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십니까?”
율리시스는 석연찮은 반응을 보였다. 그의 시선이 제 뒤를 타다닷 쫓아오는 작은 신관을 향했다.
“너무 무르십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려서 불쌍해 보였는걸요.”
그 말에 율리시스는 입꼬리를 삐뚜름히 올려 미소 지었다.
“그 말씀, 공작이 들었다면 꼴이 무척 좋았겠군요. 동정 어린 시선을 받은 걸 알면 고고한 자존심이 썩어 문드러졌을 겁니다.”
아까 공작 부부는 진심을 다해 요이델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지만 요이델로서는 그들에게 사과를 받아 낸 셈이었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꽤 큰 수모를 겪었으니 당분간 요이델에게 접촉할 엄두를 내지 못할 거다.
“……그런데 성하께서는 언제부터 홀에 계셨어요?”
시엔델이나 게르암의 얘기를 들었을까? 아직 잠잠한 그의 태도를 보면 못 들은 것 같은데.
요이델은 율리시스를 흘깃대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까지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신이 공작 부부에게 대륙의 위치에 따른 상대적 지면 차이에 대해 강의할 때부터였습니다. 훌륭한 강연이더군요.”
거기서부터였구나, 다행이다. 그럼 들키진 않았어. 요이델은 민망함으로 달아오른 뺨을 감쌌다.
“뭐, 아쉽긴 하나 저희 쪽 사람이 아니니 확실히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맞아요, 성하께서도 곤란해지실 수 있고, 전 정말 충분해요.”
“공식선에서는 말입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죽일 수도 있다는 말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율리시스는 굳은 요이델을 보고 조용히 어떤 말을 속삭였다. 그러자 요이델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에요. 성하도 참, 농담이시죠?”
“…….”
“……정말요?”
“참 일일이도 놀라십니다.”
율리시스는 미약한 가정에도 부르르 떠는 요이델의 모습이 재밌는 듯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역시 성하는 무서운 사람 중 가장 좋은 사람이야.’
요이델은 꼭 자신의 비밀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공작 부부에게 내려진 벌은 다시는 방문할 수 없는 영구 추방령이었다. 그건 권세만큼이나 자존심이 높은 귀족들에게는 낙인처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의 기준으로는 감히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천한 인간들에게 자신을 손가락질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요보힐데 같은 제국의 대귀족은 더더욱. 아마 추방령의 이유에 대해 수많은 소문과 추측이 생길 거다.
‘이번 일로 돌아갈 집 같은 건 아예 없어졌지만, 그래도 괜찮아.’
홧홧한 환상통이 남은 듯한 뺨을 괜히 만져 보았다. 율리시스는 그런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프십니까.”
“네? 아, 아뇨. 전혀요.”
“보통 피가 날 정도의 상처는 아프다고 하는 겁니다.”
율리시스는 고개를 틀어 요이델의 뺨을 바라봤다.
“상처를 만든 이가 부모라면 더더욱.”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톡 올리고 내려다보았다.
“슬프십니까?”
“아뇨…….”
“보기보다 거짓말에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의 냉랭한 푸른 눈이 요이델에게 꽂혔다.
“그러나 제 앞에서는 비밀이 없으셔야 할 겁니다. 그게 무엇이든.”
순간 환각 마법을 말하는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였다.
율리시스가 고개를 숙이자 차분한 은발이 드리워졌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슬픈 게 아니면, 부끄럽습니까?”
“…….”
“가정사는 보통 숨기고 싶기 마련이니 창피하고 수치스러우실 겁니다. 의연한 척하는 햇병아리는 애써 울음을 참고 있겠군요.”
“…….”
“당신은 저의 치부를 알고, 저는 그대의 치부를 본 격입니다.”
요이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맞은 건 제 잘못이 아니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누군가 봐 버렸다는 게 제일 창피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해요. 하지만 이런 건 모르는 척해 주시면 안 되나요?”
“모르는 척해 드리면 어쩌실 겁니까, 혼자서.”
어쩔 수 없는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율리시스는 조금 화내는 말 따위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할 수 없는 응어리만 끌어안고 아마도 혼자 방에나 들어가서 우시겠지요. 아닙니까? 당신의 상처가 묻힐 만큼 시원한 처분도 아니었습니다.”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율리시스는 자신을 붙잡고 예리한 시선으로 속내를 들쑤셨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참고 또 참았는데 결국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서럽습니까?”
율리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말투와 고아한 태도로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잘했다고 우십니까.”
“그건……!”
요이델은 이 남자가 도대체 친절한 건지 불친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반박하고 싶었다.
“잘하지 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그분들 앞에서는 나름 참았어요. 저, 저는 성하처럼 강하지 못해요. 이렇게 못난 게 저예요. 그게 최선이었던 걸 어떡해요…….”
꾹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알고 있지만 대놓고 들으니 속상해서.
그러자 요이델을 지그시 응시하던 율리시스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살짝 웃었다.
“압니다. 잘하셨습니다.”
“네?”
“그 이상으로 어떻게 잘합니까. 고작 성년을 갓 넘긴 평범한 인간이.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해내신 겁니다.”
율리시스는 내심 요이델을 의심했었다. 요보힐데에서 보낸 첩자가 아닌지, 내통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 의심은 오늘의 일로 확실하게 정정됐다.
“얻어터지고 다니지 않겠다는 저와의 약속도, 잘 지키셨습니다. 생각보다 잘 참더군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율리시스는 담담히 말했다.
잔재주가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 싹이 괜찮다.
비록 파렴치한이긴 하나 인재를 제국 따위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쓰레기나 다름없던 크리온 광물을 재발견한 사람이니까.
율리시스조차도 전혀 알지 못했던 쓰임새였다. 그건 빛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역시 쓸 만하다.
하지만 그것 하나 떠봤다고 우르르 쏟아지는 걸 보니, 아직 햇병아리는 햇병아리다.
요이델은 그가 자신을 잠깐 시험해봤다는 걸 알자 긴장이 풀리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우십니까?”
“으, 으흑, 우는 사람한테…… 그런 질문 하는 거 아, 아니 흐엉. 아니에요. 보지 마세요……! 부끄럽단 말이에요.”
요이델이 고개를 숙이려 하자 그는 꿈쩍도 못 하게 제 손으로 요이델의 턱을 잡고 빳빳이 고정시켰다.
“……?”
이게 무슨 짓이지?
황당해서 얼이 빠진 요이델이 고개를 내리려고 온 힘을 끌어모았지만 그의 한 손보다 훨씬 약해 어림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별다른 힘도 주지 않는데. 이게 뭐야.
얼굴이 불타는 당근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관찰했다.
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시험당한 것보다 이게 더 서러웠다.
“저,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우는 모습이 신기해서.”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게끔 요이델의 고개를 위쪽으로 치들었다.
“눈도 코도 눈동자도 다 빨갛군요. 그러고 보면 당신은 여러모로 공작 내외를 안 닮았습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악마 같은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무서운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인가 봐.’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주륵 흐르는데 푸른 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울 거면 이렇게 제 앞에서만 우십시오. 지금 엄청 붕어 같으시니까.”
“헝, 흐엉…….”
“참 못생기게도 우십니다.”
“왜 그, 그렇게 나쁘게 말하세요?”
“멋지게 운다고 칭찬하면 더 이상합니다. 혼자 우는 것보다 지금 쏟아 내고 다 울면, 더는 슬프지 않으실 겁니다. 비록 붕어가 되시겠지만.”
그의 냉랭한 말에 나오려던 울음이 서서히 멎었다. 사람을 이렇게 이상하게 달래는 방법도 있구나.
율리시스는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이전에는 제가 좋은 소식을 잘못 짚었더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정말 좋은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소…… 흑, 소식이요?”
“이번엔 나쁜 소식은 없습니다.”
율리시스는 직접 몸을 숙여 요이델의 겉옷에 뭔가를 달아 주었다.
갑자기 훅 가까워져서 요이델은 눈을 꾹 감고 숨도 흐읍 참았다.
“……뱃지?”
눈을 뜨고 ‘좋은 소식’을 확인한 요이델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옷에는 날개가 찬란한 태양을 감싼 문양의 뱃지가 있었다.
성국을 상징하는 문장. 그중에서도 그는 좀 더 특별한, 오로지 성황만이 쓸 수 있는 오색찬란한 보석으로 만든 뱃지를 달고 있었다.
요이델의 가슴 쪽에 달린 뱃지도 같은 문양에 은색이었다.
“당신께 알려 드려야 할 가장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건…… 고위신관의 은색 뱃지잖아요?”
“그러니 당신의 것입니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햇병아리를 보며, 율리시스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정식으로 대신전의 일원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요이델 신관님.”
그의 말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두근 뛰었다. 밤바람이 잔잔히 불었다.
“모든 신관은 대신전에 들어오는 순간 본래의 가문을 잊어야 합니다. 제 눈앞의 사람은 요보힐데 공작가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성국의 신관입니까.”
“다, 당연히 저는 신관이에요!”
“그대가 보여 주었던 강단이 허상이 아니었다면, 증명하십시오.”
그러니 더 이상 외부의 사람인 공작 부부의 일에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 같았다.
마음이 몽글몽글 이상했다. 왜 성하가 꼭 나쁜 사람 중 가장 좋은…….
그냥 좋은 사람처럼 보일까. 환상인가? 환각? 환청?
“으앗!”
그때 율리시스의 겉옷이 요이델의 머리 위를 푹 덮어 시야가 까매졌다.
“이쪽은 보통 사람의 출입이 제한된 길이나, 혹시 모르니 가리십시오. 공개 울음 연회 하실 것 아니면.”
“아…….”
“이제 정식신관이시니 더 잘하셔야 합니다. 봐드리지 않을 겁니다. 제 페어라면 보통보다 더 뛰어나야 함은 당연합니다.”
신수 시험을 위해 굴렸던 걸 떠올리면 언제는 봐줬나 싶었지만 일단 끄덕였다.
율리시스의 겉옷이 펄럭펄럭 움직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저도 이제 진짜 신관이니까요!”
율리시스는 햇병아리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런데요, 혹시 성하 옷에 콧물 묻으면 어떡해요?”
“젠장…….”
“방금 욕하셨죠?”
“아닙니다.”
아닌데, 욕한 것 같은데. 요이델은 그의 겉옷으로 눈물을 슥슥 닦았다.
그러다 알 수 없는 따뜻함에 눈물이 또 나왔다.
“흑, 이거 뭘로 만, 만든 거예요? 왜 혼자만 좋은 망토 입어요? 다른 신관들한텐 이런 거, 꺽, 안 주시면서 혼자만 좋은 거 다 하고. 촉감도 끄읍, 좋네요.”
“인어가 남긴 비늘로 만든,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옷입니다. 세탁해서 돌려주십시오.”
“그러다가 쪼오, 쪼그라들면 어떡해요?”
“어쩌겠습니까. 목숨으로 갚으셔야지.”
“노, 농담이시죠?”
그는 침묵했다.
그리고 요이델은 바로 알아차렸다. 저거 진심이구나.
요이델은 얼굴이 최대한 옷에 묻지 않게 고개를 힘껏 숙였다. 목에 담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이상 울음이 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