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6
016화
“수현 씨, 웬일로 옥상에서 안 드시고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거짓말처럼 대본 이외에는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던 환상이 발동됐다.
‘헉.’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연기를 할 땐 진짜 세상 위로 대본에 가장 최적화된 레이어가 한 겹 깔리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수현을 중심으로 물감 퍼지듯 환상이 진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수십 명의 스태프는 흐릿해지고 오직 ‘수현’만이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오늘은 제가 쏘는 거니까 제 맘대로죠!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융통성이 없으시네.”
“아, 그런 겁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게다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해도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환상은 여전히 카메라와 스태프들을 가리고 ‘등장인물’인 수현만이 오롯이 보여 주고 있었다.
“아하하 제가 이겼네요. 벌칙으로 음료는 제가 골라드릴게요. 자! 겨울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쉽게도 전 원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십니다. 타격이 없네요. 성연 선배님.”
그것도 잠시, 이정이 입을 열자 환상은 또다시 사그라졌다. 부드럽게 퍼졌던 것과 달리 어딘가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사라진 환상에 당황한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어후, 선배라니 그냥 성연 씨나 누나라고 불러요.”
‘왜지?’
분명 똑같이 대본을 벗어 난 대사를 했는데 환상이 생겨나거나 다시 사라지는 상황. 무언가 기준이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쉽게 정답을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수현 씨라거나? 흐흐.”
그 순간, 퍼뜩 이정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요. 수현 씨.”
이름. 환상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점은 이름이었다.
성연의 장난에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본명이 아닌 수현이라고 불렀을 때 환상이 발동됐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면 이번에도 환상이 발동되어야 했다.
‘역시!’
그리고 그 가설은 정확했다. 이정이 성연을 ‘수현’으로 부르는 순간 또다시 환상이 발동되었다.
“어후 뭐야~”
“현장 분위기 살리고 좋죠. 뭐.”
“그건 그렇지만.”
성연은 장난이었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로선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촬영 도중 배우가 상대 배우를 역할 명으로 부르는 것이 그다지 유별 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 상대 역이 수현 씨 아니면 예림 씨인데 이렇게 부르는데 더 친숙할 거 같지 않나요?”
스태프들이 잘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물감처럼 퍼진 환상 뒤로 아주 살짝 스태프들을 볼 수 있었다.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형태는 보이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는 정도로.
‘꼭 얼굴 보고 대화해야 할 때는 아까처럼 없앨 수 있으니까.’
내내 이 악물고 버텨 낼 뿐이었던 현장에서의 활동이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줄은 몰랐다. 물론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연기 중이나 대기 중에 쓰러질 확률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시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성연과 이정의 만담에 웃던 이들도 제각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도 올라가죠?”
“네. 수현 씨.”
“와 방금 진짜 능글맞아 보였어요. 알아요? 이정 씨, 솔직히 말해 봐요. 스물한 살 아니죠?”
성연이 그를 이정이라 부른 그 순간, 환상이 한 겹 깎아낸 듯 옅어졌다. 쌍방으로 연기할 때가 아니라면 완전히 사라졌던 것과 달리 조금 희미해졌을 뿐이지만 이정은 이마저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사실 서른아홉이에요. 수현 씨.”
“어휴 됐어요, 됐어. 딱딱한 줄 알았더니 능글맞기는.”
이정이 성연을 수현이라 부르는 것과 무관하게 그를 재민이라 불러 달라. 강요할 수 없으니 남들이 보기엔 장난치듯 수현을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두꺼워졌어.’
그리고 그 행동이 정답이라는 듯, 한 겹 옅어졌던 환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완벽하진 않아도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완전히 찾아낸 것이었다.
“씬 넘버 6에 11 부터 갈게요!”
1화부터 6화까지 이정의 분량은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주린, 강현과 함께 찍어야 하는 장면을 빼면 찍을 수 있는 장면은 6화뿐이었다.
“레디, 슛!”
수현과 영호의 관계에 진전이 생기자 수현은 재민을 보러 옥상으로 오는 대신 자주 영호를 만나러 나가기 시작했다.
“수현 씨 왔어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옥상에서 수현을 기다리는 재민. 이제 그에게 옥상은 단순한 쉼터가 아닌 수현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었다.
“대표님!”
해맑게 웃는 수현, 그리고 재민은 그런 수현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낀다.
‘오빠!’
수현의 모습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흐릿하게 겹쳐졌다.
“오늘도 여기 계셨네요! 역시나 대표님 찾으려면 옥상이 답이라니까.”
‘역시 여기 있네? 역시 오빠 찾으려면 옥상이 최고구나?’
언젠가 비슷한 말, 비슷한 행동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하지만 재민은 고개를 살짝 흔들어 억지로 그 잔상을 흐트러뜨렸다.
“컷! 이정 씨 고개 흔들지 말아요!”
“아.”
덧씌워진 예림의 모습에 일부러 고개를 흔들었던 재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얘기를 해야 하나?’
이정으로선 의도한 행동이지만 박 감독의 눈엔 그냥 NG로 비친 듯했다.
분명 재민과 예림이 서브 커플이란 설정은 오디션 때 이 이수희 작가에게 확인받았지만, 그 외의 상세한 디렉션은 받지 못했다.
“저, 감독님.”
“네, 왜요?”
박 감독이 드물게 존댓말을 써 주는 정중한 감독인 건 맞지만, 그와 별개로 본인의 디렉션에 반박하는 걸 싫어할지도 몰랐다.
“이번 씬 말인데요….”
그러나 이정은 제 의견을 말하는데 거침없었다. 그러는 편이 제게나 드라마의 완성도에나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 *
다음날, 촬영이 없는 이정이 커피 석 잔을 들고 한국예대에 방문했다.
― 학교냐?
― 류지원: ㄴㄴ 나 현장 왜?
― 나 너네 학교
― 류지원: 교수님 뵈러? 나 오늘 학교 안 가는뎅
― ㄱㅊㄱㅊ 촬영이나 잘해라
― ㅇ
“아 물어보고 살걸.”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샀던 석 잔의 커피가 뻘쭘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애초에 그녀가 아닌 서 교수를 보기 위함이라 상관없었다.
“설마 서 교수님도 안 계시는 건 아니겠지?”
외부 강의 없이 웬만하면 학교에 상주하는 서 교수이긴 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개인 일정으로 자리를 비웠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연락하긴 웃기고.”
교수실까지 겨우 오 분 남짓, 이제 와 방문을 알리기도 뭐하니 이정은 그냥 교수실로 직행하기로 했다.
―똑똑
“교수님. 이이정입니다.”
다행히 교수실 앞에 붙은 안내판은 그녀가 재실 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가 노크하자 안쪽에서 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어, 손님이 계셨네요.”
서 교수의 목소리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종이와 사진이 빼곡히 들어찬 교수실에 낯선 얼굴이 섞여 있었다.
“나중에 올까요?”
“아니에요, 들어와요. 이정 씨.”
“들어오세요. 전 지금 갈 거라.”
분명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려 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테이블의 찻잔도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 이 친구는…?”
“안녕하세요. 이이정이라고 합니다.”
가발인가 싶을 정도로 숱이 빽빽한 탈색 머리와 요즘은 잘 하지 않는 숱 많은 앞머리. 쉽게 접할 만한 비주얼은 아니었기에 이정이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반가워요. 홍소희예요.”
그리고 그 의문은 그녀의 이름을 들은 찰나 쉽게 풀려버렸다.
끈질긴 천재. 홍소희. 10번의 공모전 낙방 끝에 웹드라마로 전향하자마자 대박이 터졌고, 딱 한 번의 실패 후 고공행진을 계속하다 결국 염원하던 공중파에 당당히 입성한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녀는 공중파, 종편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명실상부한 탑 드라마 작가로 어지간한 스타들보다도 높은 몸값을 자랑했다.
‘그때도 저 보기 드문 머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여담으로 그녀는 지망생 시절 자신을 푸대접하며 인격 모독에 가까운 폭언을 했던 모 케이블만큼은 절대 작품을 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내 밑에 있는 학생이 발굴해 온 신인 배우야.”
“배우요?”
다만, 그것은 모두 이정만 아는 미래일 뿐 지금의 그녀는 그저 첫 대박을 터뜨린 신인 웹드라마 작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정을 보는 홍소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정 씨는 무슨 일이에요?”
“별일은 없고요. 첫 촬영 끝나고 겸사겸사 감사 인사를 드릴 겸 왔어요.”
서 교수와 대화하랴, 미래의 그녀에 대해 생각하랴 정신없어 홍소희의 눈빛을 보지 못한 그가 서 교수에게 들고 온 커피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