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7
017화
“커피 드세요. 아메리카노 샷 추가에 휘핑크림 맞으시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류지원이 알려줬어요.”
물론 아니다.
류지원은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민혁과 이정의 취향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세심함이 부족하다. 이정이 서 교수의 취향을 아는 건 그가 회귀 전 그녀의 심부름을 종종 해 왔기 때문이었다.
“지원이가 이런 걸 기억할 애가 아닌데….”
서 교수 역시 지원의 성격을 아는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것 말고는 그녀의 취향을 알 방법이 없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홍소희 씨는…… 아메리카노 드세요?”
“아뇨 커피는 좀….”
이정은 아메리카노 대신 지원의 몫으로 사 왔던 설탕덩어리 음료를 건넸다. 날씨와 상관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지원의 한결같은 취향이 반영된 음료였다.
“그럼 이거 드실래요? 좀 많이 달긴 할 텐데.”
“다른 일행분 거 아니세요?”
“그 친구가 오늘 안 온다고 해서요. 단 거 안 좋아하시면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고요.”
“저 단 거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어디를 가던 ‘여기서 제일 단 음료가 뭐에요?’라고 물어본 뒤 휘핑크림과 초콜릿 드리즐, 초콜릿 드리즐이 없으면 캐러멜 드리즐을 올리면 되는 단순한 취향.
워낙에 고열량 음료라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나름대로 자제하는 듯했지만 사다주면 못 이긴 척 먹을 게 뻔해 준비한 나름의 선물이었다.
‘정작 다른 사람이 먹게 됐지만.’
다행히도 홍소희는 음료가 취향에 맞는지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핏 어두웠던 얼굴에 생기마저 도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와 맛있는데요? 어디서 사셨어요?”
“정문 앞 카페에서 제일 단 음료 달라고 한 다음에 휘핑크림이랑 초콜릿 드리즐 한번 추가한 거예요.”
“와아… 칼로리 폭탄….”
그러면서도 마시는 걸 멈추지 않는 것까지도 지원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 참, 아까 배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이제 막 첫 촬영을 하긴 했지만요.”
“혹시 웹드라마라고 알아요?”
최소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으로 길이가 긴 정규 드라마 대비 30분 내로 모바일 친화도를 높인 일명 ‘스낵 드라마’.
지원이나 규모가 작았던 예전과 달리 이제 성공한 웹드라마는 그 콘셉트대로 광고를 찍거나 관련 상품이 나올 정도로 활발하게 2차 창작이 이루어졌다.
“당연히 알죠.”
특히, 이 시기쯤에는 인지도는 있지만, 연기 실력이 부족한 아이돌이나, 현장 경험을 쌓아본 적 없는 대형 소속사의 신인 배우들 등이 자리를 차지하며 일종의 레드오션이 되었다.
“그… 저희가 이번에 웹드라마를 제작하는데요. 혹시 생각 있으세요?”
“캐스팅인가요?”
“네, 뭐, 캐스팅은 캐스팅인데….”
앞으로 이름 날리는 작가의 작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썩 내키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저희 처지가 좀 안 좋아서요. 오늘 교수님께 들린 것도 이 문제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서예요.”
상황을 따져보기도 전에 홍소희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입장을 설명했다.
“지금 저희가 찍어야 하는 게 의 스핀오프 격인 작품인데요.”
. 유치하다 느껴질 정도로 직관적인 제목이지만 누적 조회 수가 3억에 달하는 유명한 하이틴 웹드라마였다.
“여기서 서브 남주를 맡았던 안규승이 메인인 5편짜리 단편이에요.”
“그런데요?”
다만 이 시기의 이정은 , 줄여서 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0·20대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끈 탓에 여기저기에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몇 번 들은 것이 전부였다.
“안규승 역할을 맡았던 박도혁 씨가 기존 개런티의 다섯 배를 원하고 있거든요.”
그녀는 가 상상외로 인기를 끌면서 주연 캐릭터 모두의 몸값과 인지도가 가파르게 상승해 그 정도는 예상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문제 되는 건 박도혁 씨가 개런티를 핑계로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예요. 웹드라마는 인원이 적어서 현장 분위기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다른 사람을 쓰면 되잖아요? 더군다나 정도면 공개 오디션을 열어도 많이들 참여할 텐데.”
반응에 따라 시리즈로 제작되는 웹드라마는 종종 다음 시리즈에서 해당 역을 맡은 배우가 바뀌기도 했다.
그것은 일정 문제일 수도, 지금처럼 개런티 문제일 수도, 혹은 그 외에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제작사 쪽에서 이렇게 애를 먹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정 씨 박도혁 모르세요?”
“박도혁이요?”
박민혁은 아는데…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퍽 친숙하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 친구, 최근까지 공부만 하던 친구라더구나.”
“저 얼굴로요?”
홍소희가 놀란 얼굴로 서 교수와 이정을 번갈아 쳐다봤다.
“모른다니까 음… 박도혁이라고 니리온, 아 이것도 모르겠구나. 아이돌 그룹의 센터예요.”
니리온? 멤버 이름만 비슷한 줄 알았는데 그룹명까지도 비슷했다. 아이돌이라곤 제 친구의 그룹밖에 모르는 이정이 중얼거렸다.
“루티온의 짝퉁도 아니고….”
“그래도 루티온은 아시는구나… 근데 니리온 팬들 있는 자리에선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니리온 최고의 역린이 그거니까.”
홍소희의 말로는, 니리온이 한 달 선배인 데다가 박도혁이 민혁보다 나이가 많아서 엄연히 따지면 니리온이 먼저라는 팬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루티온이 너무 유명하다는 거죠.”
루티온이 데뷔 때부터 1등을 휩쓸었던 것과 달리 노래는 알아도 그룹은 모르는 수준의 아이돌이라 대중 대부분이 니리온을 루티온의 아류 그룹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차라리 정규 방송이면 큰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저희 드라마가 아시다시피 웹드라마잖아요?”
10·20대들이 주된 타겟층이자 드라마를 봄과 동시에 댓글을 달 수 있어 시청자 친화 시스템이라는 게 이럴 때는 약점이 되었다.
“그 아이돌 팬덤이 수는 많지 않아도 코어가 장난 아니게 세요. 쉽게 말해 단합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죠.”
초반 가 주목받지 못할 때도 그들의 영업 글이 꽤 힘을 바랐다고 했다.
조직적이고도 치밀한 움직임이라 멤버가 하는 예능, 멤버가 하는 광고 등은 흥행시키지만 유독 아이돌 자체는 흥행시키지 못한다는 아이러니한 점도.
“이대로 박도혁의 안규승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안규승 자리에 앉힌다면 그렇게 치밀했던 조직들이 단숨에 안티로 돌아서서 드라마를 폭망시키겠죠. 그러니까 저희에겐 힘이 필요해요.”
그 말을 들은 이정이 과거의 스핀오프에 대한 후일담을 기억해냈다.
훗날 어느 토크쇼에서 그녀가 결국 이때 다른 배우로 교체된 뒤 성적이 나오지 않아 시즌2가 무산된 것이 그녀의 작가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홍소희 딱 한 번의 실패, 그것이 바로 아 이 의 스핀오프였다. 하지만 아직 데뷔하지도 못한, 정확히는 아직 방영조차 하지 않은 드라마에 출연 중인 이정 역시 조직적인 팬덤을 상대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잘생겨서?”
“네?”
이정이 헛것을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홍소희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음성은 단호했다.
“괜찮아요. 얼굴이 개연성이거든요.”
결국, 이정이 의 촬영 현장에 들리기로 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스핀오프 찍는다면서 벌써 시즌 2를 찍고 있어요?”
“박도혁 출연 문제로 촬영이 계속 밀려서요. 말이 스핀오프지 시즌2 복선을 까는 거라 건너뛸 수도 없고, 계절감은 맞춰야 하고. 차선책이 시즌2를 먼저 찍는 거였죠.”
‘교체된 뒤 시즌2가 무산됐다고 들었는데 그럼 촬영 자체가 폐기됐었던 건가?’
합치면 두 시간이나 될까 싶은 5화짜리 웹드라마가 시즌2에 꼭 필요한 스토리였다면 촬영까지 시작했던 시즌2가 무산된 것도 아예 말이 안 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조만간 시간 될 때 한번 들리겠습니다.”
“네네 그래요. 자랑이 아니라 우리 팀 정말 박도혁만 빼면 분위기 좋거든요. 이정 씨도 분명 같이하고 싶어질 거예요.”
본인의 명함을 주고 이정의 연락처를 받은 그녀가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한결 가뿐한 얼굴로 교수실을 나섰다.
“감사 인사하러 왔는데 캐스팅 제의를 받게 돼서 당황스럽네요.”
“이정 씨도, 소희도 별다른 약속 없이 온 건데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원래 기회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라고 덧붙인 서 교수가 늘 그렇듯 온화하게 웃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웃음에 이정도 피식, 따라 웃었다.
“인사가 늦었지만, 제 취향 완전히 맞춰주는 사람 찾기 힘든데. 커피 고마워요. 첫 촬영은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연습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있고요.”
“연기가 완성되는 곳은 현장이니까요.”
서 교수의 말대로, 아무리 연습을 한들 결국 그 연기가 완성되는 곳은 현장, 더 나아가 그 연기를 보는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기억되었을 때이기 때문이었다.
“어이없는 일도, 힘든 일도 있었지만 역시 시작하길 잘한 거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제일 중요하죠. 이쪽 일은 흥미를 못 느끼면 티가 나요.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든,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든.”
그녀가 시계를 보며 교습서로 보이는 책을 꺼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곧 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할 거 같은데.”
“제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걸요. 다음엔 미리 연락드리고 찾아오겠습니다.”
이정은 미래에 항상 회사 내 사무실에 있던 서 교수를 생각하고 방문했지만, 이 시기의 그녀는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교수실에 있는 일이 드물 정도로 바쁜 교수였다.
“그래요. 지원이가 이정 씨 걱정 많이 하던데. 다음엔 같이 와요.”
“걱정하는 게 아니라 놀리고 싶은 걸 겁니다.”
셋이 있을 땐 민혁과 싸우느라 기력을 소비하지만 둘이 있을 땐 이정을 놀리는 데 체력을 쓰기 바빠 18년 후의 지원에게 익숙해져 있는 지금의 이정에게는 지치는 법 없고 시끄러운 지금의 지원이 조금 버거웠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
얼음만 남은 플라스틱 컵을 들고 일어선 이정이 꾸벅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