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70)
70화
“부쩍 친하게 지내는 듯하던데, 요이델 신관에게 허튼소리를 한 건 아니라 믿소.”
“내가 뭘.”
아키스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말을 많이 한 건 맞지만, 허튼소리는 아니니 안 한 거 맞잖아?’
지오르베니는 아키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체력이 되고 무술이 되는 왕족으로 뽑아 오라고 했더니, 어떻게 저런 왕녀가 걸렸을까.
게다가 회의 외에는 이동에 제약이 걸리기까지.
‘이 정도면 라보르비치에서 일부러 이런 폭탄을 떠넘겨 준 것 같군.’
하지만 왕녀 아키스는 의외로 착실히 학술원 진행에는 도움을 주었다.
그럴 때를 보면 괜찮은가 싶다가도 그게 꼭 자신에게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면, 역시 거슬렸다.
‘어차피 왕녀도 쓰고 버릴 패. 상관없지.’
지오르베니는 회의장을 나가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요이델과 율리시스.
그들은 회의 종료 후에도 함께 걸어갔다.
하일의 기억에 따르면 이전에는 약간은 따로 행동하더니,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황이 더 아는 체를 하는 듯했다.
한편 요이델과 율리시스는 성황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요이델 님은 라보르비치의 왕녀에 대해 생각하십니까.”
“아키스 왕녀님이요?”
율리시스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요이델을 바라봤다.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에게 수발을 들게 했습니다. 그래도 좋은 사람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조금…… 귀여운 면이 있어요. 점점 그래요.”
“그렇군요. 그대의 아량은 포용 범위가 넓으신가 봅니다.”
율리시스는 요이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의 기분이 왜 안 좋아 보일까.
“그래서 제 부름도 미루시고 그 왕녀와 계셨습니까.”
“부르셨어요? 전달을 못 받았어요.”
오히려 요이델이 놀라 되물었다.
“오전에 전달드렸습니다. 시종을 통하여.”
“아, 오전에는 왕녀님이 하늘을 나는 마수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베리에게 다녀왔어요.”
“제법 친해지셨나 봅니다.”
“조금은요. 또래에다가 여자인 친구는 처음이라서요.”
율리시스는 얼굴을 예민하게 찡그리며 은발을 쓸었다.
“좋으셨겠습니다.”
“헤헤, 좋다기보다는― 으음, 그런가요? 듣고 보니 좋은 것 같기도 해요. 의외로 디저트 취향도 같아요. 그러네요? 좋은 것 같아요.”
“…….”
“왕녀님은 툴툴거려도 은근히 귀여운 점이 많아서 좀 좋아졌나 봐요.”
그런데 어쩐지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아! 물론! 지오르베니 님과 연관이 깊으니 정말 친해지면 안 되겠지만요. 본분은 명심하고 있어요!”
요이델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율리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는 푸른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그는 실소하듯 웃었다.
“참…… 유익한 시간을 보내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정말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요이델을 따라 억지로 생긋 웃은 율리시스는 도로 정색했다. 저 햇병아리의 조그만 입에서 종일 왕녀, 왕녀가 나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지난밤, 왕녀의 방문을 받았다.
‘허용된 곳 외에 이동은 금지입니다.’
‘알고 있으나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성황 성하. 저희 왕국과 브리칼트, 성국의 원로에 대한 긴밀한 말이니 시간을 내주실 가치는 있으실 겁니다. 잠시면 됩니다.’
그리고 왕녀가 해 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녀는 요이델이 이미 알고 있어, 자신에게도 말을 해 방안을 강구하고자 찾아왔다고 전했다.
율리시스는 왕녀가 지난밤 찾아왔다는 말을 요이델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알았다가 귀찮은 오해라도 만들면 안 되니까.
‘그런데 이 친밀함은 뭐지. 그쪽을 더 가깝게 느낀다 이건가?’
요이델은 그가 아닌 저쪽의 왕녀와 더 친한 듯 굴었다.
율리시스는 오늘따라 요이델이 마음에 안 들어 입을 다물기로 했다.
━━━━⊱⋆⊰━━━━
아키스는 요이델의 뒤꽁무니를 엄청 쫓아다녔다.
성황이 직접 내린 이동 제재 명령도 풀렸다.
“요이델! 같이 먹자. 너 없으면 나 밥 안 먹어.”
“요이델! 화장은 어떻게 해? 내가 해 봤는데 이상해. 네가 그려 줘!”
“요이델! 너도 같이 가. 아니면 나 아무 데도 안 갈래.”
물론 요이델은 들어주지 않았다.
“너 내가 굶어 죽어도 좋아?”
요이델의 앞을 가로막은 아키스는 싸늘히 말했다. 정작 시선이 마주치자 혼날까 봐 걱정하는 개처럼 귀를 내리면서.
그리고 요이델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는 신수에게 삿대질했다.
“이깟 짐승보다 내가 더 아래야?”
꽉.
플로테스는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힘차게 물어 버렸다.
“플로! 안 돼.”
“훙! 뿌우.”
플로테스는 아키스에게 콧방귀를 뀌고 요이델의 품을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다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 신수를 못마땅하게 본 아키스는 급히 요이델을 쳐다봤다.
“너, 나를 아키스라고 불러라.”
“아키스 왕녀님?”
“그냥 아키스라고. 어차피 기사 훈련으로 굴러서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낯설지도 않아.”
손에 굳은살이 많다 했더니 검도 잡을 줄 아는구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요이델을 흐뭇하게 여긴 아키스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나는 너 믿고 이제 다 얘기했어.”
아키스의 눈빛이 뜨거웠다.
“네 말 믿어도 돼?”
“네.”
“너 믿어도 돼?”
“네. 약속할게요.”
“그럼 나랑 친구 하자.”
친구.
요이델의 가슴을 울리는 마법의 단어였다.
게다가 최초로 여자인 친구다.
“정말이에요?”
“당연하지.”
“저, 여자인 친구는 처음이에요!”
“너는 여자가 좋아?”
아키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지금 자신은 남장 상태니까 여자가 좋아, 라고 하면 이성에 관심이 지대한 것 같아서 민망하다.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앞서 기뻐했으니 모호했다.
“아키스라서 더 좋아요.”
요이델은 적절한 결론을 도출하며 수줍게 웃었다. 아키스는 가슴이 뭉클한 듯 심장에 손을 올렸다.
“그럼 나랑 결혼할까.”
“……으응?”
아키스는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만! 난 아키스와 결혼할 수 없어요! 왜 그쪽으로 튀는 거예요?”
“왜? 친구에서 연인은 흔하잖아.”
“저, 저는 그러니까…….”
남자가 아니라 여자니까!
아키스는 자신을 남자로 알고 있어서 청혼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뭐?”
“정말로 혼인할 수 없어요.”
“성국의 신관들은 결혼 가능해. 나를 바보로 알아?”
“그 이유가 아니에요. 그건 조금 더…….”
“변명하지 마. 내가 싫은 거지?”
아키스의 목소리가 습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믿던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아키스는 요이델의 눈치를 보며 눈시울을 슥 닦았다.
“아니에요. 정말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런 이유가 있어서, 아무튼 안 돼요.”
아키스가 자신을 잘 따르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고, 거기다 남장 중인 여자야.”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청혼을 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만일 자신이 아키스의 첫사랑이라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아키스의 눈빛이 타올랐다.
“나라를 주면 돼?”
“아뇨.”
“보석을 주면 돼?”
“그것도 안 돼요.”
“그럼 왕가의 보물이라도 줘? 그건 돼?”
“안 돼요! 저는 사실…….”
예민하고 여린 영애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고 싶지 않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해 줄 필요는 있었다.
요이델은 그녀의 구애를 필사적으로 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탁!
팅그르르―
잡은 손을 꽉 쥐는 힘에 의해 요이델의 반지가 튕겨 나갔다.
“뭐야, 너.”
황급히 반지를 주웠으나 이미 늦었다. 봤겠지? 다 봤을 거야.
아키스의 행동이 우뚝 멎었다.
“……여자?”
“생애 한 번 있을 첫사랑을 망치게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희는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예요! 왕녀님은 저를 남자로 알고 계셨겠지만―”
“난 또, 뭐라고.”
아키스는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요이델을 바라보고 웃었다.
“알아.”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가는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안 들켰나 궁금했는데 역시 그 반지가 강력했나 보네.”
“어떻게 그걸…….”
“안 지 좀 됐는데? 너 졸 때 반지가 신기해서 빼 봤어. 남자가 등 쪽 리본을 묶는 데도 능숙하길래. 살이 다 보이는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네?”
“너희 성하는 멍청이야. 네가 이렇게 귀여운데 왜 지금까지 모르지?”
요이델의 입이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어쨌든 성황이 몰랐다는 건 눈이 삐었거나 내가 너를 채 가라고 하늘이 도와줬던가. 그렇겠지?”
아키스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밑단을 들며 요이델에게 다가갔다.
간격은 좁혀지고 마침내.
쿵.
주춤주춤 물러난 요이델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얼굴 옆에 팔을 대어 진로를 가로막은 아키스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밤이라 그늘진 얼굴 속에서도 눈빛은 발화하듯 빛났다.
아래로 내리까는 눈매는 깊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저 통째로 떨어지는 붉은 머리카락도.
‘뭐가 떨어져? 머리카락?’
아키스는 드레스를 훌렁 벗어 던졌다.
“아무리 그러셔도 갑자기 탈의는 안 돼요! 저는 왕녀님과 결혼할 수 없어요!”
과감한 탈의에 놀란 요이델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 자리에 아키스는 없었다.
화려한 영애는 온데간데없고 간편한 바지 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내 시력이 이상한가 봐.’
미소 지은 아키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나도 남자거든.”
━━━━⊱⋆⊰━━━━
“성하!”
쾅!
늦은 밤, 휘스테론은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었다.
율리시스는 느닷없이 뛰쳐 온 성기사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뜩이나 마음이 불쾌하던 참인데.
“헉, 허억, 그게.”
휘스테론은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성하 생각이 맞았어! 걔, 아니 그 왕녀, 아니 왕자, 아니 왕녀? 아무튼 걔.”
율리시스는 휘스테론이 건넨 서류를 넘겨 보며 덤덤한 얼굴을 했다.
짐작했던 바지만, 정말 이런 수까지 써 가며 자신의 혈족을 팔아 치울 줄이야.
율리시스의 푸른 눈이 깊은 심해로 눌리듯 가라앉았다.
“성하는 어떻게 알았어? 티도 안 나던데.”
“…….”
“델을 보는 눈빛이 장난 아니다 싶었는데, 어쩐지. 그래서 진드기처럼 찰싹 붙어 있었네.”
“무엇이 ‘어쩐지’라는 말입니까.”
방금 받은 보고와 요이델 사이에 무슨 유기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물음에 휘스테론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성하, 델은 못 봤어? 이 밤에 어디 갔지? 요즘 그 왕족이랑 친하게 지내던데 놀러 갔나.”
“요이델 신관님이라면 응당 처소에서 잠을 청하지 않겠습니까.”
“응? 보고 오는 길인데 없던데?”
“이 새벽에 무슨…….”
쾅!
그때 라이오스가 급히 들어왔다.
“성하.”
그는 율리시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라이오스는 옅은 금발의 머리를 앞으로 깊게 숙였다.
내민 것은 요이델의 반지와 아키스가 입고 있던 드레스였다.
“요이델 신관님께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행방이 묘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