롭게 번쩍였다.
“누란주(累卵主)-! 내 조각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개자식아!”
라크자르의 뺨에 비늘이 돋아나며 송곳니가 길게 자라났다.
불꽃을 뿜어 저 더러운 것을 태우려 해도, 백건우의 창에 의해 깨진 몸으론 힘을 온전히 담아 낼 수가 없었다. 그의 입가에 불꽃이 되지 못한 아지렁이만이 고였다.
“감히…….”
분노에 차 이를 깨물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건우야!”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당장 나가지 않으면 라크자르의 몸과 함께 마계에 떨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백건우는 모두 알아챘다.
이 검고 끈적한 물질은 라크자르가 일부러 몸에 심어 둔 게 아니었다. 그 정체와 범인의 이름을 아는 걸 보면, 동료인 자들 중 하나가 저지른 짓으로 보였다.
그 동료, 누란주라고 불린 자의 목적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이걸… 우리 세상에 심을 생각이다.’
백건우는 그걸 위한 숙주였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풍경이 조각나고 거리감이 사라져 가며 공간이 점으로 수축하고 있었다. 이 종착지가 어디일지 백건우도 알았다.
이매가 팔을 뻗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였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매.”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걸 보니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백건우는 말했다.
“동생을 부탁한다.”
백건우는 그곳에 끝까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