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5
95화 나도 이게 일이라서
“아! 주예린 씨구나!”
도은이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도은이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서로 아는 사람은 클레어와 주예린 두 사람이었다. 같은 방송에 출연하는 사이인 데다가, 스튜디오 녹화를 할 땐 대화를 나누기도 하니까.
휴일에 마주쳤을 때 굳이 불러 세워서 말을 걸 정도의 사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도은이의 입장에서 가장 말이 상황 파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클레어가 불러 세운 건 주예린이 아니라…….
“잠깐 얘기 좀 하죠?”
클레어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었다. 칼침이라도 맞은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일행분께선…….”
“괜찮지?”
“난 좋아.”
도은이가 흔쾌히 수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아마 클레어 말이라면 양잿물이라도 마실 거다. 거절이라는 걸 좀 알아라.
“주예린 씨도 괜찮죠? 모처럼인데.”
클레어가 웃는 얼굴로 압박을 가했다.
물론 주예린이라면 거절할 리가 없었다. 스튜디오에서도, 인맥을 늘리고 싶은 건지 클레어에게 늘 먼저 말을 걸곤 했으니까.
휴일에 우연히 만나 같이 대화라도 나눌 기회가 있다면 좋아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예린은 스스로 대답하지 않고 내게 결정을 떠넘겼다.
“어, 어떡해요?”
“…네?”
“목숨이 위험하다면서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주예린이 불안에 떨었다.
“당신이 도망치자고 했잖아요……!”
주예린이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장 뭐라도 해 달라는 듯이.
그 광경을 본 클레어의 시선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흐응.”
일부러 내는 듯한 콧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보기보다… 잘 따르네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가까이 있는 각성자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다.
…지금 당장 주예린을 핑계로 자리를 피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다가올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나는 주예린을 설득했다. 내 판단을 기다리는 주예린의 귓가에 대고 조언했다.
“클레어 씨는 S급 헌터입니다. 정의로운 성격이니 여차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겠죠. 여기선 함께 행동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건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주예린이 클레어를 향해 대답했다.
“좋아요. 이런 데서 마주친 것도 우연인데, 커피라도 한잔 어때요?”
“그러죠.”
그렇게 합류가 결정되었다.
주예린과 클레어가 앞장서 나란히 걷는 동안 나와 도은이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앞의 두 사람과 달리 우리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원래라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지만, 가면을 쓴 상태에선 초면이었다.
도은이라면 분명 모르는 상대라 하더라도 재잘거리며 말을 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부분에선 얌전히 입을 다무는 편이었다.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도은이가 물었다.
“사모님과는 어떤 사이세요?”
“…사모님?”
“주예린 씨 말이에요.”
주예린 말이었나.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의뢰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뭐 하니까.
“단순한 경호원입니다.”
“그래요?”
도은이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덧붙였다.
“꽤 친해 보이던데.”
“…오해입니다.”
진짜 오해다. 방금 있었던 일은 비상사태에 의한 긴급회의에 불과했다.
나도 주예린이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다.
목숨이 위험하다, 비상사태다 귀에 대고 꽹과리를 쳐도 들은 체도 안 할 것 같은 안하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기 목숨 소중한 건 안다는 걸까.
아무렴, 호위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철딱서니 없이 구는 것보단 나았다. 적어도 협조를 구하기는 쉬울 테니까.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다하니, 뭐가 말입니까?”
“그야 당연히…….”
도은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 정도 되는 헌터가 왜 일개 일반인의 경호원 따위를 하고 있나 해서요.”
그 말에 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치 나를… 정확히는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의 나를 알고 있기라도 한 눈치였다.
“절 압니까?”
그러자 도은이가 별 순진한 척을 다 본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만큼 화려하게 날뛰어 놓고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죠.”
짚이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도은이가 친절하게 짚어줬다.
“당신 아녜요? 아크투러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던 정체불명의 신입. 소문에 따르면, 불야성주不夜城主 ‘그림자 마녀’를 쓰러뜨린 것도 당신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잘…….”
“뭘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건가요? 각성자 지원 센터 센터장 최강현의 오른팔, 여우 가면 씨.”
도은이가 입꼬리를 날카롭게 늘어뜨리며 웃었다.
목덜미가 쭈뼛해졌다. 이렇게 정확한 정보만 쏙쏙 내뱉으면 시치미 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귀가 밝아야 하거든요. 길드도 없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도은이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클레어와 도은이는 달리 길드에 가입하지 않고 지금까지 활동해 온 헌터와 매니저였다.
지금은 청진명의 팀에 속한 덕에 반 정도는 ‘로얄 로드’ 길드 소속의 덕을 보고 있다고 듣긴 했지만. 여태 굴러온 짬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잘 알고 있다면 설마.
“혹시 내 정체도…….”
내가 그리 묻자 도은이는 양쪽 검지 손가락으로 가위표를 그리며 입을 막았다.
“아하하! 무슨 소리예요. 아무리 나라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안다고요. 그 부분은 전혀 알아볼 생각 없으니 안심하시길.”
그 대답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 거기서 뭐 해요?”
거리가 벌어진 클레어가 우리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도은이가 팔을 흔들며 대답했다.
“갑니다, 가요!”
다시금 앞의 두 사람과 거리를 좁혔다.
* * *
“어, 언니! 나 왔어!”
주하린이 숨을 고르며 등장을 알렸다.
일을 마치고 바로 온 건지 길드 제복 차림이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코트와 대현의 로고가 새겨진 장식. 안에 입은 건 평범한 정장처럼 보여도 고가의 재질과 가공을 거친 장비였다.
길드마다 다르지만, 대현은 이렇게 복장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룹을 모체로 한 길드라서 그런지, 다른 길드보다 기업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주예린이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옆엔 클레어와 그 매니저인 도은이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들 앞에서까지 동생을 면박 주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겠지.
“왔니?”
“응.”
주하린이 우릴 향해 가볍게 인사하며 의자를 끌어와 주예린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대화 내용은 네 사람의 여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혼자 낀 남자인 나는 사실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예린이 아까도 언급했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안 있으면 크리스마스잖아요. 방송에 나갈 만한 이벤트로 만들 계획을 세웠더니 참 피곤한 거 있죠. 클레어 씨도 그런가요?”
“…글쎄요.”
클레어가 힐끔 내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비밀이다, 이거에요?”
“…….”
“참, 알았어요.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주예린이 도은이를 향해 물었다.
“도은 씨는 어때요? 크리스마스에 일정 있어요?”
“…….”
신경이 곤두섰다.
물론 얘가 누굴 만나고 다니든 전혀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아뇨, 없어요.”
“네? 왜요? 지금 만나는 분 없어요?”
“그렇게 됐네요.”
“말도 안 돼. 이렇게 귀여운데? 주변 남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텐데.”
“아이, 참. 그 정도는 아니고요.”
도은이가 뒤통수에 손을 대고 쑥쓰럽게 웃었다.
멍청하게. 누가 봐도 립 서비스로 해 주는 말에 헤벌쭉하기는.
“뭐……. 지금은 저보다 사정이 딱한 사람을 돕는 중이라서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런 게 있어요. 자세한 건 비밀.”
주예린과 도은이가 히히덕거리며 웃었다.
이번엔 도은이가 얌전히 입 다물고 있는 주하린을 향해 물었다.
“하린 씨는요? 남자 친구 있어요?”
“저도 아직…….”
“없어요, 얘는.”
주하린의 목소리를 덮으며 주예린이 대신 대답했다.
“에이,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린 씨 되는 사람이? 예린 씨한테 비밀로 하고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도은이가 키득거리고 주하린이 곤란한 표정으로 부인했다.
“정말 아닐걸요? 애가 생긴 것만 멀쩡하지 속은 완전 맹해 가지고. 어디 이상한 남자한테 코라도 꿰이는 거 아닌지 걱정이라니까요.”
“그… 런가요?”
주예린의 말에 도은이가 꺼림칙하게 되물었다.
매니저인 도은이인 만큼 다른 헌터들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열심히 수집하고 있을 것이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나에 대한 정보를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형 길드 ‘대현’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주하린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을 텐데. 언니라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혼란을 느낄 수밖에.
주하린은 반박하는 기세도 없이 멋쩍게 웃었다.
“그만 일어날까요.”
그다지 대화에 끼지 않았던 클레어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제안했다.
“응… 그러네. 더 늦기 전에 살 거 사 둬야지.”
“그럼 저희도 가 볼게요.”
도은이와 주예린도 맞장구를 쳤다.
* * *
헤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클레어를 따라가지 않고 주예린과 주하린 사이에 남았다. 아직 가면을 쓰고 있으니 그렇게 해야 했다.
주예린이 화장실에 들린 사이 주하린과 둘이 남을 수 있었다.
그 틈에 나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언니를 따르는 겁니까?”
대현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는 주하린이었다. 주하린은 길드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각성자였고, 주예린은 제아무리 잘나가는 인플루언서니 뭐니 해도 결국 일반인이었다.
후계자 구도는 공고했다.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세력은 일방적일 정도로 차이가 날 텐데.
“그야……. 이 세상에 하나 남은 내 혈육이니까.”
주하린이 발끝을 땅바닥에 문질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은 내 유일한 혈육.”
“…….”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부탁대로 의뢰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유일하다니, 할아버님은요?”
내가 알기로, 그녀의 할아버지인 회장 주대현이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하긴 하지만 각성자 특유의 건강한 신체와 느린 노화 덕분에 가능한 결과였다.
내 말에 주하린이 의표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내가 실언을 했나 보네. 잊어 줘.”
주하린이 그렇게 얼버무렸다.
내가 모르는 복잡한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재벌들의 사고방식이나 가정 사정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모양이니까.
고민 끝에 내뱉었다.
“저 퇴근합니다.”
“갑자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하린이 수긍했다.
“그래, 알았어. 오늘 수고했어. 가 봐.”
주대현.
지금의 대현 그룹을 맨손으로 일군 전설적인 기업인인 동시에, 아웃브레이크 시절 각성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태초의 영웅들 중 하나였다.
교과서에 실리고 위인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다. 그 역시 하나의 신화로 취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주대현이라.’
내가 다른 세계에 넘어가기도 전부터 각성자였던 인간이었다. 나이와 달리 겉모습은 중년에 가까웠다. 최근의 모습이 그랬다.
나는 핸드폰을 통해 간단히 주대현의 과거 모습을 찾아보았다. 그다지 변화가 눈에 띄지 않았다.
‘괜한 생각인가.’
핸드폰을 집어넣고, 퇴근을 자처한 내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
어느 건물의 옥상. 문이 잠겨 있었지만 외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층수가 높아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이봐.”
내가 말을 걸자 등을 보인 채 코트 자락을 휘날리던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야…….”
이 남자에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냄새가 나잖아, 피 냄새가 풀풀.”
“그런가.”
코가 좋군.
남자가 덧붙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남자가 뒤돌았다. 나와 같이 일종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의 모양,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붉은색의 바탕에 커다란 송곳니가 그려진 가면. 치우천황을 본뜬 가면이었다.
그때 본 건장한 노인과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 가면의 모양만큼은 일치했다. 단순히 모티브가 같은 것 이상으로.
‘역시…….’
그리고 익숙한 것이 또 한 가지. 남자가 입고 있는 코트의 모양새였다. 허벅지 언저리까지 오는 제복 형태의 코트였다.
주예린에게도, 주하린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찾아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당신, 대현 쪽 사람이지.”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원한은 없다.”
남자가 기세를 다잡았다. 고요하게 마력이 솟구쳤다.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원한이 없으면 비즈니스란 거네.”
몸담고 있는 조직의 뜻을 따르는 중이라는 의미였다.
“근데 이거 어쩌나.”
나 역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폭발적으로 기운을 터뜨리기엔 참견하는 자들이 많을 것 같았다. 내공 자체는 감지할 수 없더라도, 소음이나 충격이 퍼질 테니까.
야경에 어울리는 조용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나도 이게 일이라서.”
비즈니스라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