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8
018화
“아, 교수님.”
“음?”
“다음부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몇 번이고 말해야지 생각하곤 깜빡한 전적이 있는 그가 이번에는 잊지 않고 말을 꺼냈다.
지난 생에는 죽을 때까지 서로 존대하는 관계였던지라 조금 어색하긴 하겠지만 그가 배우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이쪽이 훨씬 마음 편했다.
“그게 그렇게 진지하게 할 말이에요?”
서 교수가 비장한 이정의 표정을 보고 나이답지 않게 까르르 웃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얼른 가 봐요.”
“네, 그럼 정말로 다음에 뵙겠습니다.”
교수실을 나온 이정이 아무렇게나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조금 여유롭게 생각하며 걷기 위함이었다.
“저기, 혹시… 맞으세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한예대 학생인 듯 예술학과 점퍼를 입은 여자는 흡사 연예인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아직 방영되지 않은 을 본 것도 아닐 거고, 완전히 수락하지도 않은 에 대해 알지도 못할 텐데 무엇 때문일까.
“혹시 한뉴 표지모델 맞으세요?”
“아, 네.”
맞데 맞데! 이정의 긍정에 그녀가 어디론가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한예대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긴가민가했거든요!!”
“안녕하세요! 저는 황나은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어….”
이정이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예 방영조차 하지 않은 드라마들을 이유라고 생각했을 정도로잊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헉, 하긴 일반인이신데 좀 그런가.”
“아, 그래도 한 장만 어떻게 안 될까요?”
한뉴, 한국대와 한국예대의 교내 잡지로, 1학년 1학기 교양 점수를 위해 표지모델을 한 뒤 연예인인 양 사진을 찍어줬던 적도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작년 일인데 아직도 그걸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줄은 몰라서 좀 놀란 거뿐이에요.”
대학교 1학년, 그러니까 지금 기준으로도 1년 전, 그의 기준으론 무려 19년 전의 일이었던 탓이었다. 이정이 사진을 찍어주자 다른 학생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 잡지 지금도 프리미엄 붙어서 팔리는 거 아세요?”
“프리미엄이요?”
“그거 한국대랑 한예대 교내용이라 딱 2000부 나온 거였거든요. 원랜 맨날 남던 게 192호만 완전 레어템. 증쇄 요청도 엄청 많았대요.”
미친. 이정이 표정 관리도 잊은 채 입을 벌렸다. 당시 만점에서 조금 아슬아슬했던 교양과목 하나가 추가 점수를 준다기에 생각 없이 했던 잡지모델에 그런 사정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정작 이정은 그 잡지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전혀 몰랐어요.”
“한국대보단 한예대에서 더 난리인 편이긴 하죠. 어쨌든 저희는 자주 못 보니까.”
나은의 말대로 학교, 도서관, 그리고 집만을 반복하는 이정의 일정함과 도서관에서 떠나지 않는 꾸준함에 질려 금세 관심이 사그라든 한국대 학생들과 달리 그를 몇 번 보지 못한 한예대 학생들의 열망이 더 강했다.
“그런데 한예대에는 무슨 일이세요? 한의과는 여기서 들을 만한 거 없을 텐데.”
지금은 다른 학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한예대의 뿌리는 한국대의 예술 캠퍼스로 지금도 한국대에 비하면 크기가 작았다.
그 때문에 한예대 학생이 한국대로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수업 때문이 아니라 볼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헉, 혹시 한예대로 편입하세요?”
“아뇨, 서 교수님을 좀 뵈러 왔어요.”
한예대의 멘토로 이름난 서 교수를 보러 왔다는 말에 나은이 눈을 빛냈다. 한의대생으로 유명한 그가 예대 교수로 유명한 그녀를 찾아올 만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설마 데뷔하세요?”
“네. 곧이요.”
“아이돌이요? 아 연습생 하셨으면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고 배우인가?”
“맞아요.”
그의 긍정에 나은과 친구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역시! 언젠가 데뷔하실 줄 알았어요.”
“그럼 저 사인도 해 주세요!”
“아직 사인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데요.”
제대로 된 사인이 없어 거절하려 했지만, 뭐든 좋다고 하는 그녀들의 말에 이정이 어설프게 사인했다. 누군가에게 주기 위한 사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했지만 모두 그것만으로 만족한 듯 즐거워했다.
“축하드려요! 응원할게요!”
“저희가 1호 사인받은 거 맞죠?”
“자랑할 수 있게 꼭 대박 나세요!!”
이정이 끝까지 파이팅 넘치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삼인방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한뉴 모델이라고 사진 요청 받은 건 진짜 오랜만이네’
지난 생에는 한예대에 온 적이 없어 체감하지 못했나 싶었다.
“생각해 보니까 말 거는 사람도 좀 많아진 것 같고.”
피곤함에 찌들어 그늘지고 우울한 인상 탓에 무언가 부탁하기 어려웠던 전과 달리 차분하고 성숙해진 분위기가 되레 그에 대한 벽을 허물어주고 있었다.
“그냥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본인에게 향하는 시선에는 둔한 이정다운 생각이었다.
* * *
의 두 번째 촬영 날.
“이정 씨 벌써 왔어요?”
“일찍 와서 대기해야죠.”
이정이 현장에 온 것은 11시 반, 전달받은 촬영 시간이 1시인 것에 비해 상당히 빠른 시간이었다.
“수현 씨는 오늘 촬영 어떠셨어요?”
“어휴, 또 수현 씨래 정말.”
현장에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불러 능력을 발동시킨 것과 별개로 성연의 핀잔은 피할 수 없었다.
“으, 날씨 너무 춥다.”
“그치~ 패딩 협찬이나 들어왔으면 좋겠다. 실컷 입게.”
때마침 도착한 주린이 이정에게 되물었다. 오전 촬영분이 있었던 그녀는 다음 씬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럼 저도 예림 씨라고 부를 거예요?”
분명한 건 정말 싫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말 싫어한다고 하기엔 두 사람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넘쳐 흘렀다.
누가 봐도 놀리고 싶어 하는 모습에 똑같이 장난기가 발동한 이정이 똑같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예림아. 왔어?”
“뭐? 아하하하, 진짜 대박이다. 이정 씨. 하긴, 예림이가 재민이보다 더 어리긴 하죠. 그래도 그건 기각. 차라리 누나라고 해요.”
“알아요. 장난이었어요.”
주린이 선후배 관계에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할 수 없는 장난이었지만 다행히 주린은 지난번 성연이 그랬던 것처럼 기분 좋게 받아주었다.
“근데 묘하게 이정 씨한테 누나 소리 듣는 거 별로지 않아?”
“어, 맞아! 내가 갑자기 한 20살은 더 먹은 느낌? 회식 때도 말했지만 난 나보다 나이 많은 줄 알았어. 분명 가만히 보고 있으면 노안은 아닌데….”
눈치 빠른 성연과 주린이 이정을 사이에 두고 웃었다.
“늙어 보인다는 뜻이죠?”
“좋게 말해서 어른스럽다고 하죠.”
주린은 21살에 벌써 늙어 보이면 너무 슬프지 않냐며 대신 안타까워했다.
“아, 이정 씨 오늘 분량 다 찍죠?”
6화가 되도록 회사를 벗어나는 일이 없는 재민답게 촬영 장소는 여전히 그의 회사. 그리고 오늘은 지난번 찍은 4화 옥상 씬을 제외한 모든 분량을 모조리 몰아 찍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다 합쳐도 15분 나올까 말까 하지만.’
나오는 회차만 많을 뿐 두 번 만에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분량. 역시 서브 남주인공치고는 처참한 분량이 아닐 수가 없었다.
“네. 원랜 강현 선배님이랑 같이 찍는 ‘6화, 3화 그리고 5화’ 순으로 가기로 했는데 예림 씨 스케줄 때문에 3화, 6화 그리고 5화 순서로 바뀌었어요. 아무래도 제 분량이 많지 않기도 하고,”
이정이 대본을 뒤적여 등장 씬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강현과 함께 찍는 5화가 가장 뒤로 밀린 것은 단순히 재민의 분량이 가장 적기 때문이었다.
“6화가 제 단독 씬이고, 5화는 ‘아 그래요?’하고 마는 수준이라서요. 그 뒤로 바로 강현 선배님이랑 수현 씨랑 찍을 거 같아요.”
“왜 나는 수현 씨고 현이 오빤 선배예요?”“아네, 아직 제대로 인사드린 적 없어서요.”
인사를 했다 한들 굳이 친분을 다지고 싶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정은 그저 말을 아꼈다.
‘괜히 나서 봤자 좋은 꼴도 못 보고….’
다들, 강현에 비해 이정이 아직 너무 무명이라 모두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주석은 논외로 하고, 주연 세 사람의 급이 비슷비슷했기에 누구 한 명이 대놓고 강현의 행동을 나무라기엔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다.
“근데 이 오빠 왜 아직도 안 와? 3 다시 22 찍기 전에 6 다시 11 먼저 찍기로 한 거 까먹었나?”
“그러게, 왜 이렇게 늦지? 이정 씨 지금 몇 시예요?”
“12시 15분이요.”
“벌써요? 11시 45분까지 모이기로 했는데.”
오전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촬영했기에 그리 멀리 가지 않았을 강현이 약속된 촬영 시작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정아. 강현한테 전화 한번 해 봐라. 벌써 12시가 넘었는데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분명 멀리 가지 말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