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죽을 때까지
“결국 이렇게 됐네.”
망량이 이전과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이 가는 망량에겐 여느 때와 같이 미소가 잘 어울렸다.
‘매혹이라고 했던가.’
보는 사람 누구나 호감을 품게 만드는 능력. 도율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게 한층 강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망량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머리는?”
“알아봐 주는구나?”
“모르기가 더 어렵겠다.”
검고 긴 장발을 순식간에 하얗게 바꿔 오면 맹인이 아닌 이상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요기(妖氣)를 모두 회수했지. 이제 더는 숨을 필요가 없으니까.”
하나의 국가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 모든 요괴들을 숨기던 은신처로 사용하던 장소.
그곳을 만들고 유지하던 힘을 모두 망량의 손아귀로 회수했다는 뜻이었다.
요괴들은 모두 인간계를 습격하고 있었다. 은신처의 마지막 용도였던 도율의 감금 역시 실패로 끝났으니, 더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
그러니 그게 모두 망량이 지니고 있던 본래의 힘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여기로 올 줄은 어떻게 알았어?”
“당연하잖아. 여기 백수아가 있으니까.”
백수아는 현무의 몸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 원래라면 현무의 짙은 기에 눌려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도율의 기감은 그조차 뚫어 버리고 파악할 수 있었다.
‘자세한 위치까진 못 찾았지만.’
거기까진 쉽지 않았다.
“백수아?”
도율의 말을 들은 망량은 턱을 쓰다듬더니 뒤늦게 떠올렸다.
“아아. 그 인간 아이 이름이 그런 거였지.”
그런 것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말투였다.
도율 또한 그 부분에 대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이미 대화로 풀어 나가기엔 선을 넘은 지 오래였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망량이 발끝으로 땅을 두드렸다.
“이 아이는 튼튼하니까.”
그들이 밟고 있는 현무의 등껍질 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주위가 망가질 걸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싸워도 좋다는 선언이었다.
“듣던 중 다행이구만.”
도율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단전에 자리 잡은 기운을 퍼 올려 신체의 혈을 순서대로 지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 그 물결이 더욱 빠르고 거세게 굽이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널 상대로 손대중을 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야.”
망량 또한 아지렁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을 감추지 않았다.
‘요기라고 했던가.’
도율이 가진 힘, 내공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는 방법 자체가 다른 듯 보였다.
내공은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요기는 요괴의 강대함을 퍼뜨리기 위해 존재하기에.
쾅!
도율의 발돋움에서 폭발적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저를 아십니까?”
백우진의 물음에 이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다마다.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였거든.”
“친구…….”
이런 친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좋으나 싫으나, 아버지는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아버지 백건우에 대한 이야기는 곧잘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였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헌터였다.
-이야, 네가 우진이구나?
-벌써부터 아버지를 닮았네.
-창을 배우고 있다고? 야, 크면 우리 길드 와라.
-웃기고 있네. 제 아버지가 만든 길드가 있는데 너네 길드를 왜 가냐?
-그것도 그렇구만.
어린 시절의 백우진은 그런 자들로부터 아버지가 어떤 헌터였는지 전해 듣는 걸 좋아했다.
자신 또한 그런 헌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 대한 점이라면. 특히 헌터로서의 활약이나 기량, 특징에 대한 것이라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여자가 아버지의 동료였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이매라고 소개한 이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명한 주홍색 머리카락에 짐승처럼 길게 자라 있는 송곳니.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는 육신 그 자체를 무기로 삼는 자들 특유의 기백이 서려 있었다.
이런 여자가 함께 있었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세대라고 보기엔 겉모습이 너무나도 젊었는데.
‘평범한 인간은 아니란 건가.’
흰돌이가 잔뜩 쫄아서 움츠러든 채 나무 뒤에 숨어 이곳을 훔쳐 보고 있는 걸 보니, 이 이매라는 여자가 얼마나 두려운지 알 것 같았다.
“어쭈. 이놈 보게. 야, 너 지금 의심하지?”
이매가 백우진의 뺨을 쿡쿡 찔렀다.
“…그런 거 아닙니다.”
백우진이 뺨을 찌르는 손가락을 잡고 슬며시 내려놓으며 조심히 말했다.
“그리고 저 서른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
벌써라니.
이매는 마치 이전에도 본 적이 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한텐 미안한 짓을 다 해 버렸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 말이야, 각성 못 했잖아.”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게 당신과 무슨 연관이?”
각성에 대한 것은 아직 인류가 밝혀 내지 못한 비밀이었다.
시도나 실험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아직 안전하게 각성자로 거듭나는 방법은 없었다. 임상 실험 단계까지도 가지 못한 위험한 수단들뿐이었다.
“체질이 바뀌어 버렸어.”
이매가 백우진의 아랫배를 쿡 찔렀다.
“갓난쟁이일 때 한 번 보러 간다는 게, 그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미안해.”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백우진은 지난 일에 미련이 없었다. 이제 와서 알아낸다 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자신이 겪었던 불행들이 모두 각성자가 되지 못함으로 비롯된 건 아니었다. 만약 각성자가 되어 헌터로 활동하고 있었다 해도, 그 말로가 썩 후련하진 않았을 거다.
‘분명…….’
숙부 백건영의 악행을 모른 척하지 못하고 모함을 당해 죽었거나. 거기에 어울려 동참하다가 도율의 손에 복수를 당했겠지.
“괜찮습니다, 그런 건.”
지금은 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보다 한 여자애를 보지 못했습니까? 조그마한,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인데…….”
백우진은 백수아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망량이라는 자가 백수아를 데려간 후, 그가 백수아의 진짜 가족이라는 도율의 설명에 한 차례 물러서기는 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백수아가 아무리 출신을 알 수 없는 아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인간이 아닌 존재의 가족이라는 것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찾아서 뭘 어쩔 생각인데?”
이매가 팔짱을 끼고 그렇게 물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줌마 같은 분위기로 묻는 게 아니었다.
이매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져 있었다. 좁은 틈새로 보이는 동공은 짐승의 것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지금의 대답으로부터 그녀를 적으로 돌릴지 아군으로 삼을지가 결정된다. 백우진은 직감할 수 있었다.
“…….”
그렇다고 해서 없는 말을 지어낼 정도로 말재간이 좋지는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을 말해서 적이 되면 맞서 싸우고, 아니라면 감사히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물어볼 겁니다.”
“뭘?”
“돌아오지 않겠냐고.”
망량이라는 남자에게서 느껴진 꺼림칙한 느낌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생소한 몬스터, 요괴라는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침공을 시작했는데. 그런 곳의 중심에 떨어뜨려 놓는 것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망량이라는 작자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싫다 하면?”
이매의 그 질문 역시 예상했던 것이었다.
“보내 줘야겠죠.”
“여기까지 와 놓고 말이냐?”
“예.”
이매가 보기에 백우진은 쉬운 방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이 현무라는 놈은 겉보기엔 별로 난폭하지 않아 보이지만, 움직이기만 해도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민폐 덩어리다.
각성자라면 느릿한 움직임을 파악해 위에 올라탈 수 있어도, 일반인에겐 재앙이 펼쳐지는 지옥이었다.
‘저 녀석이 도와준 건가?’
나무 뒤에 숨어 있는 하얀 호랑이에게 시선을 보내니, 녀석이 히익 하고 기둥 뒤로 눈을 가렸다. 그래 봐야 덩치가 너무 커서 몸이 온전히 가려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어디서 손에 맞지도 않는, 남이 쓰던 것 같은 무거운 창도 한 자루 들고 와서는.
그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와서, 거절을 당하면 얌전히 혼자 돌아간다니.
“큭… 하핫.”
이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저어 웃음을 털어 내고 이매가 백우진을 향해 말했다.
“역시 넌 그 녀석 아들이 맞구나.”
“…….”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백우진은 아버지를 닮았단 말보다, 아버지와 다르단 말을 더 많이 들어왔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건 모두 백우진이 헌터가 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런 말을. 그것도 아버지의 옛 동료였다는 여자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네가 그런 녀석이라 안심했다.”
이매는 백우진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말했다.
“가자, 내가 널 도와주지.”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온 것이기도 했으니.
* * *
도율과 망량의 공방은 한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다.
망량의 요기는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냥을 위한 힘이었다.
약자를 사냥하기 위한 힘.
그러나 도율이 쌓아 온 내공과 무공은 그와 다른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본래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보다 강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한. 그렇게 해서 자신보다 강한 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힘이었다. 강자를 꺾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었다.
도율은 사냥당할 만한 약자가 아니었고, 망량은 꺾을 가치가 있는 강자였다.
덕분에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푸악!
도율의 손이 그려 낸 검격이 망량의 몸을 감추는 요술과 피부를 지키는 두꺼운 요기를 모두 파헤치고 상처를 입혔다.
요괴 또한 상처를 입으면 그 틈으로부터 붉은 피를 쏟아 냈다.
“아…….”
망량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손속은 두지 않았다. 망량을 상대로 그렇게 했다간 위험한 건 오히려 자신이란 걸 알았기에.
도율은 더는 상처를 늘리고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최선을 다했다.
치명상에 확실하게 들어간 일격. 최후의 말을 남길 시간조차 그리 길지는 않을 터였다.
덕분에 망량은 몸을 쓰러뜨린 채 그대로 숨을 멈췄다.
“대단한걸.”
“……?!”
끝났다고 생각한 도율의 귀에 들려온 건 망량의 목소리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망량은 어느새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멀끔한 모습으로 일어나 있었다.
빈말로 하는 칭찬이 아닌 듯 진심으로 감탄하는 얼굴을 한 채.
‘…환상? 아니, 분명히 손맛은 있었다.’
도율에게 그런 게 통하진 않았다. 적어도 당하고도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도율은 분명히 망량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맞아. 난 분명히 네 공격에 당해서 죽고 말았지. 역시 실력은 나무랄 데 없는걸.”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그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난 백귀의 왕. 내 목숨은, 곧 모든 요괴의 목숨이니까.”
간단히 말해.
망량의 목숨은 요괴의 수만큼 있다는 뜻이었다.
인간계를 침공한 요괴의 수를 헤아려 보면, 그 수는 단순히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니었다. 본체의 강함을 유지하면서도, 수천수만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자.
그것이 망량이었다.
“자, 어쩔 셈이지? 죽지 않는 자를 상대로.”
“…….”
도율이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한숨이 나오는 얘기였다.
“그래도.”
“응?”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죽을 때까지 죽이다 보면, 죽겠지.”
적어도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