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모두가 자신을 백치라고 부르던 모습이 선명한데, 올가는 달랐다.
“배운 것은 기억하고 계셨지만 공작가의 주인들에게 티를 내지는 않으셨어요. 아가씨께서 영리하지 않으셨으면…….”
올가는 눈시울이 시큰한 듯 눈가를 닦았다.
“어떻게 저보고 도망가라고 길을 알려 주셨겠어요?”
“제가요?”
“네, 아가씨께서 알려 주신 물건들을 챙겨서 저는 그길로 줄행랑쳐 나왔지요. 아까 보셨던 물건들은 아가씨께서 가져가라고 챙겨 주신 것들이에요.”
“아……!”
“원래 메디아의 귀한 물건들이더군요. 왜 공작가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덕에 정착할 수 있었답니다.”
올가의 말에 요이델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뭔가 긴박했었지. 그래, 맞아…….
‘유모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평소에도 유모는 자신을 감싸다가 공작 부부에게 많이 혼났었다. 분명히 기억났다.
“그때 아가씨와 함께 도망치지 못한 게 지금도 너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올가 님! 저는, 그때…….”
분명히 내가 도망가라고 했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 유모는 어딘지 급해 보이는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서.
“……어쩌다 나오게 됐는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제가 들으면 안 될 걸 들었기 때문이에요.”
먼 옛날, 어두컴컴하던 공작가. 사용인들이 모두 잠든 시간.
요이델을 재운 샐리, 지금의 올가는 아가씨의 낡고 해진 이불 대신 새 이불을 요청하기 위해 주인의 방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추워졌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아가씨는 얼어 죽고 말리라.
‘시엔델 도련님처럼 예뻐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그 정도는 해 주시겠지. 아무리 그래도 딱 하나 남은 자식이니까.’
의지로 그들을 찾아 헤맨 그녀는 마침내 주인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틈 사이로 들으면 안 됐을 대화가 흘러나왔다.
“도저히 쓸모가 없어. 저 아이의 머리 색이 점점 바뀌는 것 좀 봐! 이러다 들키고 말겠군!”
싸우는 듯 격한 노성이 오고 갔다. 최대한 언성을 낮춘 듯했지만 분위기는 살벌했다.
올가의 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거예요, 그래서?”
“가둬 놓고 키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이제 시엔델도 없고, 저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고!”
“시엔델 얘긴 하지 말아요! 누가 그런 사고가 날 줄 알았어요?! 나도 가슴이 아프단 말이에요! 그 쓸모없는 것을 진작 잡았어야 하는데…… 어떻게 우리 시엔델이…….”
“제물이면 제물답게 써먹었어야지. 이제 너무 늦었어. 저 아이의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럴 일은 없어요. 그랬다면 진작 돌아왔겠죠. 지금은 백치나 다름없잖아요?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요!”
툭―
덜컹!
그때, 뒷걸음질 치던 올가의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동시에 꽂힌 서늘한 눈동자.
“거기 누구인가!”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또렷했다.
올가는 마른기침을 뱉으며 괴로운 듯 말을 마쳤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요이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제물, 내가 제물이라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런 목적이었구나.
‘짐작은 했지만 정말 최악인 사람들이야.’
쓸모라는 단어를 쓰는 말버릇은 그들의 것이 분명했다. 요보힐데 공작 부부는 요이델을 쓸모에 따라 다르게 그때그때 다르게 판단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요이델은 옛 장면을 떠올렸다.
시엔델은 그때 분명히…….
“이제 나 때문에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라고 말했지.
요이델은 다정했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시엔델이 나를 보호해 준 건, 우연이었을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시엔델은 알고 있었던 거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부모님이 꾸미는 계획이 뭔지!
‘그래서 날 보호해 준 거야.’
순간 소름이 확 끼쳤다.
“들으면 안 될 말이었죠. 저는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치기 위해 달음박질쳐 작은 방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도움을 받은 건 오히려 저였네요.”
올가는 괴로운 듯 말을 이어 갔다.
“아가씨께서는 공작성을 몰래 빠져나갈 오솔길과 어떤 장소를 알려 주셨어요. 그곳에 있는 물건을 챙겨서 도망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요.”
“그게 혹시 아까 봤던 건가요?”
“맞아요. 그 장식품들이에요. 언제 모으셨는지 약간의 돈과 마법 가방을 건네주시면서, 빠져나갈 길도 알려 주셨죠. 아가씨는 절대 백치가 아니었어요.”
그 말에 요이델도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과거의 내가 그 길을 외운 건, 아마도 도망치기 위해서였을 거야.’
창문을 보거나 이따금 밖을 나갈 수 있을 때 몰래몰래 살피며 필기를 했던 것 같다.
손으로 적으면 적을수록 암기가 됐으니까. 오래된 습관이었구나.
하지만 요보힐데 공작가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리가 멍해지고 내 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꼈던 기억들도 함께 떠올랐다.
올가는 그런 요이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흐윽, 하지만, 하, 하지만 저는…… 아가씨를 뒤로하고 정말로 혼자 도망가 버린 거예요.”
“올가 님.”
“죄송해요.”
“……올가. 울지 말아요.”
“도망치던 중에 금방 발각됐고, 그 뒤로는 기억이 없어요. 눈을 떠 보니 해안가에서 메디아의 모래를 먹고 있던 것이 전부예요.”
“다음은 나랑 얘기해.”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휘르무트가 둘의 대화를 끊었다.
그는 요보힐데 공작가에서 그녀를 지켜 줬던 것과 똑같은 눈으로, 요이델을 내려다보았다.
요이델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에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떨고 있는데 괜찮다고?”
“제가 언제요?”
그의 말은 진짜였다.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뒤늦게 살펴보니 어깨부터 다리까지 전신을 덜덜 떠는 중이었다.
“미안하지만 요이델.”
“…….”
“네 거짓말을 믿어 주고 싶지만, 두려워하는 너를 모른 척 내팽개쳐 두지 않을 거다. 네 뜻이 아니라고 해도 내게는 그게 우선이야.”
툭.
그때 머리와 팔다리가 뜯겨 솜뭉치가 터진 인형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저절로 터졌어.”
휘르무트는 요이델의 눈치를 보다가 인형을 발로 슥슥 밀어 뒤로 치웠다.
“진짜야.”
“뭐 했어요? 오라버니가 한 거죠!”
“낡은 걸 내가 어떻게 해. 솜도 천이 답답했나 보지. 오죽하면 알아서 기어 나갔겠어? 그보다 넌 방에 가서 쉬어.”
휘르무트는 요이델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이, 이렇게 안아서 가면 다들 이상하게 봐요!”
“그럼 조부모님 방에서 쉬어. 돌아가셔서 어차피 비어 있는데 넓고 좋거든.”
“네?!”
요이델은 발버둥 치며 휘르무트의 곁에서 벗어나 땅에 내려가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다리가 닿지 않았다.
“저, 얘기를 더 듣고 싶어요, 들을 거예요. 그러려고 유모를 만난걸요.”
“너는 더 얘기할 수 있겠나?”
휘르무트는 올가에게 물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올가 역시 미미하게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가는 눈물을 닦고 애써 미소 지었다.
“……신사분은 아가씨를 험난하게 다루지 않는 법이죠. 대화는 끝이니, 조심히 데려다주세요. 요란하지 않게요. 두 분의 관계를 모두가 아는 건 아니잖아요?”
“입만 살았네. 너도 쉬어.”
“맞아요, 오라버니! 내려 주세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만 적이군.”
휘르무트는 어쩐지 쓸쓸해진 느낌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뒤로는 남몰래 인형을 자근자근 짓밟았다.
‘이건 원래 있던 인형이 아니군.’
요이델의 옛 방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서 소품 하나하나까지 다 알고 있는 그의 낯이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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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뭐예요?”
요이델은 턱이 어긋날 정도로 크게 입을 벌렸다. 메디아의 다람쥐가 입안으로 쏙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음에 드는구나.”
“아, 아니, 아니, 안 드는 건 아닌데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대형 케이크는 뭐예요!”
휘르무트는 아침 댓바람부터 요이델을 불러냈다. 뭔가 밖에서 한창 시끄럽긴 했는데, 설마 이런 걸 계획 중일 줄이야.
요이델은 뒤에 계시는 부모님도 살펴봤다.
‘왜 전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메디아의 관습이나 전통이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케이크를 좋아한다며.”
“제가 언제요? 단 걸 엄청나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뭐?”
“정말이니?”
“휘르무트.”
단박에 아연해진 휘르무트와 그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요이델은 고개를 꺾듯이 위로 팍, 들어서 케이크의 높이를 가늠했다.
어떻게 만든 건지 층마다 케이크의 색과 꾸밈새가 다른 것으로 보아 맛도 다양한 듯했다.
‘웨딩 케이크도 이 정도로 쌓진 못할 거야. 이건 정말 케이크 궁전인걸.’
휘르무트는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정말 별로야?”
“그건…….”
마음에 없는 말은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실망한 가족들의 표정을 보니 나무랄 수가 없었다.
요이델은 케이크 탑에 다가가 아래쪽 크림을 손가락으로 조금 찍어 맛봤다.
“앗!”
세상에, 너무 맛있어.
눈이 휘둥그레진 요이델을 보며 가족들이 씩 웃었다. 요이델은 기쁨의 광대를 감추지 못했다.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어요! 세상에서 제일이요!”
“그치?”
“다행이다!”
그제야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예요? 신기해요, 꼭 지상 대륙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케이크 가게의 장인이 만든 것 같아요. 맛이 어렴풋이 비슷해요. 우와.”
대신전에서 먹어 본 적이 있었다.
출장을 나갔다가 온 신관들이 각지의 맛집이라며 먹을 것들을 주곤 했으니까.
요이델은 덕분에 편하게 앉아서 달달한 것들을 꽤 많이 맛보았다.
“응, 그래서 그 사람을 납치했지.”
“……네?”
“……납치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라는 소문을 듣고 최대한 흉내 내려고 애썼지.”
“아아. 저는 또. 깜짝 놀랐잖아요.”
요이델이 웃으며 안심하자 가족들은 몰래 등 뒤로 손짓했다.
‘돈 빵빵하게 쥐여서 풀어 줘.’
명을 알아들은 최측근들은 스르륵 흩어졌다. 휘르무트는 미소 띤 얼굴로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데 웬 케이크예요? 이런 건 엄청 특별한 날에도 받기 힘든 거잖아요?”
“다 네 거야. 이제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마음껏 나눠 먹어.”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요이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이 꼭 생일 같아요…….”
“생일이 머지않긴 하지.”
“정말이요?”
요이델이 놀라서 되묻자 휘르무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또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이미 너무 많은걸요.”
“그래?”
그는 요이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너는 원래 머리가 분홍색이었어. 나는 어머니를 더 닮고, 넌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까.”
휘르무트는 뒤를 힐끔 돌아보고 “성격이 아버지를 더 닮아서 다행이야. 우린 거칠거든.” 하고 몰래 속닥거렸다. 요이델은 못 참고 웃었다.
“하지만 올가는 네 빨간 머리를 봤다니, 그건 조금 부럽네.”
요이델의 현재 머리는 분명한 분홍색이었다. 아버지와 똑같은 색깔. 흔치 않은 희귀한 머리색.
“개떼들의 공작가에는 빨간 머리가 없지.”
휘르무트는 요이델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다 말았다. 그는 어쩐지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요이델, 너는 성황의 반려이지.”
“……싫으신가요?”
“그걸 따지려는 게 아니다.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건 있어.”
그의 진지한 표정에 요이델은 귀를 쫑긋 열고 집중했다.
“페어링을 풀 방법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