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Live As An Actor RAW novel - Chapter 32
Chapter 2
“소문 들었어?”
시장바닥처럼 강의실이 웅성거린다.
폭풍과도 같았던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였다. 머지않아 다가올 축제에 분위기가 들뜰 만도 하건만,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는 축제가 아니다.
아무렴, 한국대학교 축제는 국내 대학축제 중에 가장 인기가 없기로 유명했으니.
“장영국이 형법각론에서 일등 했대.”
“뭐? 물 volume법에서도 일등 했다고 하던데. 그, 그럼 채 volume총론은 걔 그거도 듣는다며.”
“그 강의는 교수님이 석차를 따로 공개하진 않았는데 채점한 대학원생 말 들어보면 장영국 시험 점수가 압도적이었다는데.”
“허.”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는 다름 아닌 중간고사의 석차였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부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다는 한국대학교 법학과다. 그중에서도 전공 수업은 의과대학 못지않게 많은 필기량과 공부를 요했다.
때문에 깐깐한 교수들이 포진된 물 volume법이나, 채 volume총론에서는 재수강을 하는 학생들도 더러 발생하곤 했다.
‘외계인 아니야?’
신재희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 또한 공부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장영국만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입생이 교양과목을 갈아치우고 전공과목으로 커리큘럼을 짜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그 수업에서 난다 긴다 하는 선배들을 제치고 일등을 한다는 것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형사모의재판에서도 일등 하는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 형사모의재판 강의 학부 전공 중에서도 가장 어렵기로 유명한데 어떻게 신입생이 일등을 해. 더더군다나 신정길 교수님 점수 짜게 주기로 유명하잖아. 그리고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재희가 있는데 가능하겠어?”
강의실의 수군거림이 귓속으로 파고들자 신재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한다. 그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 무너질 것 같단 말이지.
그 순간 김동진이 묘한 표정으로 말을 건다.
“재희, 너 이번 시험 죽 쒔구나?”
“남이사, 성적보다야 공부를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지. 법학도로서의 자세를 좀 키워. 그나저나 동진이 너는 시험 잘 봤나 보다. 그렇게 여유로운 거 보니.”
“나야 뭐, 학고만 안 맞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잖냐. 성적 운운하던 신재희는 어디 갔냐. 그나저나 고맙다 네 노트 덕분에 몇 문제 맞힌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이 된다.”
속 편한 놈 같으니라고.
“영국아! 여기야! 여기!”
때마침 강의실로 영국이 들어서자 김동진이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아는 체를 한다. 여느 때처럼 말이 없는 영국을 대신해 김동진이 계속해 수다를 늘어놓는다.
“영국아, 너 형법각론 중간고사에서 일등 했다는 게 진짜야?”
“운이 좋았어요.”
“이야, 이 자식. 형은 작년에 그 강의 겨우 F 면했는데. 그럼 형사모의재판은 어때? 시험 봤으니까 느낌 올 거 아니야.”
김동진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재희는 관심 없는 척하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여전히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밍숭맹숭하기 그지없다.
“그럭저럭요?”
“여유로운 거 보소! 도대체 배우 생활하느라 바쁠 텐데 어떻게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거냐? 비법 있으면 좀 가르쳐 줘라. 이러다가 형 이번 학기에도 학고 맞으면 곧장 짐 싸서 시골 직행해야 해.”
“제가 암기를 잘하는 편이라 그닥 비법이랄 게 없는데.”
“인마, 아무리 법학 과목이 암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법학 관점에서 상충되고 이해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게 말이나 돼? 그리고 우리 학과에서 암기 못 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들 고등학교 다닐 때 한 딱까리들 했던 인간들인데. 이 자식 아무리 봐도 외계인 같다니까. 안 그러냐 재희야?”
“내 말……! 그, 그게 아니라 김동진 너는 헛소리 말고 수업 준비나 해. 신 교수님은 중간고사 끝났다고 쉬엄쉬엄 안 하는 분인 거 너 몰라?”
신재희는 속마음을 겨우 집어삼키고는 식은땀을 닦아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영국은 여유롭게 전공 서적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신재희는 정말 김동진의 말처럼 영국이 외계인은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윽고 강의실 교단으로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가 들어선다.
* * *
행운은 갑작스레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 촬영으로 인해 밤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중간고사에 매달리지 않았던가.
아무렴, 의기양양하게 커리큘럼을 변경하면서까지 전공과목을 선택했는데 학사경고를 맞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
재수강만은 면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한 덕분이었을까. 중간고사에서 생각보다 좋은 성적을 얻었다.
“영국이 너 오늘따라 표정이 좋아 보인다.”
“시험 결과 나오는 날이었잖아요. 제 예상보다 좋게 나와서요. 그나저나 대표님 갑자기 왜 부르신 거예요?”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이렇게 안 부르면 또 언제 보냐? 너 요즘 학교 다니느라, 촬영하느라 도통 소속사에 얼굴을 안 비치잖아. 겸사겸사 전할 소식도 있고 해서.”
김성환 대표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쳐 지나간다.
“전할 소식이라니요? 광고 계약 관련한 거라면 한동안은 안 한다고 했잖아요.”
“어허. 악덕 사장으로 매도하지 마라. 당연히 그건 아니지. 사실 지금부터 전할 소식은 광고 계약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거다. 어젯밤에 나도 소식 받고 잠이 안 와서 밤잠을 설쳤잖아. 아직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니까.”
도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이토록 뜸을 들이는 것일까.
그 순간 김성환 대표가 자세를 앞당긴다. 그러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지 않나.
“좋은 소식이 2개나 있는데 뭐부터 전해줄까.”
“2개나 있다고요?”
“사실 신 감독이 직접 전화해서 알려주는 게 맞는데, 아무래도 영국이 네가 지금 한창 드라마 촬영 중이니까 방해될까 봐 소속사로 연락했나 보더라.”
“신 감독님이라면 신성현 감독님 말씀하시는 거죠?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이야기해 주세요.”
다급한 재촉에 김성환 대표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한다.
“신성현 감독 결혼한단다.”
“예?”
분명 노총각이었는데.
한창 사제의 고백을 촬영할 때만 해도 그러하지 않았나. 시골에 계신 신성현 감독의 노부(老父)는 당신의 아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 때문에 하소연을 할 정도였으니.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설마! 미술 전시회!”
작년 연수와 함께 미술 전시회를 찾은 적이 있지 않나. 그때 분명 연수의 이모와 함께 나란히 서 있던 신성현 감독을 본 적이 있었다. 이후에도 장난 반, 진담 반 신성현 감독에게 연수 이모님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었거늘.
“어? 영국이 너 알고 있었어? 신성현 감독 와이프될 분이 화가라고 하시더라. 영화감독과 화가라 어째 직업만 봐도 딱 어울리지 않냐.”
“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 딱 그 말이 지금 상황에서 제격이다. 항상 연애에는 관심 없어 보이던 무뚝뚝한 신성현 감독이 이토록 빨리 진도를 나갔을 줄이야.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할 소식은 진짜 엄청난 거야.”
“신성현 감독님 결혼한다는 소식도 놀라운데, 뭔데요?”
“그래, 어젯밤에 신성현 감독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더라. 나도 얼마나 놀랬는지 미안한 말이지만 바로 앞서 들었던 신 감독 결혼 소식은 생각도 안 나더라고. 아직 언론에도 발표 안 된 거야.”
도대체 무엇이기에. 김성환 대표가 매스컴까지 거론할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통 머리를 짜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영국아.”
김성환 대표가 덥석 손을 마주 잡으며 부연한다.
“사제의 고백, 칸 영화제에 초청됐단다!”
* * *
[사제의 고백, 칸 영화제 초청되다―!] [충무로의 신예 배우 장영국, 칸의 남자가 되는 것인가!] [대정 배급사 ‘사제의 고백 감독판 재개봉 예정 논의 중’]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처럼, 사제의 고백이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사실은 매스컴을 통해 금세 널리 퍼져 나가 충무로가 다시 한번 들썩이기 시작했다.
물론, 대한민국 영화사에 칸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 ‘사제의 고백’이 처음은 아니다.
일례로 1980년대 백장훈 감독의 영화였던 지리산이 초청된 바가 있으며 그 후에도 몇몇 감독들의 작품이 초청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평론가 김진성, 사제의 고백은 상업과 예술성을 동시에 거머쥔 작품. 수상을 논하기에 앞서 초청된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것.]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거머쥔 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최초로 8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이지 않은가.
하물며 향후 십 년간은 청불영화가 ‘사제의 고백’의 아성을 뛰어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 평가한 이들조차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영국아, 내는 이래 잘될 줄 진즉 알았데이!”
“김 감독님, 그건 대한민국 사람들 전부 다 알고 있다니까요. 영국이 이미 스타인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나저나 영국아 정말로 축하한다.”
“김영민이, 니가 뭘 안다고 그라노. 내가 영국이 쪼맨할때부터 크게 될 놈이라 칸 거 유 감독이 똑똑히 들었다 아이가. 그때부터 내가 영국이 복덩이라꼬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이제는 불란서(프랑스)까지 진출하다니, 키야―! 이제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나는 건 시간 문젠기라!”
촬영 현장 역시 칸 영화제 초청 소식으로 인해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영국의 화제가 영 못마땅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니, 영화제 초청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 호중이 형, 안 그래?”
“그래, 그런데 정석아 목소리 좀 낮추자.”
“어휴, 듣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렇게 쩔쩔매. 그리고 선배가 후배 눈치를 봐야 해?”
배우 송정석과 동명이인인 배우 김정석이다. 잘생긴 외모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였다. 어찌 보면 아역배우 생활을 오래 한 터라 영국보다도 선배라고 할 수 있지만 연기력만큼은 좋지 못했기에 매번 조연만을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형, 대표님이 차기작 이야기 안 하셔? 언제는 주연 물어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시더니만 영 묵묵부답이시잖아.”
“대표님이 지금 사방팔방으로 알아보고 계신다고 하더라. 충무로랑 방송가까지 싹 관계자들한테 시놉받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 좋은 작품에 출연해야지.”
“어휴, 내가 작품만 잘 만났으면 뜨는 건 일도 아닌데.”
‘이 자식을 팰 수도 없고, 아오. 연기력부터 길러야지.’
매니저 석호중은 차오르는 화를 식혀내고 있다. 평범한 배우였다면 자신에게 이처럼 막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석은 자신이 속한 소속사 대표의 외동아들이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이었기에 이토록 안하무인인 것일 테지.
“장영국, 저거 별거 아니야. 솔직히 내가 연산군 역할 맡았어도 저만큼 해낼 수 있었다고. 솔직히 생긴 것만 봐도 내가 더 잘생겼잖아.”
“아니, 정석아. 목소리 조금만.”
“아니, 왜 계속 나한테 조용히 하라고 해! 어차피 여기 아무도 없잖…….”
그때였다.
“거 참―!”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
배우 김정석이 고개를 홱 하니 돌린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김처선 역할의 배우 박상철이 등산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매니저 석호중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들어간다. 분명 방금 전까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언제 도착한 것일까.
그 순간 박상철이 이맛살을 찡그린 채 배우 김정석을 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한다.
“대본 읽는 데 방해되니까, 좀 닥칩시다.”
* * *
“씬 넘버 59, 연산군의 폭정(暴政)―!”
조정에 피바람이 몰아닥치려는 전조가 보인다.
대신들은 마치 살얼음을 걷는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옥좌에 앉은 왕의 눈동자는 번들거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칼을 휘두를 것처럼 서슬 퍼렇다.
“금일 상참(常參)은 이것으로 마치겠다.”
대신들은 속으로 한숨을 집어삼킨다. 매일 있는 상참(常參)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들리는 소문에는 간밤에 수많은 조정 대신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한다.
환관 김처선 역시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왕의 뜻이었기에.
상참을 끝마친 연산군은 걸음을 옮긴다. 홍해가 갈라지듯, 조정 대신들은 왕의 행차에 방해라도 될까 싶어 좌우로 허리를 숙인 채 물러난다.
하지만 그 순간 왕이 한 사람을 부른다. 다름 아닌 간신 임사홍이다.
그는 김처선과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인 채 공손히 주군의 뒤를 따른다. 마치 내시라도 된 것처럼.
“임사홍, 내가 말한 일은 제대로 하였느냐.”
“전하, 소인 어명을 받들어 뜻대로 행하였나이다. 창경궁 뒤뜰에 포박을 해두었으니 언제라도 가시면 되는 줄 아옵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왕과 임사홍의 대화에서 이상한 기류를 느낀 상선 김처선이 고개를 들어 연산군을 바라보지만 그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때였다. 멀찍이서 걸어오던 인물이 왕의 행차를 보고는 놀라 자리에 고개를 숙인 채 멈춰 선다.
“아우가 아닌가?”
다름 아닌 연산군의 이복동생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이다.
이항은 예를 갖춰 임금에게 인사를 올린다. 연산군은 그러한 이복동생의 어깨를 짚으며 묻는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전하, 문안을 여쭙기 위해 왔사옵니다만…….”
“왜 네 어미가 보이지 않더냐?”
왕의 경박스러운 언행에 김처선이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연산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아우가 어미를 찾기 위해 이토록 동분서주하거늘, 내가 도와주어야겠지.”
일찍이 선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엄 씨와 정 씨를 창경궁 뒤뜰에 포박해놓은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폐비 윤 씨의 폐출에 가담한 것은 물론이고, 당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해 역모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파악되지 않았나.
그 순간 연산군이 안양군 이봉의 어깻죽지를 잡고는 끌고 간다.
“저, 전하!”
텔리된 화면을 마주하고 있는 유명한 피디는 영국이 표현하는 연산군의 광기(狂氣)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그마저도 폭군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듯하다.
그때였다.
‘……!’
안양군 이항 역할을 맡았던 배우 김정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본래 각본대로라면 어깻죽지를 잡고 창경궁까지 계속해 끌고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연산군이 넘어진 자신의 이복동생을 일으켜 세워주듯 손을 내민다.
“우둔한 것은 두말할 것 없고, 신체 또한 병약하구나.”
배우 김정석의 매니저인 석호중은 촬영 현장 한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이 촬영이 끝나고 배우 김정석이 얼마나 욕지거리를 내뱉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영국이 손을 내밀었지만, 배우 김정석은 손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아 무릎 아픈데.’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이지 않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만 해도 분명 NG가 튀어나올 거라 예상했었다. 허나 유명한 피디는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나간다는 듯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공중에 원을 그리고 있다. 아무렴, 지금 상황이 각본만큼이나 잘 어울렸기에.
하지만 이항 역할을 맡은 배우 김정석은 이 상황을 타파해 나가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연기나 순발력이 형편없다는 방증이었다. 허나 그때였다.
“내 일으켜 세워주지.”
애드립을 받아치지 못하는 배우 김정석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정녕 연산군에 동화되어 그 모습이 나타난 것일까.
분노와 실망, 복잡다단한 감정의 편린들이 붉게 충혈된 동공 위로 떠오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손끝이 머리칼을 거세게 움켜쥔다.
배우 김정석은 갑작스레 자신의 상투 사이로 우악스럽게 치밀어 들어오는 손가락에 당황을 금치 못한다.
끌려가듯 머리카락이 움켜쥔 채 일으켜 세워지지만 대꾸조차 하지 못한다. 마치 원래 대본이 그러한 것처럼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지 않나.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번들거리는 안광을 마주하고 있자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온다.
‘무, 무슨 사람 눈빛이.’
정말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눈빛이 아닌가.
* * *
“전하, 성군(聖君)이 되어 나라를 어질게 할 재목이셨던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토록 흉악무도한 일을 벌이신단 말입니까. 정녕 제가 알던 전하신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세조부터 연산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을 보필한 환관 김처선이다.
단언컨대 연산군 이융은 그 태부터가 남달랐다. 여태껏 수많은 왕족을 봐온 김처선이었지만 이융만큼은 어진 성군이 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특한 왕세자였기에.
하물며 왕 volume을 하사받고 집 volume 초기 때만 하더라도 백성을 위한 만민의 정치를 펼치지 않았나.
그런 왕이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그때 연산군이 입술을 비틀며 운을 띄운다.
“환관의 세 치 혀가 하늘에 닿으니, 귀가 간지럽구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다. 대신들은 숨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환관 김처선은 물러서지 않는다. 이미 늙어버려 노쇠한 몸, 마지막으로 직언을 아끼지 않는다.
“소인 비록 환관이나 여태껏 네 분의 왕을 모셨사옵니다. 선대왕만큼이나 전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총명하셨사옵니다. 하물며 선대왕을 대신하여 옥좌에 올랐을 때에도 이러지는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전하를 이토록 변하게 한 것이옵니까. 더 이상 장녹수라는 희대의 요부의 치맛자락에 싸여 있지 마시옵고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시옵소서. 두려움에 울부짖고 가난에 굶주려 아사하는 백성들이 정녕 보이지 않으십니까.”
“희대의 요부라, 어찌해서 그리 부르는 것이냐. 녹수 또한 내가 가지고 노는 흥청에 불과한 것을. 자네는 내가 지금 한낱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소인 김처선 혓바닥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해야겠사옵니다. 만민의 아버지이신 전하께서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로잡으시길 간청하옵니다. 부디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시어 성군으로 거듭나시길 바라옵나이다.”
대신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환관 김처선의 직언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지만 그 누구 하나 김처선의 직언에 첨언하지 못한다.
자칫했다가는 당신들의 목마저 무사치 못할 걸 아는 것이다. 왕의 앞에서 그를 욕보이다니, 가문이 멸문지화 당하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그때였다.
“하하하하.”
연산군의 입술이 미약하게나마 뒤틀린다. 그리고 볼이 실룩인다.
“과연 신하들 중에서도 자네와 같은 충신이 있구나. 지금 떨고 있는 저치들을 보아라. 그 누구 하나 너처럼 나서는 자가 있더냐. 조선팔도의 여인들을 데려와 흥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도 간신들만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무서울 거 하나 없었지. 선대왕께서 만든 기틀을 부수고 혈육이라는 이름 아래 엮여 있는 이들에게 칼붙이를 들이밀 만큼 패륜을 저질러도 어디 그 누구 하나 나를 막는 자가 있단 말이냐. 내 평범한 왕이었다면 충신인 자네의 직언에 감동했을 터. 허나 처선아, 너의 직언은 시작부터가 틀렸다.”
연산군은 겸사복장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 김처선의 목에 들이민다. 그 모습에 대신들은 눈을 질끈 감는다. 혹여나 저 칼끝이 자신들의 목을 향할까 봐.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순간에도 김처선만큼은 형형한 눈빛을 잃지 않은 채 연산을 마주한다. 그 순간 김처선의 귓가로 연산이 입을 가져다 댄다.
“부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달라 하였지. 허나 어찌할까. 나는 네가 알던.”
뒤이어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김처선이 눈을 크게 뜬다.
“임금이 아니다.”
그제야 그의 시선에 연산의 모습이 오롯이 들어온다. 생김새는 분명 같으나, 얼굴에 자리한 반점의 위치가 미세하게나마 틀리다. 왜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을까.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연산의 칼끝이 김처선의 혓바닥을 베어버렸기에.
연산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 것도 모자라 폐비 윤 씨의 폐출에 가담하였다는 죄로 선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엄 씨와 정 씨를 창덕궁 뒤뜰에서 당신의 이복동생들로 하여금 죽이게 하지 않았나.
하물며 어명을 따른 이복동생들마저 폐륜이라는 이름 아래 사사하였으니.
“김처선의 이름을 조선팔도에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이름에 ‘처’ 자가 들어가는 자들을 모조리 바꾸도록 하여라.”
당신에게 충언을 했던 김처선을 능지처참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이름마저도 조선에서 지워낸다.
수많은 왕을 보필했던 상선의 죽음에도 대신들은 한마디 입도 떼지 못하고 있다. 혹여 자신에게 화살이 향할까 몸을 움츠리는 것이었으니.
“경연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곳에서 흥청(興淸)을 불러 춤사위를 펼치도록 하거라. 오늘 내 한번 코가 삐뚤어지게 술잔을 기울여보아야겠구나.”
선왕들이 홍문관 관원들과 유교경전을 공부했던 경연 편전에서 때아닌 연회가 이루어진다.
조선팔도에서 잡혀 온 여인들은 흥청이라는 이름 아래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옷을 걸치고 춤사위와 풍악을 울린다. 그야말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짓이었다.
‘허, 평소에 여자들이라면 소 닭 보듯 하는 놈이.’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흥청의 허리 맡을 움켜쥐며 곤룡포 자락을 휘날린다.
대본 리딩장에서 보았던 폭군의 연기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영국의 연기는 유명한 피디는 물론이고 모든 스태프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광기(狂氣), 그 자체였기에.
* * *
43.9%
드라마가 후반부에 접어들자 시청률 또한 날이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쉽사리 아성을 깨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40%의 벽까지 넘어서고 나니 마지막 촬영을 앞둔 촬영 현장은 긴장감이 가득하다.
“영국아, 종방연에는 참석할 거지?”
유명한 피디가 은근슬쩍 물어온다. 요즘 하도 많은 언론에 관심을 받고 있다 보니, 혹여 스케줄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터였다.
“당연하죠, 주연이 종방연에 참석 안 하는 경우가 어딨다고.”
“난 또 요즘 네가 너무 떠버려서 걱정했잖냐. 참, 프랑스에 가기는 하는 거야?”
“초청작이라서 아마 저까지는 안 갈 거예요. 이미 작년에 개봉한 작품을 초청하는 것도 규정에 벗어날 정도로 이례적인 건데 아마 상영만 하고 시상 같은 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언론에서 너무 비행기 태우니까 저까지 얼떨떨한 거 있죠.”
아무렴, 이미 개봉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을 초청한 것도 이례적이지 않나. 시상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칸 영화제 측에서 강력하게 ‘사제의 고백’을 상영해야 한다고 말한 영화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회차까지 시청률 잘 유지하면 국장님이 어떻게든 연말 시상식 때 푸쉬해 주시겠대.”
“아직 여름도 안 됐는데 무슨 연말 시상식이에요.”
“네가 SBC 연기대상에서 상 제대로 못 받는 거 보고 말들이 많았잖아. 그러니까 너만 알아두라고. 포상 휴가는 같이 갈 거지?”
“포상 휴가요?”
“우리 푸켓 간다. 비행기도 비즈니스에다가 오성급 호텔까지 전부 준비해 준다고 하는데.”
일전 SBC 드라마 청춘을 촬영하고 나서도 포상휴가를 푸켓으로 보내주지 않았나. 하지만 스케줄이 겹치기도 했고, 굳이 푸켓을 가야 할 이유를 못 느껴 포상휴가에는 불참했던 영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이 되기도 했다.
“다른 분들도 전부 가시는 거예요?”
“본부장님 재가 떨어진 거라 아마 주조연급은 전부 갈 수 있겠더라. 스태프들도 스케줄 겹치는 사람들 빼고는 웬만하면 전원 참석할 거고 말이야. 참, 저기 곽 배우는 아마 참석 못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때마침 AD 김영민이 다가온다.
“유 피디님, 잠시 이리로 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촬영 구도를 어떻게 짜야 할지 논의 중인데 촬영 감독님하고 조명 감독님하고 지금 시야 안 잡힌다고 워낙 입씨름을 하고 계셔서.”
“알겠다, 지금 가마. 영국아 조금 이따 마저 이야기하자.”
유명한 피디를 보내고 난 후 영국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배우 곽정우였다. 영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형, 마지막 촬영 잘 부탁드릴게요!”
영국은 어찌 보면 드라마 촬영 기간 동안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합을 맞췄던 배우 곽정우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는 신인 배우였지만 겸사복장 곽산의 역할을 맡으며 그동안 그 누구보다도 배역을 잘 소화해 내지 않았나.
“내가 더 잘 부탁하지. 솔직히 지금 좀 떨리거든. 마지막 촬영에 내가 실수라도 해서 그림 제대로 안 나올까 봐.”
“에이, 걱정하지 마요. 제가 여태껏 봐왔던 형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소화해 낼 테니까. 그나저나 형 포상휴가 진짜로 안 가는 거예요?”
“아, 액션 영화 오디션이 잡혀 있어서 아마 안 될 거 같아. 사실 고민 중이야. 오디션 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오디션은 나중에 봐도 좋으니까 이참에 방송국 관계자분들하고 안면이라도 두텁게 터야 할지.”
“안돼요! 오디션 꼭 보셔야 해요!”
사실 지난 삶 곽정우와는 안면이 있다. 작금은 신인 배우일지 모르나 향후에는 액션배우로서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액션 영화 오디션을 본다고 한다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영국의 강력한 만류에 곽정우가 의아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알겠어. 배우라면 놀러 가는 것보다는 오디션 보는 게 맞는 거지. 근데 영국아, 원래 상투 틀다 보면 머리가 이렇게 많이 아프냐?”
“왜요?”
“아니, 요즘 촬영 끝나고 숙소에 들어가서 샤워할 때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는 거 있지.”
크흠.
영국은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사실 김정우는 훗날 한국의 제이슨 스타뎀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액션 배우가 된다.
하지만 그 별명의 이면에는 그의 벗겨진 머리가 있었으니. 탈모를 걱정하는 듯한 김정우의 모습에 영국은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준다.
* * *
개망초꽃이 핀 유배지에는 드넓은 초목밖에 보이지 않는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외딴 섬에 홀로 핀 초가집 하나가 고약한 해풍(海風)을 견디며 우두커니 서 있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고 탱자나무 가시만이 울타리마냥 둘러쳐져 있어 스산함을 더한다.
-내가 이토록 암군의 길을 걷고 있거늘 반정(反正)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터. 기다리고 있었느리라.
이결은 조정 대신들의 반정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였다. 굳이 그들을 막으려 금군삼청을 동원하지도 않았더랬다. 아무렴, 그간 왕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니.
하물며 한낱 폭군이라 할지라도 조선의 왕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부지하지 않았나.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날이 춥소, 어여 들어오게.”
창호지 너머 보이는 그림자에 이결이 보지도 않고 말한다. 이윽고 으스러져 가는 초가집 문턱 너머로 한 사람이 들어선다. 다름 아닌 여태껏 자신을 보필했던 겸사복장 곽산이다.
갓을 깊게 눌러써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보자 괜스레 미안함이 감돈다.
“전하.”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나를 왕이라고 대해봐야 무엇하겠소, 편히 이결이라고 부르시오. 겸사복장.”
“신(臣) 곽산, 결산골의 그날 선왕께서 자신의 아우분에게 왕위를 하사하였사옵니다. 그렇기에 전하께서는 이 몸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제 주군이시옵니다.”
“융통성 없는 양반 같으니라고. 어차피 반정을 당해 폐위가 된 마당에 무슨 감투가 중요하겠소. 한낱 으스러져 가는 인간에 불과한 것을.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나와 함께 고기나 낚으러 갑시다. 오늘 객이 올지 모르고 찬을 준비하지 못하였소.”
이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낚싯대 하나를 둘러메고 초가집을 나선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겸사복장 곽산이 복잡한 감정을 눈빛 속에 드러내며 뒤따른다.
“오늘은 영 입질조차 없구나.”
낚싯대를 기울이지만 물고기가 낚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결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다시 낚싯줄을 거둬들인다.
“겸사복장, 그대는 내가 왜 그토록 망나니같이 행동했는지 아시오.”
“…….”
“그저 조정을 무너뜨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소. 만약 우리 형제가 양민의 뱃속에서 태어났다면 이토록 모진 풍파를 겪고 자랐어야 했을까 싶은 분노 때문이었소.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면서까지 암군이 되었던 것은 그저 형제의 복수였소이다. 나와 형님을 사지로 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 때문이었으니. 지하에 있을 형님께서 그 광경을 보셨더라면 참으로 대성통곡할 일이었을 테지.”
이결의 눈동자에는 후회와 탄식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이결은 고개를 들어 겸사복장과 시선을 마주한다. 겸사복장은 갓을 쓰고 있어 아직 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으니 그대 또한 힘든 길을 걸어야 할 터. 오늘로서 조정의 칼끝이 그대에게나마 닿지 않는다면 내 형님께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을 테지. 겸사복장, 내 그대에게 마지막으로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내 죽고 난 후 머리카락 한섬 잘라 형님 곁에 묻어주시오.”
이결은 그렇게 말을 끝마치곤 다시 낚시대를 바닷가를 향해 던진다.
고즈넉한 바닷바람만이 유배지를 맴돈다.
겸사복장은 괜스레 유배지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조차도 반정 세력의 살생부에 명단을 올린 자가 아니었나.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정세력에게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만 했으니. 이결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 순간 겸사복장의 칼끝이 이결의 가슴을 향한다.
햇볕이 유난히도 밝기 때문일까, 바닷물조차도 일렁임이 적다. 야트막한 절벽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이결의 몸이 무너져내리자 곽산이 무릎을 꿇고 그를 받는다.
죽어가는 왕의 눈동자는 이리 말하는 듯하다.
‘미안하오.’
실록에 이르길 연산군이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급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머리카락이 형제의 무덤에 함께 묻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갓을 벗어 던진 곽산이 울음을 터뜨리며 떨리는 손끝으로 차갑게 식은 왕의 시신을 껴안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흐느적거리는 개망초꽃만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듯하다.
* * *
종방연.
드라마의 흥망성쇠는 다름 아닌 시청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률이 저조한 작품은 조기 종영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종방연은커녕 제대로 된 회식조차 없이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시청률이 상향곡선을 그릴 경우 연장 방송 논의가 되는 것은 당연했으며 종방연 또한 성대했다. 마치 지금처럼.
촤라라락―!
시상식의 레드카펫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기자가 장사진을 펼치고 있다.
사극 ‘연산, 왕의 비밀’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하나둘씩 도착하자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이따금 배우를 향해 짓궂은 부탁을 하는 기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차혜진 씨! 장녹수 모습으로 한번 멋지게 포즈 취해주시죠!”
‘뭐?’
여배우 차혜진은 기자의 외침에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녹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해달라니. 여기서 장고를 어깨에 비스듬히 멘 것처럼 춤사위라도 펼쳐야 할까 고민이 되던 찰나.
“녹수야, 무얼 그리 뜸을 들이느냐.”
누군가 차혜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등장한다. 차혜진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보이자 그곳에는 다름 아닌 영국이 서 있었다.
꺄아―!
종방연 장소를 구경하던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고 기자들이 이에 질세라 카메라 셔터를 연거푸 눌러댔다.
영국은 흡사 에스코트를 하듯 차혜진의 손을 조심히 이끌어 보이며 종방연이 열리는 컨벤션홀로 걸음을 옮긴다.
그 광경이 드라마에서 보았던 연산군과 장녹수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 같아 보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누나, 미안해요. 난처해하시는 거 같아서.”
“아, 아니야. 괜찮아.”
영국은 기자들의 시선이 끝나자마자 마주 잡았던 손을 놓았다. 멀어지는 영국의 뒷모습을 보며 차혜진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쓸어 보인다.
‘어린 애가 무슨 박력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보인다. 자신은 톱 여배우가 아닌가. 이윽고 당황을 머금었던 차혜진의 얼굴이 다시 차갑게 도도해진다.
“유 피디님, 무슨 종방연을 이렇게 성대하게 해요?”
영국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종방연이 이루어지는 컨벤션홀은 이미 만찬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갖가지 산해진미는 물론이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종방연에 참석한 이들을 비추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종방연이 아니라 시상식의 한 장면에 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예전 ‘8월의 남자’ 때보다 더 엄청나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때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이건 뭐.”
“지금 방송국이 완전 잔칫집 분위기라서 그래. KBC하고 동 시간대에 사극으로 맞불 붙었는데 우리가 이겼으니까. 엉덩이 무거우신 사장님이 연산 팀 종방연은 역대 최고로 하라고 특별지시까지 내리셨거든.”
“KBC 쪽은 어때요?”
“거기는 말 안 해도 초상집 분위기인 거 뻔하지.”
언론에서도 주목하던 KBC와 MBS의 맞대결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KBC의 승리를 점쳤었다. 그도 그럴 것이 KBC는 정통사극의 강자라 불리던 맛집이 아니었나.
헌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MBS가 KBC를 녹다운시킨 것이다. 마지막 회차를 앞둔 시점에서 최고 분당 시청률이 43%를 돌파했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영국아, 조금 있으면 국장님 오신다니까 나 마중 좀 갔다 올게. 그리고 김 선배 술 좀 많이 못 마시게 해라. 저 양반이 내 말은 도통 듣지를 않으니. 저러다가 국장님 오시기도 전에 술에 만취해 있을까 봐 걱정이다. 어휴.”
“알겠어요.”
영국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유명한 피디의 말처럼 이미 종방연장 한편에서 촬영감독 김득형은 샴페인 잔을 연거푸 들어 보이며 흥에 취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취하면 어깨춤을 추고 트로트라도 부를 기세였으니.
영국이 김득형 감독에게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장영국 씨?”
* * *
‘누구지?’
족제비 수염을 한 남자다. 얄팍한 눈매 하며 넙데데한 볼살은 욕심이 그득해 보이는 인상이다. 분명 드라마 촬영팀에 포함된 스태프나,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안면이 낯익다. 영국이 골똘히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참,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두툼한 장지갑 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민다. 명함조차도 그의 얼굴 인상처럼 금테가 둘러쳐져 있는 것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함을 받아 든 영국이 그제야 운을 띄운다.
“BS 엔터테인먼트?”
“예, 맞습니다. 제가 BS 엔터의 대표 양수갑입니다.”
‘아, 이 인간?’
지난 삶 연예계에서 꽤나 유명했던 인물이다. 소속사 대표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짜이거나, 사업가이거나, 그도 아니면 예술가이거나.
송원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김성환이 예술가의 성향에 가깝다면 이 양반은 전형적인 사짜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것도 아주 질이 안 좋은 쪽으로.
“저희 소속사 배우인 차혜진 씨가 영국 씨를 얼마나 극찬하던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BS 엔터테인먼트는 소속 배우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곳입니다.”
‘차혜진이 여기였어?’
연예계 소속사 중에서도 잡음이 끊기지 않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접대는 물론이고 소속사 대표의 횡령에 이르기까지. 물론 지금에야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지만 훗날에야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니.
“사실 대표인 제가 이렇게 발로 뛰며 배우를 만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만. 특별히 장영국 씨이니까 이렇게 종방연에 참석을 했습니다. 현재 장영국 씨께서 송원 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영국 씨 같은 잠재력이 가득한 배우가 송원 엔터와 같은 영세한 소속사에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뭔 개소리야.’
영국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선에서 대답했다.
“관심 없어요.”
“당연히, 예?”
“저는 바빠서 이만.”
명함을 도로 돌려주자 양수갑의 얼굴이 굳어진다.
영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을 뒤로한 채 촬영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양수갑의 볼이 거칠게 실룩인다.
“허, 저 새끼가 나를 잡상인 취급해?”
양수갑은 방송가에서 나름 입지를 쌓은 인물이었다. 수많은 접대와 로비를 통해 갖가지 인맥을 구축하지 않았나.
하물며 BS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서 군림하면서 꽤나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무시를 당한 적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돌려받은 명함이 양수갑의 손바닥 위에서 우악스럽게 구겨진다.
* * *
“나보고 뭘 어쩌라고요?”
차혜진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소속사 대표인 양수갑이 서 있다.
한창 종방연이 무르익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람의 통행이 적은 컨벤션홀의 외진 복도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다.
“차 배우, 아니, 혜진아. 예전에는 내 시선도 못 마주치던 게 지금은 무슨 대한민국 최고 미녀 배우라고 치켜세워주니까 세상이 전부 네 것 같아?”
“······.”
“내가 무슨 어려운 부탁 했어? 그냥 몸 한번 굴리라는 거 아니야. 네가 장영국이하고 배꼽 한번 맞추고 그 사진만 가져오라니까. 예전에도 많이 했던 거잖아. 지금 와서 깨끗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차혜진이 미간을 좁히며 양수갑을 노려본다. 하지만 양수갑은 그녀의 시선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한다.
“왜 옛날에 네가 나인텐에서 일했다는 거 내가 전부 까발려줘? 아는 기자들 몇 명한테 사발 풀면 이 바닥에 소문나는 거 금방인 거 너도 알잖아.”
“소속사 대표면서 당신 배우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야 뭐 여배우 한 명 잃는 거지만 뭐 어쩌겠어. 기르던 개가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잡아먹을 수밖에 더 있나.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할래. 광고 계약된 것들 위약금에다가 소속사 전속 계약금까지 물어내야 할 판국인데. 앞으로 연예계는커녕 여의도에 발 한 발자국 못 붙일걸. 혜진아, 나도 이렇게 지저분하게 가기 싫다? 쉽게쉽게 좀 가자.”
차혜진이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눈물을 훔친다. 그 모습에 양수갑이 마치 더러운 것을 본 것마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긴다.
종방연장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이들이 많이 보인다. 드라마국장이 직접 찾아와 사장님 표 금일봉을 건네주자 흥이 최고조를 찍었다. 때문에 영국 또한 이미 샴페인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모를 정도였다.
“복덩아 일로 온나! 오랜만에 내랑 노래 한 자락 해야제!”
“감독님 무슨 샴페인 마시면서 트로트에요!”
“영민이 니는 절로 가라. 영국이랑 내랑은 니들이 모르는 그런 끈끈한 정이 있다 아이가. 영국아! 아이고 우리 복덩이!”
어느새 촬영감독 김득형의 코끝이 잘 익은 딸기처럼 벌게져 있다. 한껏 술에 취해 영국을 얼싸안으며 어깨춤까지 춘다. 그 모습을 스태프들이 바라보며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린다.
최은숙 작가는 유명한 피디에게 다가가 은근슬쩍 허리 맡을 찌른다.
“유 피디님, 소감이 어때요?”
“무슨 소감?”
“지금까지 드라마 메가폰 잡은 것 중에서 시청률 40% 넘은 적 없었잖아요.”
“전부 최 작가 덕분이지. 그걸 말이라고 하겠어.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하고 스태프들이 있는데 내가 한 거라곤 그냥 준비된 만찬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준 것밖에 더 돼.”
“겸손한 거야, 아니면 척척 하시는 거예요. 그나저나 우리 장녹수가 안 보이는데. 차 배우는 어디 갔대요?”
“방금 소속사 대표랑 이야기하러 간다고 잠깐 나갔어.”
“아, 그 옆으로 수염 기다란 남자? BS 엔터 대표 맞죠? 들리는 소문이 엄청 안 좋던데. 차 배우는 왜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네.”
유명한 피디와 최은숙 작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때마침 종방연장으로 다시 돌아온 차혜진이 표정을 고쳐내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긴다. 화장 또한 금세 고쳐냈는지 방금 전 울었다는 것을 알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영국아, 잠깐 나랑 이야기 가능해?”
스태프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던 영국을 향해 다가간 차혜진이 슬쩍 말을 건넨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의미 모를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를 비켜준다. AD 김영민은 영국을 어깨를 밀어주며 ‘화이팅’이라고까지 부연하지 않나.
‘나 원 참.’
“왜요. 누나?”
영국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잠깐 내가 너무 취해서…”
차혜진이 마치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더니 이내 영국의 어깨맡에 얼굴을 기댄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인 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림이 나쁘지 않다.
반면 영국은 의아할 따름이다.
촬영 현장에서 내내 자신과는 거리를 두던 인물이 다름 아닌 차혜진이었기에. 하지만 이내 그녀의 낯빛에 스쳐 지나가는 난처함을 보고는 눈치챈다.
‘그럼, 그렇지.’
연예계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큼이나 어두운 면이 깊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조직폭력배들이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것이 바로 연예계 소속사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BS 엔터테인먼트 대표 양수갑은 그런 이들만큼이나 질이 좋지 않다.
그 순간 영국이 그녀의 어깨맡을 잡고는 바로 세운다. 그러곤 부연한다.
“누나.”
뒤이어진 말에 차혜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세차게 떨린다.
“대표가 시켰어?”
* * *
연예계는 복마전(伏魔殿)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판만큼이나 비리가 심하며 화려함 뒤에 숨겨진 어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깊다는 뜻이다.
허영심에 취해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샌가 자신의 목줄에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이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약점이라도 잡혔나.’
영국은 차혜진의 떨리는 동공을 보고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렴, 약점이라도 잡히지 않고서야 여배우가 이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테니.
지난 삶 이러한 여배우들을 숱하게 보았다. 허나 대부분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끊어낼 수 없는 쇠사슬에 괴로워하다 언젠가는 과거로 인해 자신의 숨통을 조이게 되는 것이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뜸을 들이지 않는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에요.”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해줄 뿐이다.
“계속해서 그렇게 끌려다니거나.”
“······.”
“아님 들이박거나.”
멀어지는 영국의 뒷모습을 보며 차혜진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녀의 매니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 허겁지겁 달려간다.
이로써 조언은 끝난 것이다. 선택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몫이기 때문이다.
컨벤션홀에서 시작된 종방연은 고깃집까지 이어졌다. 방송국 사장이 직접 내린 금일봉 덕택에 모두 흥의 최고조를 달리고 있으니 어찌 불이 쉽게 꺼질까.
미성년자 딱지를 뗐기 때문에 영국 또한 소주잔을 들어 보인다.
‘이 맛이지.’
달콤하고 씁쓸한 기운이 혀끝을 넘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최은숙 작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영국을 바라본다.
“영국아, 너 술 꽤 한다? 혹시 학생 때부터 몰래 마신 거야?”
“최 작가님. 모르셨나 보네. 우리 영국이 술 잘 마십니더. 딱지 떼자마자 같이 술잔 기울여본 사람으로서 인정한다 아닙니꺼. 내가 어디 가가 병나발로 저얼대 지는 사람이 아인데 이노마 한테는 못배기겠더라고예. 영국이가 알고보이 타고난 술고래인기라!”
“아니, 촬영 감독님은 또 언제 오셨대? 그만 좀 자셔요. 그러다가 차 배우처럼 술병이라도 나겠어요.”
“에헤이!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이래 마시겠는교. 오늘 고마 코삐뚤어지게 함 마셔보입시더! 영국아 준비됐나!”
촬영감독 김득형이 고깃집 이곳저곳을 오다니며 술자리의 분위기를 돋운다. 아무리 봐도 촬영 카메라를 잡지 않았다면 대폿집 털보 사장님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김득형 감독이 사라지자 그제야 최은숙 작가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영국아, 차기작은 따로 생각해 놓은 게 있어? 요즘 송원으로 들어가는 시놉 물량이 엄청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에이. 작품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겠어요. 설마 최 작가님 차기작 바로 집필하시려고요?”
“머릿속 우물이 바닥이 나서 더 이상 끄집어낼 상상력도 없네요. 나야 뭐 영국이 네가 차기작 같이 해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내야겠지만. 다음에 또 여건 되면 나랑 같이 호흡 맞춰보는 거다?”
“저야 영광입니다.”
과거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삶 최은숙 작가의 작품에 한 컷이라도 얼굴을 비추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좀 많았던가.
심한 경우에는 간택을 받기 위해 최은숙 작가의 스케줄을 따라다니며 부탁을 했던 유명배우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때마침 유명한 피디가 소주잔을 든 채로 다가온다.
“우리 주연 배우랑 왕 작가가 무슨 대화를 이렇게 하고 있었을까. 설마 나 빼고 둘이서 몰래 합이라도 맞추려는 거 아니지?”
“호호. 나야 뭐 제작비 많이 충원해 주는 쪽이 좋죠.”
“이거 봐. 최 작가.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섭섭하다 섭섭해. 같이 볼꼴 못 볼 꼴 다 봐놓고.”
“어머. 또 왜 말을 요상하게 하실까. 누구 혼삿길 망칠 일 있어요?”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내 말은 입봉 같이 했잖아. 코흘리개였던 피디랑 작가가 서로 만나서 첫 작품 같이했으면 볼꼴 못 볼 꼴 다 본 거지 뭐. 예전에 기억 안 나? 최 작가가 글 안 나온다고 나한테 하도 하소연해서 내가 새벽에 포장마차로 뛰어나간 거.”
“아니, 언제 적 이야기를!”
고깃집이 또다시 시끌벅적해진다. 영국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본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이러한 환경이 바로 자신이 바라마지 않았던 풍경이 아니었나.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은 채로 가락을 읊조리는 촬영감독. 서로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투덕거리는 피디와 작가. 그 순간 영국의 맞은편으로 한 배우가 앉는다.
“크흠, 영국아. 나랑도 한잔하자.”
연극배우 박상철이다. 과거 영국과 한 차례 다툼이 있었던 그였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별다른 트러블 없이 지내왔다.
영국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주병을 들어 그의 소주잔에 따른다. 소주잔 위에 출렁이는 물결 사이로 진한 사람 냄새가 가득 풍겨온다.
* * *
말린 생선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숫제 입을 쩍 벌린 채로 해풍에 여물어가고 있고 끊임없이 물이 들어차는 붉은 대야에는 활어들이 꼬리를 팔딱이며 생동감을 더한다.
몸빼바지를 입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각자 뒷산에서 캐온 봄철 취나물을 팔고 있다.
양손으로 가득 안고 가도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만 원짜리 몇 장이면 그네들의 하루 삯이 될 만큼 값이 싸다.
“잘생긴 총각, 내 더 넣어줄게 쪼매만 기둘리라.”
모자 속에 얼굴이 가리어져 있어 잘 보이지도 않으련만 좌판 할머니는 당신의 나물을 전부 사준 젊은 총각이 고마운지 계속해 검은 봉다리에 남은 나물들을 밀어 넣는다.
그때 좌판 할머니의 옆에 앉아 있던 쪼그마한 꼬마가 총각을 뚫어져라 빤히 쳐다본다.
“할매요, 손녀입니꺼?”
“아이다. 얼굴이 고와서 글치 사내아다. 그나저나 야가 낯을 가려가꼬 손님만 오면 내 바지춤 부여잡고 뒤로 숨는데 오늘은 어짠일이고. 정수야, 형아가 좋나?”
“테비에 나온 형아다.”
“테비? 뭐라카노 야가.”
‘아, 텔레비전.’
영국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꼬마 아이를 향해 모자를 슬쩍 들어 보인다. 그러자 꼬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영국은 금세라도 소리칠 것 같은 꼬마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댄다. 인심을 지긋이 느낄 새도 없이 시장은 다시 관광객들의 발길로 복작해진다.
‘이야, 너무 많은데.’
영국은 취나물이 가득 담긴 봉다리를 양손 가득 들고는 걸음을 옮긴다. 본래 이렇게 많이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좌판에서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과거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으니.
하물며 만 원 몇 장으로 당신들의 저녁이 풍요로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행이 어디 있겠나. 더욱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나물이다.
“어?”
어머니의 점포 앞에 도착하자 영국은 의아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벌써 점포를 개장한 지 몇 년이 흘렀기에 손봐야 할 곳이 꽤 많았던 것 같은데. 간판 도색이 바래진 것은 물론이고 입구에 쳐져 있던 천막은 헤진 부분도 분명 있었더랬다.
헌데 오랜만에 찾은 점포는 마치 새것처럼 말끔하기만 하다.
‘어머니가 하신 건가?’
사람을 부르기라도 한 것일까. 영국은 걸음을 옮겨 점포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알 수 있었다. 점포를 말끔하게 수선해 준 사람을.
“아, 손님 죄송합니다. 지금 생선이 다 떨어져서 저녁 장사 일찍 끝났습니다.”
“명진 씨. 누가 왔어요?”
“손님이 오셨어요. 금방 다시 갈 테니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계세요. 잘못하다간 다쳐요.”
영국은 갑작스레 나타난 숯검댕이 남성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점포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점포 뒤편에서 중학생은 되었을까 싶은 소녀가 튀어나온다.
“아빠, 빨리! 지금 아줌마가 잠깐 돌렸는데 수도꼭지에서 물 터져서 이러다가 가게 홍수 나겠어!”
“아이쿠! 일 났네. 지수야, 손님한테 다시 한번 말씀드려라.”
“알았어! 빨리! 홍수 나겠다니까!”
얼굴에 숯검댕이 칠을 한 남성이 서둘러 점포 뒤편으로 향한다. 그리고 소녀가 영국의 앞으로 마주 선다.
“오빠야, 조금만 빨리 오지. 오늘 아침나절로 손님들이 하도 많이 들이닥쳐서 위판장에서 떼온 생선 전부 나갔는데. 오빠야도 어디서 소문 듣고 왔나 보네. 여기 아줌마 가게 활어가 씨알이 굵기로 유명하거든!”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님을 마주하는 태도가 한두 번 이렇게 장사를 대신한 것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생선 남은 게 없어서 팔 게 별로 없는데, 아니면 좋은 가게 소개시켜 드릴까? 여기 옆에도 점포 있는데!”
“양 씨 아지매 가게?”
“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처음 보는 이에게도 오빠라고 넙죽넙죽 말할 만큼 당찬 소녀다. 영국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모자를 벗어 보인다. 그제야 소녀, 지수의 눈이 크게 떠진다.
* * *
봄철 소녀처럼 어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떠올라 있다. 얼굴에 숯검댕이칠을한 아저씨 또한 마찬가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소녀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주시한다. 보다 못한 영국이 먼저 미소 지으며 운을 띄운다.
“안녕하세요, 장영국입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남항시장에서 반찬 가게 하고 있는 김명진이라고 합니다. 어머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쪽은 제 딸아이인 지수고요.”
“네가 지수구나?”
“어? 오빠 나 알아요?”
“알다마다. 어머니랑 한 번씩 통화하면 요즘 말벗해 주는 어린 친구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어머니가 그때 영국의 검은 봉다리를 보고는 묻는다.
“국아, 그게 다 뭐꼬? 그카고 연락도 없이 우얀일이고.”
“촬영도 끝났고 내일 학교도 휴강이라서 겸사겸사 드라마 마지막 회차는 어머니랑 같이 보려고 내려왔죠. 이건 찬거리 만드실 때 쓰시라고 제가 오는 길에 좌판에서 샀어요.”
“취나물을 이리 많이 샀나. 남항 사람들 전부 먹어도 될 정돈데.”
“아저씨네도 드리고 양 씨 아주머니네한테도 드리면 되죠. 그나저나 아들 내려왔는데 저녁도 안 해주실 거예요?”
“아이고, 내 정신이 없다.”
“장난이에요. 시간도 늦었는데 오랜만에 통닭이나 시켜 먹어요. 아저씨랑 지수도 같이 저녁 드시고 가실 거죠?”
김씨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입을 열지 못할 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오빠! 그러면 나는 드라마도 같이 보고 가도 되나? 집에서 보려고 하는데 아빠가 키 안 큰다고 맨날 일찍 자라고 하거든.”
서울에서 온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어색한 사투리다. 제 딴에도 어색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마저도 퍽 귀여워 보인다.
영국이 반찬 가게 김 씨 아저씨를 바로 보자 아저씨가 못 이기겠다는 듯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지수가 환호를 내지른다.
“그리고 사진 한번 찍어줄 수 있어요? 내일 학교 가서 애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김지수!”
“아빠, 왜!”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진 찍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러지 말고 내일 저녁에 올라갈 거니까. 학교 마치고 오빠가 직접 데리러 갈까?”
“진짜가!?”
“아, 영국 씨.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저씨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희 어머니랑 연배도 비슷하신데 계속 그렇게 존댓말 하시면 제가 더 불편해요.”
김씨 아저씨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점포의 조그마한 티비를 앞에 두고 다 함께 도란도란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다.
부끄러움이 가득하던 어머니의 얼굴도 어느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있다. 이따금 아저씨를 챙겨주는 모습이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하지 않았나.
‘이래서 어머니가 서울에 안 오시려고 한 건가.’
서울에 안 올라오신단 게 단순히 남항시장의 정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보다.
통닭으로 이루어진 저녁이지만 그 어느 진수성찬 부럽지 않다.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잠깐 부둣가 좀 구경하고 올게요.”
머리라도 식히고자 부둣가를 걷는다. 가로등 불빛에 옹기종기 생선을 뜯어 먹고 있던 고양이들이 영국의 그림자에 생선을 입에 물고 도망친다. 영국은 도망치는 고양이들을 향해 ‘다칠라, 천천히 뛰댕겨라’ 하며 웃는다.
‘아부지요. 어머니 너무 미워하지 마이소.’
첨벙이는 바닷물결이 영국의 속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잔잔히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