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1
91화 그럼, 나머지는
“…….”
주예린이 검은 라이센스를 빛에 비춰 보았다. 라이센스의 표면에 붙은 위조 방지 필름이 무지개색으로 반짝거렸다.
블랙 라이센스.
센터장 영감이 내게 준 라이센스 카드였다. 정식으로 영감의 산하 조직 ‘현학’의 멤버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자격증으로 발급한 카드였다.
블랙 라이센스에는 그 어떠한 신상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라이센스는 소지하는 것 자체가 곧 자격의 증명이었다. 그 신원을 보증하는 자가 이 나라 최고의 각성자 중 한 명이니까.
물론 그만큼 희귀하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도 했다. 각성자 사이에선 확실한 효력을 발휘하지만, 일반인에겐 뜬소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주예린이 의심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위조는 아니죠?”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헌터 업계를 물로 보는 발언이었다.
“이게 만약 위조라면, 지금 이곳에 곧바로 가디언들이 들이닥쳤을 겁니다. 라이센스 조작은 각성자 특별법 위반이니까.”
“흐음…….”
주예린은 마지못해 믿어 준다는 듯이 라이센스를 도로 내밀었다.
“좋아요. 일단은 믿어 보죠.”
주하린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주예린의 태도는 아까보다 훨씬 호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처음 보는 듯 인사했다.
“반가워요. 주예린이라고 해요.”
“저는… 여우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러자 주예린이 고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 이쪽은 얼굴을 드러내고 이름을 밝혔는데. 그쪽도 그렇게 하는 게 예의 아니에요?”
“안전 문제로 정체는 밝힐 수 없습니다.”
“그래요? 재미없게. 생각보다 겁이 많으신 분이었네.”
싸구려 도발이었다.
물론 거기에 넘어가 가면을 벗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네?”
“내가 아니라 당신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거라고, 내 얼굴을 알게 되면.”
내가 가면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됐어요.”
주예린이 떨떠름하게 거절했다. 오한이 들었는지 팔뚝을 쓸었다.
겁을 주려고 없는 얘길 지어낸 건 아니었다. 영감에게 들었던 주의 사항 중 하나였다.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던 가디언 중 한 명이 친한 친구에게 비밀을 밝혔다가, 그 친구가 빌런들에게 잡혀가 고문 끝에 사망했다는 사례가 있었다.
도은이나 아버지에겐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반면 클레어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으니 마음 편히 얘기해도 괜찮았다. 물론 그 이전에 이 가면을 골라 준 게 클레어였지만.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인데 되게 딱딱하게 구네.”
주예린이 투덜거렸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주하린을 향해 물었다.
“내게 맡길 의외라는 게 설마…….”
이미 어느 정도 확신이 선 상태에서 하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주예린이 주하린에게 핀잔을 줬다.
“너 아직도 설명 안 했니? 도대체가 그렇게 굼떠서야…….”
“그게…….”
“됐어. 말대답하지 마.”
주예린이 주하린의 말을 자르고 내게 웃음 지었다.
“그쪽이 할 일은 절 호위하는 거예요.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 말대로, 어려워 보이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하긴 어려웠다.
“왜 갑자기 호위를 의뢰한 겁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좀 유명하잖아요.”
그런가……?
평소에 텔레비전도 잘 안 보고, 인터넷 방송이나 브이튜브나 하는 것들도 보질 않다 보니 내가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이 거리낌 없이 말할 정도면 틀린 말은 아닐 거다. 무엇보다 클레어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출연자이기도 했고.
“평소에도 귀찮게 구는 악성 팬들이라면 꽤 많았지만, 그래도 DM을 보내거나 악플을 다는 선이라 고소장만 보내면 얌전해지곤 했는데…….”
주예린이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요즘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느껴져서요. 누군가 따라붙는 기분도 들고.”
“…그렇습니까?”
“네. 그래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분 탓이라 이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는 걸 넘어 놀라운 지경에 접어들었다.
단순히 기분 탓으로 호위를 구하는 것까지는 개인이 판단할 영역이라 보지만, 초대형 길드의 실세로 활동하는 동생에게 신세를 지는 건 지나치지 않나?
애초에 주하린이 이런 하잘것없는 이유를 바탕으로 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이해가…….
“겨우 그런…….”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주하린이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으로 소리 없이 애원했다. 제발 아무 말 없이 넘어가 달라 부탁하는 눈빛이었다.
클레어에게 들었다. 주하린이 그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클레어를 도왔었다는 얘기를.
-도율 씨가 아직 실종 신고 된 상태였을 때, 동결된 행정 처리를 모두 활성화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었는데……. 사실 그걸 해 준 게 주하린이라고 했어요.
결국 내가 돌아왔기 때문에 행정이니 뭐니 하는 건 시간 문제에 불과했지만, 당시의 클레어는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도은이를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면, 내게도 갚아야 할 은혜란 게 있는 셈이었다.
원한은 잊지 못하고 복수했다.
하지만 스승님 말을 반이라도 들으려면, 은혜 역시 저버리지 않고 보답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수락하자 주하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한숨을 자주 쉬는군.
의뢰가 성사되자 주예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자세한 계약 내용은 이쪽이랑 나누시고. 저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이만.”
주예린이 선글라스를 끼고 떠났다. 자리에 남은 건 나와 주하린 둘뿐이었다.
불편한 사람이 사라졌지만 분위기는 풀어지지 않았다. 의외의 모습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주하린도 낯빛이 어두웠다.
그런 주하린이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어려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이야, 덕분에 살았네. 그나저나 블랙 라이센스라니. 깜짝 놀랐어. 언제 그렇게 잘나가게 된 거야?”
주하린이 팔꿈치로 몸통을 쿡쿡 찔렀다. 평소 힘 조절을 모르던 그녀에게서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이죠.”
“에헤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했다고.”
주하린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겸양을 떨었다.
그러다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빙빙 돌았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시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주하린이 입을 뗐다.
“그만두고 싶으면 지금 말해도 돼.”
“…….”
“봤으니까 알겠지만, 지내기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주하린의 말에 내가 물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구할 계획입니까?”
“…….”
내 물음에 주하린이 침묵했다.
애초에 나만 해도 주하린과 크게 연이 닿아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클레어의 소개로 나오긴 했지만, 그 전까진 개인적으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주하린이 개인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의 끝자락. 말하자면 최후의 수단이라 봐도 좋았다.
그런 나를 그냥 돌려보내면, 다음에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아마 없을 거다.
“…바쁘지 않아?”
주하린이 블랙 라이센스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난 영감의 ‘현학’ 소속이지만, 지금은 달리 맡은 일이 없었다. 저번의 아크투러스 토너먼트 이후로는 한가했다.
“애초에 바빴으면 이런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죠. 그나저나…….”
주예린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아무리 자매라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주하린이 주예린과 자매였다는 점도 의외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의외였던 건 주예린의 태도였다.
잘 알지는 못했지만 처음 보는 사이는 아니였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의 주예린은 이 정도로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족인 주하린을 대하는 태도가 형편없었다.
“…….”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주하린이 쓰게 웃었다.
“…언니가 나쁜 게 아니야.”
나도 주하린이 이렇게 대답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자매인 데다가 주예린 쪽이 언니라 해도, 이런 일방적이 폭언이 지속되는 관계였다.
쥐도 꼬리를 밟히면 문다는데, 주하린은 단순한 쥐가 아니었다. 대형 길드 ‘대현’의 실질적 지도자인 동시에 온갖 사업을 주름 잡는 대현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이었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인터넷에서 조금 유명할 뿐인 언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 버리는 것 정도는 아주 간단할 터였다.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전적으로 주하린에게 그런 짓을 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주하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추억에 잠긴 무거운 눈길이었다.
“옛날의 언니는 착하고 친절한,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었어.”
“…….”
“그런 언니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간 건, 나니까.”
주하린이 미소지었다.
쓸쓸한 미소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방송국 스튜디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스튜디오 촬영을 마친 후에, 출연진들 사이에 짧은 사담이 오가는 시간.
클레어는 주예린과 나란히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쪽 거리에 가면 나오는 작은 빵집이…….”
“…그래요?”
빵 얘기로 클레어를 길들이고 있나.
분명 예전이었다면, 클레어는 그런 이야기에 조금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입맛이라는 걸 깨우치기 시작한 클레어는 맛집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 가고 있었다.
-진짜 데리고 다닐 맛 난다니까. 후. 오빠가 이 맛을 알까?
도은이의 감상이었다.
당연히도, 주예린은 스튜디오에서 이전과 같이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인 임지훈 역시 살갑진 않아도 젠틀한 태도를 유지했다.
주예린이 클레어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 이유도 명확했다. 혹시 개인 방송에라도 한번 데리고 나가면 엄청난 화제가 될 테니까.
“클레어 씨, 슬슬 돌아가죠.”
“아, 네.”
내 말에 클레어가 다가왔다. 멀어지는 클레어를 보며 주예린이 아쉬운 듯이 눈을 떼지 못했다. 일찍 데려가는 내가 야속한 듯 조금은 모난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듯하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뵙자는 말을 곁들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나가는 말처럼 내가 클레어에게 물었다.
“주예린 씨하고 친해 보이던데요.”
“…그런가요?”
“네.”
그러자 클레어가 쑥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항상 먼저 말을 걸어 주시니까요.”
“그렇군요. 어때요?”
“…네?”
질문이 조금 빈약했나.
나는 좀 더 자세히 풀어 물었다.
“주예린 씨 말이에요. 어떤 사람 같아요?”
“…….”
그런 내 물음에 클레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 들은 건 아니었다. 나를 빤히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건데요?”
“네?”
클레어가 역으로 물었다.
“…왜 물어보냐니.”
대답하기 조금 곤란했다. 클레어의 소개로 주하린의 의뢰를 받은 거긴 하지만, 이건 가족의 이야기였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말하는 건 꺼려졌다.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것 같으니까 걱정돼서……?”
“거짓말.”
클레어가 확신을 가지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집념이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거 물어본 적 없었으면서. 그건 핑계고, 사실 그냥 주예린 씨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설마 관심 있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클레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직후에 나를 붙잡고 물었다.
“뭐, 뭐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머리 틀어 올려서 목덜미가 보이는 거? 옷 잘 입고 다니는 거? 뿌리고 다니는 향수? 아, 아니면… 가슴이 커서?”
“…….”
“맞죠? 맞았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봐도 엄청 눈에 띄던데, 남자들이 보면…….”
그 부분이 인상적인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나도 숨기고 다녀서 그렇지, 벗으면…….”
“나, 나 지금 운전 중이잖아요!”
내가 소리치자 클레어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똑바로 떴다.
클레어는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길게 늘어뜨려 내가 앉아 있는 운전석까지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넘어오고 있었던 건지…….
“…그렇네요.”
클레어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럼, 나머지는…….”
클레어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양손으로 핸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