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Take Responsibility for the Welfare of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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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의 과보호로 인해 일거리가 엄청나게 줄어들자…… 나는 심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유치원에서도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한다는 평가를 들었던 나다.
언제나 바삐 움직이는 것이 체질에 맞았고, 당연했던 나에게는 하루에 6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생활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쉬는 것만으로도 가시방석 같고, 아이들이 보고 싶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시몬의 도움을 받아 회계 공부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부족하게 느껴졌다. 공부는 공부고 일은 일이니까 말이다.
‘으으으, 역시 일을 하고 싶은데. 뭐 할 일 없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쓰러졌을 때의 일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다시는 아프지 말라며 울던 자네트와 미하일.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녹턴과 그 밖에도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던 그 많은 사람들…….
‘그래, 이제 이런 습관은 고칠 때가 됐어.’
결국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워라밸도 중요한 법이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일까, 다행히도 나도 결국 휴식이 있는 삶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한편, 잠깐 쓰러졌던 탓에 잠시 손을 놓았던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물론, 녹턴의 광증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녹턴과 아이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려면 그의 광증은 꼭 치료해 주어야만 해.’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물론 그건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해.’
문득 내가 쓰러졌을 때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들었던,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던 그 목소리.
《그대는 그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제가 보낸 존재이니…….》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녹턴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보내진 존재라고?
그날 이후로 몇 번이나 되새겨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건 진짜 꿈이었을까? 난 정말 여신님을 만난 걸까? 아니면 단순한 백일몽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그 ‘여신님’이 나한테 말을 걸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였다. 유일신, 창조신이라는 여신이 그렇게 한가한 존재겠는가?
내가 무슨 성녀 아그네스도 아니고…….
‘그래, 그건 그냥 꿈이었을 거야.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내 뺨을 챱챱 쳐서 주의를 환기하곤 다시 녹턴의 광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모든 광증을 가진 가문은 성국에 멸문당했어. 마신을 숭배하고 소환한 죄로 말이지.’
하지만 블랙웰만은 달랐다. 모든 자료가 블랙웰은 마신과 연관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어쩌면…….
‘……광증을 가진 가문들의 마신 숭배죄 자체가 누명이었을지도 몰라.’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생각이었다.
물론 쉽게 믿을 수 없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발상이었다.
성국이 누명을 씌우다니?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가문들을 상대로!
성국은 성녀인 아이린이 적을 두고 있는 곳이었다. 미남도 없고 아침밥은 감자와 멀건 죽만 먹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나의 원작자로서의 직감은, 이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걸.’
그랬다. 그것이 아무리 말도 안 되고, 있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해도…….
블랙웰이 마신을 숭배하고 소환한다는 사실을 믿을 바에는 어쩐지 그쪽에 더 믿음이 실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좀 더 조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린과 페트로의 도움을 빌려 보고자 했지만, 두 사람의 대답은 같았다.
‘이것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성국의 기밀까지 파고들어야 해서, 제국에서 조사하기는 어려워요. 아무래도 성국으로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페트로는 영상구를 통해 그렇게 말했다. 아이린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제국에서 성국에 대해 파헤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성국으로 가는 수밖에는 없어.’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물론 성국행을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제국 수도에서 성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국의 드넓은 땅덩이를 가로질러야만 한다.
워프게이트를 몇 번이나 이용하더라도 편도로 2~3주는 족히 걸릴 거리였다.
‘더군다나 조사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라. 단단히 숨겨진 기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달은 걸린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
결국 오가는 시간과 성국에서 머무르는 기간까지 계산하면 최소한 반년은 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생각만 해도 막막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휴가를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녹턴과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지난번 녹턴이 반정을 준비하기 위해 한 달 출장을 떠났을 때에도 그렇게 못 견디게 보고 싶었는데.
한 달도 아닌 반년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그것도 이번엔 녹턴뿐만 아니라 아이들마저 떼어 놓고 가야 하는 것이다.
블랙웰의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듯, 나 역시 이미 그들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런 내가 그들 없이 반년이나 떨어져 지내야만 한다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이건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나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평생 함께일 테니까, 잠깐 떨어져 있는 것쯤은 괜찮아. 그래, 난 괜찮을 거야. 그들이 보고 싶은 만큼 더 열심히 조사해서 최대한 빨리 끝내는 거야.’
그렇게 결심한 나는 녹턴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무슨 일이지?”
녹턴은 업무 중이던 것이 뻔히 보였는데도 전혀 귀찮은 기색 없이 나를 맞이했다.
그런 점까지도 고맙고 미안해서 나는 괜히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맞은편에 앉았다.
“저, 녹턴. 다름이 아니라, 휴가를 신청하고 싶어서요.”
“시녀의 휴가 따윈 대공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런 건 안주인의 일이지.”
나는 아직 시녀일 뿐인데도, 벌써 반쯤은 안주인으로 대접해 주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요, 그게…… 제게 필요한 기간이 좀 길어서요.”
나의 평소와는 다른 태도 때문일까. 녹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그가 ‘진실을 보는 눈’으로 내 감정을 읽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라리아.”
그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정말이에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그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것뿐이니까.
“기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이 말을 하는 데는 꽤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나는 책상 아래로 손을 꽉 쥐고는 내뱉었다.
“반년이요.”
아마 녹턴은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그야 그럴 것이다. 여태까지 거의 휴일도 없이 일해 왔던 내가 갑자기 하루 이틀도 아닌 반년이나 휴가를 내겠다고 하다니.
“반년? 지금 반년이라고 했나?”
그는 드물게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서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몇 초 뒤에야, 그는 생각을 가다듬는 듯이 물었다.
“휴가를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반년 동안 뭘 하려고 그러는 거지? 대공비가 되기 위한 공부라도 하려고 하나? 아니면, 혼인 전에 친가에 다녀오기라도?”
‘휴가를 내도 내가 대공저나 백작저에서 지낼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차라리 그렇다면 나도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도에서 지낸다면 그와 아이들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무거운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성국에 다녀오려고 해요.”
“성국? 갑자기 성국에는 왜?”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일하다가 갑자기 반년이나 휴가를 내서 외국에 다녀오겠다고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닐 테니까.
그것도 하루도 떨어지기 싫은 애인을 수도에 둔 채 말이다.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대답을 꺼냈다.
“으음……. 저, 저는 어릴 때부터 소원이 있었어요. 꼭 성국으로 여행을 한번 다녀오는 게 꿈이었거든요.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결혼을 하고 나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기는 어렵잖아요. 제가 원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결혼을 하게 되어 버려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말하다 보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궁색한 이유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녹턴과 혼인하기 전 꼭 다녀오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가까스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녹턴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 근사했지만,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이 그의 근심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졌다.
“……네가 성국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여신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던 게 아니었나?”
‘뜨끔.’
성국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국가라서 여신교와 관련된 건축물과 성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성녀 아그네스도 모르던 내가 성국에 가고 싶어 하다니 의아해 보이긴 할 거다.
“아…… 하하. 여, 여신교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그 분위기는 좋아해서요. 그 특유의 신성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그 느낌 있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변명을 하며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옆얼굴로 자꾸만 따라붙는 그의 시선에 나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에 침을 꼴딱 삼킨 그 순간.
“허락을 하고 말 것도 없지.”
그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넌 곧 블랙웰의 안주인이 될 여자다, 라리아. 네가 휴가를 갖는 건 네 자유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까지 쉽게 허락해 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녹턴이 까칠한 척 다정하다고 해도, 나 혼자 반년이나 여행을 가겠다는 말에는 반대하거나 나를 설득하려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녹턴은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행을 가는 것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그건 네 의지니까. 난 네 의사를 구속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녹턴……!”
나는 너무 감동해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단.”
하나 그 감동은 다음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유지됐다.
“그 여행에는 나도 같이 간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하지만 녹턴의 놀라운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집에 애들만 둘 수는 없으니 자네트와 미하일도 같이 간다.”
“네에! 뭐라고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집에 애들만 둘 수는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당신은 왜 따라오는데?!’
너무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몇 초 동안 말문이 막혔다. 간신히 말할 내용을 정리한 나는 이렇게 항변했다.
“하, 하, 하지만……. 녹턴은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셔도 괜찮아요? 한두 주도 아니고 무려 반년인걸요!”
“상관없다. 급한 일은 전부 일찍 처리해 놓았고, 중요한 일은 가져가서 하면 되니까.”
녹턴은 단호하다 못해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최근 성국과 담판을 지어야 하는 것도 있었던 참이다. 마침 잘된 일이지.”
“하, 하지만……! 일하시기 불편해지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 일부러 저 때문에 반년이나 자리를 비우면서 성국까지 가실 필요는 없는걸요?”
“이상하군. 나와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싫은가?”
그가 미심쩍다는 듯 검고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당황스러움으로 가슴이 울렁였다.
아니, 싫을 리가. 안 그래도 한 달 떨어지는 것도 너무 아쉽고 쓸쓸했는데, 반년이나 그와 떨어져 있는 건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던 차였다.
그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나도 엄청나게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거랑은 별개로……. 그저 많고 많은 귀족 영애 중 한 명인 나와 달리, 그는 너무나 중요하고, 모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블랙웰 대공’이라는 이름이 짊어진 것은 그저 그 하나, 가족 몇 명뿐이 아니니까. 그의 손끝에서 대공령과 제국이 걸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 하나만을 보고 성국까지 따라오기에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그건 아니지만…… 저 때문에 번거로워지시는 게 죄송하니까……. 이게 중요한 일도 아닌데…….”
내가 주저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그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다음 순간, 작은 온기가 턱에 와 닿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턱을 가볍게 쥐고 시선이 완전히 맞을 때까지 들어 올렸다.
“라리아.”
시선과 시선이 겹치자, 나는 놀라서 딸꾹질을 할 뻔한 걸 가까스로 삼켰다. 그는 믿을 수 없도록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너와 관련된 일 만큼 중요한 것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의 보라색 시선은 너무나도 올곧게 나만을 담고 있었다.
마치, 대공령도 제국도…… 그의 손끝에 걸린 모든 것들조차.
그 전부가 ‘나 하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미치겠네. 이 인간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심장에 안 좋았다. 내 건강을 걱정한다더니 그건 다 거짓말이었나 보다.
‘솔직하지 못한 검은 고양이 주제에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나는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죄다 얼굴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은 물론이고 손끝의 맥박까지 미친 듯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모…… 몰라요. 저, 정 그러시다면…… 알아서 하세요. 전 이제 모르니까요.”
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입술 위로 잠깐 머무르는 그의 시선 역시도 느껴졌다.
쪽. 귓가를 간질이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입술 위에서 보드랍고 짜릿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그럼 결정된 걸로.”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배부르게 식사를 한 맹수의 만족스런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듯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야말로 맹수의 입 앞에 놓여서 벌벌 떠는 작은 동물이 된 기분이다.
‘분명 성국에서도 이러겠지?’
이제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성국에서의 반년 동안은 또 어떻게 그의 심장 공격을 막아 낸담?
그렇게 나의 성국행은 어쩌다 보니 블랙웰 가족 여행이 되어버렸다.
그걸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 한 명이 아니라 블랙웰 대공과 대공가의 공녀, 공자까지 행차하려면 그를 수행하는 하인과 하녀만 최소 60명은 필요했다.
심지어 이건 호위 기사와 요리사, 미용사와 의사 등을 제외한 기타 기능인들은 전부 제외한 숫자다.
원래라면 여행을 준비하는 것도 전부 시몬의 일이긴 했지만, 순전히 내 사정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보니 미안해서라도 여행을 준비하는 일은 내가 반 이상 분담했다.
‘모르긴 몰라도 녹턴도 아주 바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은 별거 아닌 것처럼 했지만, 대공이 반년이나 자리를 비우는 게 쉬운 일이겠어?’
물론 사정을 모르는 애들은 아주 신이 났다.
“여행 가끄야! 막대기에 보따리 달고!”
“메리! 가방에 꽈자 마~ 니 너어조!”
“네, 네.”
자네트와 미하일은 이것이 인생 첫 여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둘 다 매우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성국은 대신전 말고는 볼 것도 없을 텐데, 어쩐다. 실망하지 말아야 할 텐데.’
어쨌든 한껏 들떠 있는 아이들이 귀여워서 나는 두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곤 말했다.
“우리 공녀님, 공자님. 여행이 많이 기대되세요?”
“웅!”
자네트와 미하일은 시시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색, 초록색 눈 두 쌍은 벌써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뽀뽀를 한 번씩 해 주고는 말했다.
“우리 공녀님, 공자님이 여행을 이렇게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성국에 다녀오고 나면 다른 곳들도 가 봐야겠는걸요. 카스티야 왕국에도 가고, 밀라노에도 가고. 아! 황금빛 해변이 아름답다는 벨로나 해변도 꼭 가야겠어요.”
“히히, 쪼아!”
“라리아도 가치 가는 거지?”
물론 아이들만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돌아서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이서만 다녀오시면 어때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두 아이의 눈이 놀랄 정도로 동그래졌다.
풀 죽은 기색의 미하일이 말했다.
“그럼…… 난 시러. 라리아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마자. 라리아 안 가면 재미 업써.”
자네트도 입을 삐죽이며 맞장구쳤다.
나는 의외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여행을 이렇게 좋아하는 아이들이니 내가 안 가도 당연히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요? 무서우셔서 그러세요? 하녀들이랑, 기사들도 같이 갈 건데.”
“그래두 씨러.”
성국과 카스티야 왕국, 벨로나 해변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해도 신이 나서 반짝반짝하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양 완전히 시큰둥했다.
‘그곳들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유명한 관광지인 벨로나 해변에 대해 설명했다.
“벨로나 해변은 정말 대단하대요.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간 사람은 없다고 하던걸요. 생각해 보세요. 황금색 모래사장과 뜨거운 햇볕. 새파란 바다와 야자수……. 게다가 핑크색 돌고래도 산다는 걸요. 너무 예쁠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미하일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빠는 데 여념이 없었고, 자네트는…….
“씨러어! 라리아 업스면 안 가!”
부루퉁한 얼굴로 소리치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폭 하고 묻어버렸다.
“씨이, 가기 시른데 왜 자꾸 가라구 해!”
“라리아랑 여행 가는 게 조아.”
자네트가 씨근거리자, 미하일이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이렇게 말했다.
“라리아 업시는…… 시러.”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아이들은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와’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쑥스럽지만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꽉 안아 주고 말았다.
“아유, 우리 공녀님, 공자님! 이렇게 귀여워서 어쩜 좋아요?”
“우아앙! 숨 막혀!”
나는 그들을 꽉 안은 채 이마와 입술, 보드라운 볼살 위까지 마구마구 입술 도장을 찍어 주고서야 두 아이를 놓아주었다.
한편, 블랙웰 외에도 내가 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이린과 셔우드의 가족들이었다.
성국으로의 여행이 확정되자마자 나는 아이린을 찾아갔다. 나는 아이린에게 성국에 조사를 하러 가게 되었으며, 녹턴의 제안으로 블랙웰의 사람들까지 전부 함께 가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아이린을 두고 먼 곳으로 떠나게 되어서 미안해요. 아이린 혼자 외롭거나 힘들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블랙웰 대공저에 말해 둘 테니, 행여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무엇이든 대공저의 사람들에게 부탁하셔요. 분명 아이린을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예요.”
성국행은 피치 못한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내심 아이린에게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제국에서 아는 사람, 기댈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어쩐지 그녀를 혼자 두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내 사과에 아이린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라리아가 왜 미안하다고 해요?”
“음, 아이린을 제국에 혼자 두게 되었으니까요? 아이린이 외로울지도 모르는데…….”
내 대답에도 아이린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더더욱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라리아도 꼭 필요해서 가는 거잖아요?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대공님을 위해서요!”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꼭 쥐며 말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라리아의 잘못이 아닌걸요!”
아이린이 내 손을 쥔 채 활짝 웃자, 나는 다시 한번 감동의 도가니탕에서 헤엄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하나뿐인 친구가 혼자 두고 떠나 버리면 원망스러울 만도 한데, 어떻게 이토록 마음이 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내 감동을 깬 것은 아이린이 다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저도 같이 갈 건데요, 뭘!”
“……네? 뭐라고요?!”
금시초문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하지만 아이린은 놀란 내 마음 따윈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한 해맑은 얼굴로 헤헤 웃을 뿐이었다.
“사실은, 라리아 덕분에 제국 구경도 할 만큼 한 것 같고, 이제 더는 보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런 참에 라리아까지 성국에 간다고 하니 제가 혼자 제국에 더 있어 봤자 뭘 하겠어요?”
“그…… 그런 이유로 돌아가시겠다고요? 레온하르트 기념제는요?”
“기념제는 아직 4달이나 남았는걸요! 여기 있는 동안 제 부족함을 깨닫기도 해서, 성국으로 돌아가서 좀 더 공부를 하고 돌아와 공식 일정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말문을 잃고 아이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러는 동안 아이린은 신이 난 듯 내 손을 좌우로 흔들며 종알거렸다.
“함께 성국에 가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쵸? 라리아가 제국 구경을 시켜 주셨듯이 이번엔 제가 성국 구경을 시켜 드릴게요. 성국에는 별달리 볼만한 건 없지만요! 아, 공자님과 공녀님도 가신다고 하셨으니 함께 놀 수도 있겠네요! 분명 즐거울 거예요.”
진심으로 신이 난 듯 재잘거리며 떠들어 대는 아이린을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하긴, 아이린도 성인이고 그녀가 직접 선택한 일이니 내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린도 자신의 능력이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모양이었다. 아마 지난번 선황제 반정 사건 때에 잠시나마 궁정 마법사들에게 무력하게 붙잡혔던 사건이 그녀에게도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린이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어쩐지 자식의 성장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그녀는 나의 여주인공이고, 어떻게 보면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니까 말이다.
한없이 해맑고 순수하기만 하고 세상 물정 모르던 아이린이 부쩍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괜히 아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친구로서 응원해 주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곤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함께 성국으로 가요.”
“꺄아! 너무 좋아요!”
아이린은 즐거운 듯 환성을 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반응은 무척이나 고맙고도 기뻤다.
이렇게 해서 성국행의 동행이 한 명 늘어나나 싶었으나…… 심지어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셔우드 백작가에도 성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반년이나 되는 긴 여행이다 보니 셔우드의 가족들은 나를 무척 걱정했다.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블랙웰의 사람들과 함께 가는 여행이니까 안전하다면서 말이다.
한데 그런 와중에 편지가 왔다. 바로 동생 아돌프로부터 온 편지였다.
아돌프는 자신도 성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 노먼 오라버니는 각자의 일로 바빠서 성국에 따라갈 수 없지만 자신은 괜찮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검술 실력이라면 내 호위에도 도움이 될 거라나 뭐라나.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아돌프가 곁에 있어 준다면 분명 든든하긴 하겠지만…….’
하지만 아이린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일단 아이린은 성인이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아돌프는 아직 10대의 어린아이니까.
‘가족들에게는 안심시키려고 안전할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일은 꽤 위험할지도 몰라. 성국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이니까.’
아돌프가 아무리 대단한 검술의 실력자라고 해도 어른인 내가 동생을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돌프에게 널 데려가는 건 곤란하다는 내용의 답장을 써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날은 다가왔다.
대공저에 있던 사용인들은 거의 반으로 나뉘었다. 성국행에 따라오며 우리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대공저에 남아 저택을 지키는 사람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셔우드 영애.”
시몬을 비롯한 저택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홀에 도열해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즐거운 시간 되시고, 건강히 돌아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즐거운 여행과 무사 귀환을 비는 모습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빠— 빠이!”
“안녀엉.”
내 치마폭에 매달린 자네트와 미하일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몸 크기에 맞는 아주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
녹턴은 여전히 무뚝뚝하게도, 아무런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모두 잘 지내요! 반년 뒤에 다시 만나요.”
마지막으로 내가 인사했고, 우리 네 사람과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줄줄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대공저의 현관에는 대문까지 닿을 정도로 수많은 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모두 한 마차에 탔다. 아이린은 다른 마차에 타고 우리를 따라올 예정이었다.
길고 지난한 여정일 것이 분명했지만, 그 시간조차 분명 즐거우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마차를 타고, 워프 게이트도 몇 번이나 타면서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공녀님, 공자님. 힘들지는 않으세요?”
여행의 도중에도 나는 아이들을 살폈다. 길고 험난한 길인 데다가, 아이들은 이것이 첫 여행이니만큼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웅!”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은 정말로 쌩쌩해 보였다. 그들은 가끔은 지루해하기는 했지만 고된 여행을 잘 견뎌 주었다.
‘역시 블랙웰의 피를 이어서 그런 걸까? 어른보다도 더 튼튼한 것 같은걸.’
그간 건강과 휴식을 잘 챙긴 덕택일까, 나 역시도 생각 외로 견딜 만하게 느껴졌다.
물론 녹턴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렇게 하여, 마차 멀미를 하는 아이린만 빼고 다들 그리 힘들이지 않고 성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국은 입국 절차가 아주 복잡하고 문턱이 높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녹턴이 사전에 준비를 한 데다가 성녀의 보증까지 있었으니 거의 도착과 동시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모두 무사히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네요!”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녹턴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진짜 문제는 도착한 뒤였다는 것을!
우리가 성국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린은 대신전에서, 우리는 미리 준비한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러분이 성국에 입국하셨다고 대신관님께 보고를 드렸으니 곧 기별이 올 거예요. 대신전에서 여러분을 맞이할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두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에헤헤, 뭘요. 여러분은 제 친구이고, 아주 귀한 손님인걸요.”
아이린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국의 실세라는 블랙웰 대공이 직접 왔으니……. 이것도 일종의 외교 행사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대신전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는 말에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이린이 대신전에서 아침 식사는 언제나 풀죽과 삶은 감자만 나온다고 했는데, 저녁도 비슷하면 어떻게 하지? 나야 괜찮지만, 우리 자네트와 미하일은 입맛이 까다로운데.’
자네트와 미하일은 아주 귀한 음식만 먹고 자란 탓일까, 반찬 투정이 심했다.
하지만 외교 행사에 준할 오늘의 저녁 식사 초대에서까지 반찬 투정을 하면 꽤나 결례일 것이었다. 나는 오늘만큼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나, 대신전 갈래!”
“소풍 가자, 라리아!”
드디어 놀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신이 났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왔는데 지치지도 않는지 자네트와 미하일은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면서 나가서 놀자고 떼를 부렸다.
‘이를 어쩐다. 오늘은 쉬고 싶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잠깐 고민하던 찰나였다.
단단한 팔뚝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녹턴이었다.
“오랜 여행이었으니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며 여독을 풀도록 하지.”
그가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내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어쩐지 그 그림자만 봐도 든든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살풋 웃어 버렸다.
하지만 녹턴의 말에 아이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마안…….”
자네트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애들이 녹턴에게 말대꾸도 하다니, 사이가 정말 많이 좋아지긴 했네.’
원래도 나쁘지 않은 관계였지만, 두 주 동안 넷이서 마차에 갇혀 있었더니 아이들은 녹턴에게 훨씬 익숙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녹턴이 전혀 무섭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쉰다고 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색은 차분히 가라 앉아있으면서도 마치 벽돌로 쌓은 벽처럼 단단해 보여서,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자네트도 한 고집 하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그의 위압감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 경험들로 그가 이렇게 나오면 정말 아무리 떼를 써도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우우. 아랏써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녹턴은 그런 자네트를 물끄러미 보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녹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 설마……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건가?’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가 그렇게 유치할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또 이제껏 그가 보여 줬던 것들 (예를 들어 내가 하는 칭찬을 무척 좋아하던 것 같은 언행들)을 보면 또 약간 그럴싸한 것 같기도 했다.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키가 정말 커서 뺨에 입을 맞추려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뽀뽀를 한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 감사해요, 녹턴! 어떻게 그렇게 꼭 제가 원하던 걸 해 주실 수가 있으세요? 녹턴은 정말 배려심이 깊고 세심한 남자라니까요. 최고예요, 최고!”
녹턴의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해도 예의 그 냉철한 얼굴 그대로였다.
다만 귀가 조금 분홍색이 되었고, 볼 근육이 씰룩일 뿐이었다.
“별거 아니다.”
잘게 떨리는 볼 근육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귀는 분홍색이었다.
뭐,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나 역시 기뻤다. 그의 그런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런데…….
‘왜 이렇게 애가 셋인 듯한 기분이 들지……?’
어쨌든 요기를 끝냈으니 대신전에서의 석찬 전까지는 푹 쉬기 위해 일단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별꾼인 듯한 남자가 우리를 붙잡았다.
“혹시 라리아 셔우드 백작 영애 되십니까?”
나는 당연히 대신전에서 보낸 정식 초대장을 가져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다기엔 뭔가 이상했다. 일단 대신전에서 온 정식 초대장이라면 내 이름이 아닌 녹턴의 이름을 먼저 불러야만 했다. 그가 나보다 훨씬 중요한 인사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기별꾼은 내 이름만을 불렀을뿐더러, 결정적으로…….
얼굴이 창백한 데다가,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 딱 봐도 평범한 저녁 식사 초대장을 가져온 사람의 기색은 아니어 보였다.
“그렇다만.”
내 어깨를 감싸 쥔 채 녹턴이 대신 대답했다. 기별꾼은 깊이 허리를 숙인 뒤 나 대신 녹턴에게 설명했다.
“백작 영애의 동생분인 아돌프 셔우드 백작영식이 영애를 급히 찾으신답니다.”
“네? 아돌프가요? 제국에서요?”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국에서 성국에 있는 나를 부를 정도면 아주 심각한 상황인 걸까? 어디 아프거나 다친 건 아닐까?’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기별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아, 아니요. 그게…… 백작 영식께서는 성국에 계십니다. 그것도 성국 입구에…….”
“네에?”
그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한달음에 성국의 입구로 달려갔다.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에서는 아돌프가 입국심사관들과 싸우고 있었다.
“입국허가서를 가져왔는데 대체 왜 못 들어간다는 거야!”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 허가서는 양식이 잘못되었다고요.”
신관의 하얀 로브를 입은 심사관들은 서류들의 이곳저곳에 손가락을 짚었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인가받지 않은 곳에서 서류를 발급받으신 모양인데요.”
“무슨 소리야! 엄청 비싼 돈 주고 받은 서류인데……. 내가 그동안 모은 용돈을 다 털었단 말이야. 내가 사기라도 당했다는 거야 뭐야?!”
“유감스럽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게 보입니다, 영식.”
외알 안경을 낀 심사관이 냉정하게 말했다.
“어쨌든 이 서류로는 성국에 입국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뭣? 이, 이게…… 뭐가 어쩌고 어째!”
그리고 아돌프는 분노와 당혹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불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아돌프가 제 화를 못 이기고 입국심사관의 멱살을 잡았다가 신성모독죄로 감옥에 갇히기 전에 내가 뭔가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섰다.
“아돌프!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누, 누님!”
아돌프는 나를 보더니 언제 화를 냈냐는 양 두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누님! 난 분명 입국심사서를 가져왔는데, 이 자식들이 날 안 들여보내 준다는 거야! 이게 말이나 돼?”
그가 한껏 불쌍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뭔가의 데자뷔를 느꼈다.
‘기분 탓인가? 왠지 아돌프와 함께 이런 일이 있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치워 버리곤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니, 그 전에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넌 수도의 집에 있어야 하잖아?”
“어, 그. 그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돌프가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아돌프, 설마…… 날 따라온 거야? 내가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게다가 미행은 나쁜 짓이라고도 했었지?”
아돌프는 이곳에서 만난 뒤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누, 누님 따라온 거 아니야! 그게…… 그, 그냥. 나도 성국에 가고 싶어서…… 한번 와 본 거야.”
“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돌프는 제 발 저린 얼굴로 변명했다.
“아, 왜? 나, 나도 여행 좀 갈 수도 있지! 나, 나도 어릴 때부터 성국에는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단 말야.”
‘그렇다기엔 성국은 아돌프 같은 10대 소년이 오기엔 결코 재미있는 곳이 아닐 텐데…….’
성국은 놀 곳도, 볼 곳도 없는 무척이나 지루한 곳이니까 말이다.
역시 여러모로 의심스러웠다.
더군다나 아돌프는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다. 본인이 제일 검술 천재이니 호위 기사는 필요 없다 치더라도,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애가 하인 한 명 없이 맨몸으로 여행을 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더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 그렇다니까. 누님이랑 여행지가 겹친 건 그냥 우연이야, 우연!”
“그것도 하필 내가 성국에 온 지금 말이지.”
“으윽…….”
나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엄한 눈으로 아돌프를 보았다.
“아돌프, 난 네가 내 말 안 듣고 따라온 것도 싫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더욱 싫어해. 이제 그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솔직하게 말하면, 화 안 낼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내 엄한 태도에 아돌프는 결국 뒤통수를 긁적이다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게, 사실은…….”
그의 말에 따르면, 아돌프는 내가 성국으로 오랜 시간 여행을 간다는 것이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꼭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미 나의 거절 편지를 받아 버렸으니 집안에 허락을 받을 수도 없고. 그래서 그동안 모았던 용돈을 털어서 사설 업체에서 입국허가서를 발급받은 뒤 몰래 가출해서 우리를 쫓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기별꾼에게 들은 내용과 아까 여기 와서 본 풍경으로 예상한 그대로였다. 나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대체 왜 걱정이 돼? 블랙웰의 수많은 기사들은 물론이고, 녹턴까지 같이 가는데.”
하지만 아돌프는 정말로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누님한테 제일 위험한 건 저 대공이라고!”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돌프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어리다고 모를 줄 알아? 대공이 가끔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누님이 그런 위험한 놈이랑 같이 사는 것도 싫지만, 그건 누님이 저놈이 좋아 죽겠다니 어쩔 수 없다 쳐. 그나마 같은 동네에 있을 때는 좀 낫지만 같이 멀리 가 버렸다가 대공이 머리가 돌면 어떻게 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히 제국에 있다가 뒤늦게 누님이 어떻게 됐다는 소식만 들어야 하잖아.”
거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말한 아돌프는 붉어진 얼굴로 씨근거렸다.
나는 놀란 얼굴로 말없이 아돌프를 빤히 보았다.
‘얘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만약 성국에서 녹턴이 광증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었다.
블랙웰 기사단 중 절반 이상이 우리를 호위하러 따라오긴 했지만, 그는 광기에 빠진 상황에서 단신으로 기사단을 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사실 그건 아돌프 역시 마찬가지긴 하지만…….’
블랙웰 기사단에도 소드 마스터는 있는데, 녹턴은 단신으로 그 소드 마스터까지 물리칠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아돌프 혼자 광증에 빠진 녹턴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이 그런 것까지 따져서 걱정하는 건 아니니까.’
아돌프는 그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내가 녹턴에 의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고마워서, 나는 푸스스 웃었다.
“네가 그런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니…… 몰랐어. 고마워, 아돌프. 철없는 어린앤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이 깊구나?”
“어린애라니! ……아, 알면 됐어.”
아돌프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래도 넌 제국으로 돌아가.”
“뭐?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아돌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전에 했던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가 정말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성국에서 그를 데리고 다니기엔 내가 앞으로 할 일이 위험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 허락도 안 받고 온 거잖아. 말도 없이 가출을 하다니, 부모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마…… 말은 했거든! 편지 남기고 왔단 말야.”
“그래도 가출은 가출이지.”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아돌프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치면 누님은? 누님도 가출했었잖아!”
아차. 그건 그렇다. 나는 편지 한 통 남기지 않고 가출해서 심지어 약혼까지 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좀 억지가 되더라도 버텨 보기로 했다.
“난 성인이고 넌 미성년자잖니.”
“뭐어? 그런 게 어딨어? 누님은 나랑 여행하는 거 싫어?”
아돌프가 울상을 지었다. 이런, 난 어린애한테 약한데…….
“아니! 그럴 리가 있겠니. 나도 물론 너 있음 좋지.”
이렇게 멀리까지 따라와 준 수고를 봐서라도 매정하게 내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달래 주려 애썼다.
“하지만, 입국허가서를 잘못 발급받았다고 하지 않았니? 난 정말 너도 같이 여행했으면 싶지만, 어쩌겠어. 허가서 없이는 입국을 못 한다잖아.”
“으윽……. 우씨, 그 망할 자식들……! 돌아가면 진짜 다 아작을 내버려야지.”
아돌프가 입국허가서를 내준 사람들에게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렴. 응? 난 정말 괜찮을 거야. 정 그럼 나도 최대한 빨리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테니까.”
“……그럼 나 제국에 돌아갔다가 입국허가서만 다시 발급받아서 오면 안 돼?”
“왕복하는 데만 한 달이나 걸리는데? 그건 너무 힘들지 않겠어?”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 아, 씨이. 흥신소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아돌프라고 해도 한 달씩이나 마차 여행이라니,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막상 돌아가서 편안한 집에 도착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가족들에게도 그가 집에 있게 설득해 달라고 하고.’
그렇게 생각한 내가, 다시 한번 돌아가라고 하려던 찰나…….
“라리아! 여기 있었군요!”
이 상황에 맞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아이린.”
입국심사관들이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녀를 친근하게 부르며 인사했다. 심사관들은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성녀님을 속명으로 부르다니, 무엄합니다!”
그들 중 제일 높아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아이린을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아. 아, 대공님! 공녀님, 공자님도 여기 계셨네요.”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아는 척을 하던 아이린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아돌프였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아이린. 이쪽은 제 동생 아돌프 셔우드예요. 아돌프, 이쪽은 아이린 성녀님이셔. 몇 달 전에 선임되셨지.”
“아하, 라리아의 동생분! 얘긴 많이 들었어요. 정말 반가워요!”
“성…… 녀님? 정말 그 성녀님? 책에서만 보던? 으아아…….”
아이린이 팔랑거리며 성국의 예법으로 인사했다. 아돌프는 그 성녀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다가 뻣뻣하게 인사했다.
아이린은 그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동생분이셨구나~! 어쩐지, 라리아랑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아…… 하하. 아이린, 저흰 피 안 섞인 남매예요.”
“어.”
물러나 있던 녹턴은 아이린이 난입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무슨 얘기를 하느라 이렇게 길어지는 거지?”
그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이린과 녹턴에게 아돌프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녹턴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 그에게서 날 지키러 왔다는 부분만 빼고 말이다.
“……그래서 아돌프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해요. 입국허가서가 없으면 입국할 수 없다고 하니까요.”
내 설명은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내 설명이 끝나자마자 아이린이 들뜬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저, 셔우드 영식이 입국할 수 있도록 해 드릴 수 있어요.”
“네? 정말요?”
“네! 성국 법상 입국할 때는 2급 이상 고위신관의 추천서가 있으면 입국허가서가 면제되거든요. 물론 저도 포함돼요!”
그야 그럴 것이다. 성녀는 명분상 성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난 골치가 아파졌다.
‘그걸 생각을 못 했네.’
나는 아돌프를 돌려보내고 싶은 입장이니까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아돌프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저, 정말요? 제, 제가 입국할 수 있게 성녀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죠! 라리아의 동생분이신걸요.”
“야호! 감사해요, 성녀님!”
아돌프는 어찌나 기쁜지 폴짝폴짝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는 달뜬 얼굴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그가 돌아와 물었다.
“누님! 나 이제 여기 있어도 되는 거지? 성녀님도 들여보내 주신다잖아!”
아이린도 거들었다.
“연인에, 가족까지 함께하는 성국 여행이라니! 최고로 낭만적이에요! 어쩜, 너무 즐거우시겠어요!”
즐거워 보이는 두 사람에게 더 이상 매정하게 굴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를 돌려보내기 위한 변명도 떨어진 참이었다.
나는 결국 ‘아돌프를 돌려보내겠다’는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돌프는 자네트와 미하일과 함께 있도록 하면서 절대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집으로 편지를 보내서 허락을 구하도록 해.”
“응! 당연하지, 나한테 맡겨!”
아돌프는 여전히 하늘까지 날아오를 정도로 들뜬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은 대신전으로 향했다. 아이린이 약속했던 ‘손님 대접’을 위해서였다.
아이린은 ‘단순한 손님 대접’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건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 성국 측과 블랙웰 대공의 외교행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행여나 실례가 될 만한 언행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도달하게 된 대신전이란…….
대신전의 건물은 담과 외벽, 지붕까지. 문을 제외한 부분은 전부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문과 정원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은 금빛으로 번쩍였다.
‘이거, 설마 진짜 금일까?’
문지기들이 열어주는 대문을 보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이, 설마 진짜 금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성국인데, 그런 사치스러운 짓을 하겠어? 아마 금과 비슷해 보이는 다른 금속일 거야.’
“진짜 금일 거다.”
“네에?”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믿음과 육신과 영혼을 바치라, 그러면 그대는 문과 길이 금으로 된 여신의 천국에 도달하게 될지니.’”
녹턴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에일리아교 성서의 한 구절이다. 대신전의 건축양식은 이 구절을 충실히 재현해 둔 것 같군.”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진짜 다 금이란 말이야!’
하지만, 주변을 보니 놀란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대신전의 모습을 어릴 적부터 항상 보아 왔을 아이린은 물론이고, 녹턴과 자네트, 미하일 역시 너무나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사치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나마 아돌프 정도가 주변을 신기해하면서 둘러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나만큼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역시 블랙웰 대공가와 셔우드 백작가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니.’
결국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밖에는 없었다.
우리는 신관들의 안내에 따라 대신전의 중앙 홀로 인도되었다. 그곳은 대단히 많은 인파와 생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미 석찬의 준비가 완료된 것만 같았다.
7~80명도 족히 앉을 수 있을 정도 규모인 디귿 자 형태의 테이블 최상석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라리아! 대공님!”
아이린이 반가운 듯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고 녹턴은 고개를 까딱여 묵례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낯선 얼굴 역시 있었다.
“제국의 블랙웰 대공과 그 약혼녀를 환영합니다. 두 분의 앞날에 여신님의 가호가 영원히 함께하기를. 저는 대신관, 레마르크입니다. 편히 불러 주십시오.”
그는 예순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도 풍채가 놀랄 정도로 좋고 인물이 훤했다. 머리와 수염은 거의 하얗게 새어있었지만, 드문드문 남아 있는 붉은 털이 그가 원래는 적발이었음을 짐작게 했다.
대신관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제까지 원작의 내용은 전부 제국에서만 전개되었으니까.
고로 나는 그에 대해 잘 몰랐다.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묘한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나는 대신관이 영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일종의 원작자로서의 직감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난 성국이 수상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성국에 뭔가 문제가 있다면 그 중심에는 대신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그런 생각을 하며 대신관을 보던 나는 문득 옆에 있던 녹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나는 녹턴의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대신관이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보이건 간에 그것은 대신관이라는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녹턴의 표정으로 그가 보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고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감정을 읽어 내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이따가 석찬이 끝나면 녹턴에게 대신관이 어떻게 보였냐고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성녀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귀하신 분들께서 성국에 와 주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자택처럼 편안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저도요. 오늘의 자리는 거의 대신관님께서 준비하셨지만 제가 대접해 드리는 것이기도 하니까, 편히 계시다 가세요!”
우리는 대신관과 아이린의 환대와 함께 인사를 나누고 상석에 앉았다.
곧 만찬의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하나하나 차려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풀죽과 감자만 나올까 봐 걱정했던 것 같은데 그건 기우였음이 곧 밝혀졌다. 요리는 종교 기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하긴, 일종의 외교 행사인 셈이고 상대가 상대니까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하지만…… 단순히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 대륙인들의 정신적 고향 같은 곳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도시국가에 불과한 성국에서 이만한 규모의 만찬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차례차례 나온 요리 중에는 ‘제비집 요리’, ‘상어 지느러미 스프’, ‘악어 고기’, ‘타조의 눈알’ 등 식사와 영양의 섭취보다는 과시에 좀 더 치중된 것들이 많았다.
‘아무리 외교 행사라지만…… 보통 종교 기관에서 이런 요리도 준비하나?’
나는 비스크 스프 위에 동동 떠 있는 상어 지느러미를 포크로 찍으며 생각했다.
입에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씹어 보았지만, 특출나게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과시를 위한 요리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요리뿐만이 아니었다.
“귀하신 외객분들께서 식사하시는데 무료하실까 싶어 간단한 즐길 거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 반투명한 너울을 걸친 무희들이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성가대도 아니고 무희? 아니, 무용이 성가보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 기관과 화려한 옷을 입은 무희라니!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상상도 못 한 조합이었다.
어찌 됐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내 감상은 이것이었다.
‘아이린은 매일 아침마다 죽과 감자만 먹었다기에 굉장히 검소한 곳일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네.’
대륙의 정신적 중심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지, 아니면 종교 기관치고는 사치스럽다고 해야 할지. 다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찬을 마친 뒤, 녹턴은 대신관과 단둘이 별실에서 담화를 나누러 갔다. 아마 외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모양인 것 같았다.
그동안 나와 아이들은 차를 대접받았다. 아이린이 차를 마시는 우리에게 물었다.
“만찬은 만족스러우셨나요? 마음에 들으셨어야 할 텐데요!”
“물론이죠.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에헤헤, 라리아는 제게 제일 중요한 손님인걸요! 꼭 한번 제대로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아이린이 혀를 빼물며 웃었다. 나는 은근슬쩍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놀랄 정도로 정성껏 환대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성국의 손님 대접은 원래 늘 이런가요?”
“그럼요! 손님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저희의 지론이랍니다.”
솔직히 말해 이만한 예산을 가지고 있다면 아침 식사를 좀 더 영양가 있는 식단으로 보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차마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나는 외부인이고, 쓸데없는 참견이니까.
녹턴과 대신관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과언이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리라.
우리는 성대히 대접해준 대신전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먼저 방으로 보낸 뒤 나는 녹턴에게 물었다.
“저, 녹턴. 오늘 본 대신관이라는 사람, 녹턴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녹턴은 특유의 자색 눈빛으로 날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불만스럽게 가늘어졌다.
“겨우 단둘이 되자마자 입에 담는 것이 나 외의 다른 남자인가?”
“네, 네에?”
정말이지 뜻밖의 말에 나는 놀라 입을 벌렸다.
하긴 생각해 보니 요즘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다. 이제 갓 성국에 입국했고, 이동 중에는 내내 아이들과 함께 있었으니까.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나 역시 그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니까. 대답을 꼭 들어야만 해.’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아이참, 왜 그러세요. 저는 당연히 녹턴 외엔 관심도 없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 여쭤본 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녹턴의 얼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나를 응접실의 소파에 앉히곤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또 뭘 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그럼 증명해 보도록.”
“네…… 네?”
“나 외의 남자에겐 관심도 없다는 걸 증명해 보란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투는 권위적이고 단호했다.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나는 그 말에 반드시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 어떻게요?”
내가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날 내려다보는 녹턴의 눈빛엔 불만스러움이 가득 실려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특유의 무게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굉장히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저 바라봐지는 것뿐인데도 전신에 긴장감이 돌고 손에 땀이 찼다.
오만하고 섹시한 눈길로 날 빤히 보던 그는 내 턱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키스해 봐라.”
다행히도 그가 요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우리가 여태까지 키스를 한두 번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주 동안의 여행 기간 동안엔 별로 못 하긴 했지만.’
어딜 가든 아이들과 아이린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와 거의 아무런 애정행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다가와도 애들 교육에 안 좋다며 밀어내곤 했으니까.
녹턴은 그것을 불만스러워했지만 사실 나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나는 그와 입을 맞추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저 ‘키스해라’라는 말에 이렇게나 입안이 바짝바짝 타고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보면.
갑작스레 심한 갈증이 일었다.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입술이 신경 쓰여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의 굳게 다물어진 누드톤의 입술. 그저 입술과 입술을 겹치고, 그 아래의 속살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기쁨을 느끼게 될지 아는 나로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대체 지난 이 주 동안 어떻게 참았던 거지?’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메마른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그럼…….”
나는 조금씩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술에 닿기 위해서는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고 고개를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기 직전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마침내 그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 위에 입술이 닿았다. 나는 그 감촉만으로도 인내심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그도 그랬던 것 같다. 순식간에 그의 속살이 입안을 침범해 들어오고,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잃을까 봐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나를 탐하는 그는 마치 잔뜩 흥분한 짐승 같았다. 나를 그 큰 몸으로 감싼 채, 단 순간에 집어삼킬 것만 같은 검은 짐승.
입안을 침범하고 유린하는 그. 나를 얽어매고, 치열을 쓸어 내며 입천장을 두드리는 그 감각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으음, 웃…….”
그와 동시에 그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 순간 뒤 세상이 뒤집혔다. 그가 나를 소파 위에 눕힌 것이다.
진한 입맞춤에 곤죽처럼 녹아 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는 숙소의 응접실이었다. 비록 숙소를 전세 내서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누굴 마주칠지 몰랐다. 당장 자네트나 미하일이 나와서 이 모습을 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닫자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흐으으, 잠…… 깐. 녹터언…… 잠깐만요!”
내가 어깨와 가슴팍을 마구 떠밀자 녹턴은 결국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도 입술을 떼었다. 그는 불만스런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왜?”
평소와 달리 거친 어투와 여전히 번득이는 자색 눈동자, 그리고 답지 않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옷매무새가 그의 흥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흥분을 살갗 위로 체감하자 내 몸까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어 머리를 식히려 애썼다.
“여긴 응접실이잖아요.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녹턴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들어오긴 누가 들어온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내 의사에 반해 행위를 더 이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녹턴은 도로 나란히 앉은 뒤 팔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옆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여전히 욕망에 젖어 있는 눈동자는 아찔할 정도로 야릇하고 남성미가 넘쳤다. 나는 남몰래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내 옆얼굴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여긴 아무도 안 들어온다, 라리아.”
“그걸…… 녹턴이 어떻게 아세요?”
“블랙웰에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놈이 아직 남아 있을 것 같나?”
나는 그제야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우리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용인들이 응접실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나 보구나.’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말은 블랙웰의 모든 사용인들은 우리가 단둘이 있는 동안 얼마나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그와 침실을 같이 쓰기도 좀 그렇고…….’
블랙웰 저택에서 침실을 따로 쓰듯이 우리는 숙소에서도 침실을 따로 쓰게 되어 있었다. 혼인 전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 이렇게 응접실에서 이런…… 일들을 할 수밖엔 없나?’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져서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올곧게도 내 얼굴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이 불타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이곳이 침실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만일 침실이었다면 참지 못했을 거다.”
미치겠네! 결국 난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아아, 저……. 녹턴. 저, 저기…….”
귀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아마 그의 눈에는 내가 얼굴부터 목, 귀까지 새빨간 당구공처럼 보일 것이다.
“뭐?”
하지만 날 이렇게 만든 그는 정작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내 귓가 가까운 곳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할 말이라도, 있나?”
그 목소리의 진동이 귓가를 간질일 정도로 가까운 곳. 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무엇에라도 화제를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저…… 그러, 그러니까! 대, 대신관이요!”
내가 생각해도 최악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말은 내 입술을 튀어나온 직후였던 것이다.
“뭐?”
그가 다시 ‘뭐?’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까의 ‘뭐?’와는 완전히 다른 어조였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빼꼼 눈을 내밀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이거대로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밀고 나가는 수밖에.
“이제 말씀해 주세요. 대신관 어떠셨어요? 키스하면 말씀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손가락 사이로만 눈을 내민 채 조심스레 물었다.
녹턴은 마뜩잖은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내 질문을 회피하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는 대신 내 허리를 감은 팔을 더 가깝게 끌어당긴 뒤 말했다.
“정말 이상한 자더군.”
“어, 어떤 점이요?”
과연 그의 ‘진실을 보는 눈’에 비친 대신관은 선인일까, 악인일까? 나는 둘 중 어떤 대답이 나오든 결코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무색하게도, 대답은 둘 다 아니었다.
“그자에게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런 일은 내가 이 능력을 얻은 뒤로 처음이다.”
“네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것도 안 보이신다는 건…… 그러니까, 그 사람의 본질이 ‘진실을 보는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녹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치 능력이 없는 것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을까?
대신관이라는 대단한 사람이라 그렇다기에는, 녹턴의 ‘진실을 보는 눈’에는 황제나 성녀의 본질마저 보였다.
심지어는 다른 세계에서 온 나도 어떤 형태로건 간에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가? 그의 능력은 인간인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턴의 눈에 그 대신관만은 어떠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멍하니 고민에 빠졌다.
‘설마 대신관은 인간이 아닌 걸까?’
뭐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든가…… 괴물이라든가…….
황당하긴 하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녹턴의 눈에 동물은 그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에게서 들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대신관이 녹턴의 능력에 대응하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에 이능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이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무언가도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능력이든, 이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마도구든지 간에…… 대신관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대신관이라는 작자가 어마어마하게 수상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그와 성국을 의심하고 있던 나로서는 정말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내 머리 위로 이런 말이 툭 떨어졌다.
“별개로 직감적으로도 그리 마음에 드는 작자는 아니더군.”
“직감적…… 이요?”
“그래. 말은 잘하지만 허허실실 해서 겉만 번드르르하게 말하는 자였다. 종교인치고는 과시적인 기색이 다분하더군. 그 무희까지 부른 연회도 그렇고.”
그의 말에 나는 반가움을 느꼈다. 나도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이 세상에선 이게 원래 당연한 건 줄 알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녹턴도 그렇게 생각했군요! 저도요. 종교 단체치고는 연회가 너무 과시적이었어요.”
“내가 아니라 최소한의 판단력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나는 속이 시원해졌다. 귀족 중의 귀족, 부자 중의 부자인 녹턴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레마르크, 그자가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제국에 대한 성국의 간섭이 심해졌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더군. 블랙웰에 대한 간섭 역시 늘었지. 그자의 정확한 목표는 몰라도 무언가에 대한 야심을 가진 남자인 건 분명하다.”
녹턴은 나직하게 말한 뒤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대신관은 종교인치고 질이 좋은 자는 아니다. 너와 성녀의 친분은 알고 있지만, 그 남자는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다.”
녹턴이 걱정을 담아 그리 말했다. 나는 가슴 속 한구석이 쿡쿡 찔려 왔다.
‘질이 안 좋아 보이는 건 나도 동의하지만, 조사를 해야 하니까 가까이하지 않을 수는 없어.’
아무튼 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서 녹턴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성국에 도착하기도 했으니,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해요.”
그렇게 말한 나는 그의 머리를 폭하고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감사 인사가 모자라군.”
“네?”
난 깜짝 놀라 그를 다시 보았다. 녹턴은 드물게도 웃고 있었다.
그가 여유로운 태도로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마로는 모자라다. 다른 곳에 다시 하도록.”
“아.”
나는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입술 사이로 비직비직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베이비 키스를 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나를 그리 쉽게 놔주지 않았고, 키스는 다시 오랫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