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다른 누군가
“기억난다. 넌… 본 적 있는 인간이군.”
소년과 청년. 그 사이의 모습을 한 아즈모디아가 싸늘한 눈빛으로 주대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한 주대현은 그런 아즈모디아의 눈빛을 힘겹게 받아 내고 있었다. 오기로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
뇌리에 새겨진 공포. 거기에 저항하고 있었다.
아즈모디아의 눈동자 위로 하얀 곡옥 모양의 반점이 떠올랐다. 백색 반점이 양쪽 눈동자에 대칭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눈동자로 주대현을 살펴본 아즈모디아가 폭로했다.
“제약을 깨뜨렸군.”
“…….”
제약. 단순한 말이었지만 주대현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침묵은 곧 동의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냐.”
아즈모디아의 말에 주대현이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냐고 물었나.”
주대현이 지난 날을 떠올렸다.
제약을 깨뜨리는 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려 하고 몸을 숨긴 채로 지냈다.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역시 모두 대리인을 통해 진행되었다.
좁은 방 안에 몸을 숨기고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오지 않을 것만 같은 희망을 긴 세월 기다렸다.
남들의 배 이상 되는 수명을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살아 있다고 할 순 없었다.
“틀렸다. 지금까지의 난 죽은 거나 다름 없었다.”
주대현이 긴 곰방대의 끝을 입에 물었다.
“살아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기 온 거다.”
그런 주대현의 말에 아즈모디아가 말끝을 흐렸다.
“인간의 말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군.”
한순간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면서 어째서 죽음을 재촉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쇠락을 경험하지 않는 마족에게는 생존이 곧 목표였다. 그러나 짧은 생을 영위하는 인간에게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염원이 존재했다.
‘내게 있어 그건.’
주대현이 똑바로 아즈모디아를 노려보았다.
‘네놈을 쓰러뜨리는 거다.’
더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구면이었나?”
도율이 주대현을 향해 물었다.
사도와 이전에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니. 심지어 장서주 쪽에서 주대현을 기억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 알았던 건가?’
그렇다기엔 아까 말했던 정보 제공자라는 말이 걸렸다.
“나중에 얘기해 주지.”
주대현이 도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아즈모디아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우선시해야 할 건 대화가 아니었다. 그에 동의하듯 도율 역시 아즈모디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좋다.”
아즈모디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이해와 타협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마족답게 상대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울 뿐.
“그렇다면, 소원을 이행해 주도록 하지.”
아즈모디아가 팔을 뻗었다.
“바이던트.”
아즈모디아의 발밑이 조각나며 용암이 솟구쳤다.
하늘까지 뻗어 오르는 검붉은 용암 기둥 속으로 아즈모디아가 손을 집어넣었다. 거기서 무언가를 붙잡고 잡아당기자, 모습을 드러낸 건 한 자루의 창이었다.
양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모습의 창, 바이던트.
쿵!
아즈모디아가 바이던트의 막대 끝으로 땅을 찍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짙은 회색의 동상이 솟아올랐다.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의 동상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틈이 새겨져 있었다.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의 위로 영원과 죽음을 의미하는 마계의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 주위로 해골과 고통 받는 인간들의 형상이 빼곡히 장식되어 있었다.
“열려라, 지옥문.”
아즈모디아의 명령에 따라 거대한 문이 구구구궁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옥의 문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이었으나, 이윽고 새빨간 용암이 터져 나왔다.
“……!”
바다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은 듯, 용암이 해일처럼 거대한 파도를 이뤄 지면을 덮쳤다.
주대현이 곰방대를 휘둘렀다.
“아라홍련.”
그러자 분홍색 꽃잎들이 주대현과 도율의 주위를 감쌌다.
지옥의 업화가 주위의 대지를 가득 메웠지만 주대현과 도율이 든 꽃잎의 구슬은 그 위를 멀쩡히 떠다녔다.
시간이 지나 파도가 잠잠해지고 난 후, 꽃잎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완전히 벌어진 꽃잎은 여전히 발판으로 쓸 수 있었다.
도율이 발밑을 바라보았다.
‘보통 용암은 아니긴 하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용암이 아니라, 지옥의 열기를 간직한 용암.
그러나 주대현이 만든 연꽃이 그 위에서 녹아내리지 않고 부유하고 있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즈모디아 역시 이들이 단지 용암 속에 잠기길 바라서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이는 모두 전초에 불과했다.
“일어서라. 지옥의 전사들이여.”
그러자 용암 속에서 뼈만 남은 인간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텅 빈 목구멍으로부터 나올 리가 없는 신음을 흘리면서, 인간 형상의 뼈가 덜그럭거리며 모습을 갖췄다. 하나같이 이가 나간 투구나 검을 쥐고 있었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듯한 모습이 아닌 것 같았으나, 문제는 그 수에 있었다.
‘발밑엔 용암. 사방엔 떠다니는 해골들이로군.’
이들이 손을 뻗어 용암 속으로 끌어당기려고만 해도 상당히 귀찮은 방해물이었다.
해골들을 소환한 장본인인 아즈모디아는 이 정도는 당연한 환영 인사에 불과하다는 듯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본신을 상대하는 일은 따로라는 뜻.
수를 가늠하던 도율에게 주대현이 속삭였다.
“길은 뚫어 주마.”
“넌?”
주대현이 유감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가까이 갈 수 없다.”
주대현이라도 근접전으론 아즈모디아를 당해 낼 수 없다는 뜻일까. 그러나 대답의 내용은 예상과 달랐다.
“나는 제약을 깼다. 그러니 장서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면?”
“남은 절반의 영혼을 빼앗긴다.”
주대현의 대답에 도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대현 역시 도율의 걱정거리가 뭔지 짐작하고 있었다. 안심하라는 듯 주대현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건 내가 예전에 개인적으로 했던 계약이었던 거니까. 네겐 해당되지 않는다.”
주대현의 말대로 도율은 영혼을 내건 약속 따윈 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주대현은 자신의 반쪽 영혼을 걸고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그걸 어겼기 때문에, 장서주의 앞에 설 수 없는 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싸우기 위해 도율과 함께 온 것이었다.
“그럼, 보조는 똑바로 해라.”
“그러지.”
도율이 주대현 대신 아즈모디아에게 달려들었다.
* * *
‘조금만 기다려다오.’
지옥의 문 가장 깊은 곳. 아즈모디아가 가장 안쪽에 숨겨 놓은 존재가 해골을 달그락거렸다.
새하얀 백골이었지만, 아즈모디아는 그 유해의 주인이 살아 있을 적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신전에 걸려 있던 그림의 주인, 에텔의 유해였다.
에텔. 아즈모디아와 비슷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족이었다. 오히려 아즈모디아보다 조금 더 오래된 존재였다.
지금은 이렇게 죽어 사라졌지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영혼과 죽음을 관장하는 아즈모디아에게 죽은 이를 살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단숨에 가능한 일 또한 아니었다.
‘마력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에텔을 다시 엮어 내기 위한 마력. 그에게 필요한 건 생전 에텔이 지니고 있던 전성기의 마력을 훨씬 상회하는 양의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양은 오랜 세월 힘을 축적해 온 아즈모디아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양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다 해도.
‘모자라면……. 늘리면 된다.’
그때부터 아즈모디아의 계획은 시작되었다.
마수와 마족들이 보다 많은 마력을 가질 수 있도록 경쟁하게 만들고. 드높은 마력을 가진 자들에게 사도라는 이름과 자격을 부여해 기준을 만들었다.
다른 세상에 마력의 흔적이라는 씨앗을 흩뿌려 각성하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쌓인 경험과 죽음. 증오와 싸움이 모두 마력으로 거듭나길 기다려 왔다.
최종적으로 세상에 충분할 정도의 마력이 넘쳐흐르게 된다면, 계획의 마지막 단계는 그걸 모두 회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사도들 역시 지나치게 강해져, 아즈모디아 홀로 다른 사도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게 되었단 점이었다.
‘힘을 합치면 곤란하다.’
그렇게 했다간 아즈모디아를 상회하는 전투력을 발휘할지도 모르고. 혹여나 싸움 도중 아즈모디아가 죽음에 이르기라도 한다면 모처럼 모은 마력을 부활에 사용해야 했으니.
가능한 손해 없이 사도들의 마력을 거둬들일 수만 있다면 최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네 사도들의 마력에, 마계에 온 인간들의 마력까지. 모두 합한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다.’
기회가 찾아왔다.
만약 모자라더라도 부족한 부분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좀 더 충당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그때가 되면 인간들은 아즈모디아에게 저항할 수단은 모두 잃은 상태일 테니까.
‘이자들만 쓰러뜨리면.’
계획의 완수가 코앞이었다.
* * *
“용맥.”
주대현의 마력이 아즈모디아로 향하는 길을 한 차례 뚫어 냈다.
짙은 지옥의 마력이 열기를 뿜어 대고 있으면, 튼튼한 도율이라 해도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순 없었다. 재빨리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용맥은 그걸 위한 청소였다. 굵직한 마력이 아즈모디아의 마력을 밀어내며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냈다.
“가라!”
도율이 몸을 날려 용암 위로 발을 뻗자 그 위로 분홍색 연꽃잎이 떠올랐다.
도율이 연속해서 꽃잎을 밟으며 아즈모디아에게 도달했다.
아즈모디아는 도율이 눈앞까지 도달하는 것을 하품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위협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이 인간인가.’
다른 네 명의 사도를 모두 쓰러뜨린 인간들의 핵심 전력.
그 정도까지 바란 건 아니었음에도, 예상 이상의 선전을 해준 인간들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다못해 상으로 편안한 죽음이라도 선사하는 것이 도리였다.
“명부.”
그러자 아즈모디아의 눈앞에 거대한 책 하나가 떠올랐다. 책은 손을 대지 않아도 홀로 페이지를 넘겼다.
지옥의 명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사를 결정짓는 저주였다.
제아무리 강한 인간이라 한들, 결국은 하나의 생명체. 명부의 앞에선 일평생 쌓아 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파라라락.
그러나 페이지는 계속해서 넘어가기만 할 뿐, 도율의 심장을 멈추지 못했다.
‘명부에… 없다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도 대상을 찾지 못해 명부가 탁 하고 닫히는 것과 동시에.
콰앙!
도율의 주먹이 아즈모디아에게 작렬했다.
“그으…….”
용암 위를 튕기며 날아간 아즈모디아가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공격을 허용한 것 따위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아즈모디아는 상처를 추스르지도 않고 물었다.
“네놈……. 대체 뭐냐!”
그가 무언가를 시도하다가 실패해 당황한 탓에 두들겨 맞았단 건 도율도 눈치채고 있었다.
아즈모디아가 당황한 건 도율이 명부에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명부에 없는 인간을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명부에 없는 인간은 영혼이 온전하지 않은 인간. 주대현이 그랬다. 그렇다는 건 도율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
“네 영혼은 어디에 있지?”
아즈모디아가 도율에게 묻고 있었다.
“그게 뭔 개소리야.”
도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그걸 돌려받으러 온 건데.”
도율을 움직이는 건 언젠가 들이닥칠 인류의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사명감 따위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 사도란 존재들에게 빼앗긴 영혼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도들 중에서 영혼과 죽음을 관장하는 것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사도, 장서주 아즈모디아였다.
그러나 도율의 대답에 아즈모디아 역시 동요하고 말았다.
‘농담하지 마라……!’
자신이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도, 해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장 주대현만 해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아왔을지언정, 상대를 잊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 아즈모디아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
‘이 영혼에 손을 댄 건 내가 아니다.’
그렇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있다.’
불안감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