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touch it, it'd all be profit RAW novel - Chapter (188)
“그게 무슨 말이야? 어렵네.”
그러자.
파르르 떨리던 연붉은 입술이 몽글한 입김을 내뱉었다.
“나랑 결혼해줄래요?”
내 평생 기억에 남을 문장과 함께.
“······.”
“······.”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오늘따라 채연이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는 건 느꼈지만,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전개일 거라곤 예상도 못하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
머릿속에도 여러 장면이 스쳐지나갔고.
그녀의 결말, 그녀의 스토리에.
반전은 없었다.
“······좋아.”
내 대답은 이미 시놉에 적혀 있었을지도.
“또······ 정답이네.”
채연이는 엄청 긴장했었는지.
온 얼굴이 일순간에 말랑말랑해졌고.
“다 맞췄는데 뭐 없어?”
“있지. 자, 선물······.”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불꽃이었다.
탐코코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평창동 대저택.
외떨어진 별채 2층.
나는 확신했다.
바로 지금이 「편지」가 실현되는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편지」 속 그 장소라고.
한 벽면을 가득 메운 푸른 수조에서.
오만하게 유영하는 황금빛 진격의 생선이 그 첫 번째 단서였고.
“어이구, 우리 손주 왔는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정기현.
저 얼굴, 저 옷차림, 저 인사가 두 번째 단서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불운」과 「행운」은 확정된 미래가 아니었다.
만약 그 모든 「편지」가 확정된 미래였다면.
유열은 골방에서 심장을 움켜잡고 골골대고 있어야 했으며 성수동 건물은 후레자식 빚 갚느라 팔렸어야 했다.
결국 「편지」는.
과거의 이면 혹은 미래의 편린일 뿐.
언제나 그 정보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현실로 만드는 건 나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아이, 아주 잘 지냈지. 희소식을 들었거든.”
역시······ 정기현이 내뱉은 답은 「편지」와 달라져있었다.
달라진 미래.
내 대답 하나, 반응 하나에 더 신중해야 했다.
“아, 혹시 저도 아는 그 희소식입니까?”
“클클, 축하하네. 우리 막둥이랑 앞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면 좋겠구만.”
정기현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들고 있던 케익 상자를 다른 손으로 옮기며 정기현의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 언제까지 나한테 그렇게 격식 차릴 거야? 자꾸 그러면 섭해?”
“네?”
“할아버님, 할아버지. 뭐가 됐든 자네 편한대로 부르라고.”
기대에 가득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정기현.
‘미치겠네.’
상당히 민망했지만, 또 이제 정말 그런 관계가 될 사이였으니······.
“그럼 이렇게 사적으로 뵐 때는 좀 더 편하게 부르겠습니다······ 할아버님.”
“뭐라고?”
“예?”
“아니, 내가 요즘 잘 들리지가 않아.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정기현은 귀에 손을 갖다대며 너스레를 떨었고,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앞으로 할아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 그래그래! 그것 참 아주 듣기 좋구만.”
정기현은 흡족스럽게 웃더니 날 감싸안고 소파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앉지. 그런데 자네, 그 케익은 왜 가져왔나? 여기도 주전부리할 거 많은데.”
내 손에 들린 케익 상자를 가리키는 정기현.
‘눈치 못 채셨나?’
분명히 상자에 ‘남산클럽 카페테리아’라고 영어로 적혀있는데 그건 못 본 모양이었다.
나는 그 로고가 잘 보이도록 상자를 돌려서 테이블에 올리며 말했다.
“회장님이 선물로 주셨던 케익입니다.”
“아, 그런가?”
정기현은 이제야 로고를 알아보더니 별안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 그때 그 녀석이군······.”
정기현은 내가 이 케익상자를 가져온 이유, 오늘 여기에 온 용건도 읽어낸 듯했다.
“그래, 그래서. 내 질문에 답은 안 한 것 같은데. 내 다시 묻지. 이 케익은 왜 가져왔나?”
나는 정기현의 담담한 눈빛을 바라보며.
「초특대 행운의 편지」를 떠올렸다.
[ 여튼, 일전에 말한 선물은 고민 좀 해봤는가? ]「편지」에서는 정기현이 먼저 포문을 열었고.
[ 어허, 준다고 할 때 받아! 착각하지 말게. 자네가 원해서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주는 거야. 내가 자네를 예뻐해서 주는 거라고. ]이어지는 대화도 정기현이 줄곧 주도했다.
내 말소리는 우웅거리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고받는 맥락으로 파악컨대 나는 우물쭈물하며 괜찮다, 안 그러셔도 된다고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 마지막에 내게 던졌던 질문.
[ 그 모든 게 자네 대답 여하에 달려있단 말이네. 그러니까 말해보게. 어느 회사를 원하나? ]참······ 처음에는 이 「편지」가 얼마나 터무니없게 들렸던지.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와 민채연의 관계도.
내가 막고자 했던 비극도.
>크리스티>와 >HN백화점>으로 얽혀있는 일도.
전부 이 >HN그룹> 일가를 향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야.’
내가 이 미래를 거부하려고 해도 필시 이렇게 되었을 터였다. 내가 더 잘보이겠다고 애를 썼어도 별일없이 이렇게 될 일이었다.
이 모든 게 운명일까?
만약 필연적인 운명이었다면 「편지」는 무익한 아이템일지도······.
그러나.
「편지」는 내게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준비할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충분히 고민하고, 결론을 내릴 시간을 벌었으니까.
“케익을 가져온 이유는, 보시면 아실 겁니다.”
“뭘?”
지척까지 다가온 미래.
이제는 내가 그것을 쥐고 흔들기로 했다.
나는 케익 상자를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엇갈려 맞물리던 상자 날개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그렇게 완전히 속을 드러낸 종이상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빈 찬합.
“흐음······.”
정기현은 그걸 보자마자 침음을 흘렸다.
치즈케익 한 조각이라 쓰고.
HN 계열사라고 읽으면 되는 것.
선물이라며 내 손에 들려주었던 그것이 지금은 홀연히 사라져 있었기 때문.
“이게 자네 뜻인가?”
유난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네, 오래 고민한 결과입니다.”
“허, 참······.”
정기현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곤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클클······ 닮았다, 닮았다 했더니 이런 것까지 똑닮았을 줄은 몰랐구만.”
“네? 누구 말씀하시는 건지······.”
“아냐, 자네는 알 거 없어.”
정기현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적의보단 실망과 자책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일말의 정적.
정기현은 어딘가 짙은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자네도 그런가? 내가 가진 것들이······ 자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나?”
‘자네도’ 라고?
무슨 과거가 있는 걸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뇨, 있습니다.”
누군지 모를 ‘그’와 달리.
나는 정기현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다.
“그으래?”
정기현은 급히 허리를 당겼다.
“뭐, 원하는 게 있는가? 얼마든지 편하게 말해보게.”
베푸는 입장이면서도.
내가 무언가 원하길 오히려 바라는 것 같은 정기현.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돈을 버는 회사가 아니라 돈을 쓰는 회사에 관심이 있습니다.”
“······돈을 쓰는 회사?”
정기현의 미간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
나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개 카페 대리였던 내가 대기업 오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미래를 앞서기 위해 달리는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에게도 자극을 받았었다.
원천기술 연구하고 개발하는 알짜 계열사 하나 받아서 우리 탐코코랑 세계 최고로 만들어 봐?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매크로」, 「핫 핸드」, 「도미노」 같은 스킬들을 잘 써먹으면 허황된 꿈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
──축하합니다!
──《찬란한 30대: 별의 탄생》 클리어 조건 《1. 재력》이 해금되었습니다!
그 메시지가 내게 또다른 질문을 던졌다.
《별의 탄생》 이후로 분명히 돈을 많이 썼는데.
왜 《2. 전문성》은 해금되지 않을까.
돈만 많이 쓴다고 되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중.
문득 미스터 빅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의 전문성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
코코한테 선물하겠다며 멜라니의 조각품을 낙찰받으면서 《튜토리얼의 끝》을 클리어했던 기억.
그렇다면.
《별의 탄생: 전문성》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돈을 쓰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날.
그 반짝이던 연못, 민채연이 나긋나긋 말했다.
[ 오빠는 꿈을 이룬 거네요? 진짜 갖고 싶어했는데 가졌잖아. ]그 말을 듣는데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HN계열사를 소유하고 경영하는 게 내 꿈인가?
아니, 전혀 아니었다.
일은 적게 할수록 좋았다.
그런데 대기업을 책임지고 관리한다고?
‘오, 쉣이지.’
돈도 이미 충분히 많았다.
1년도 안 돼서 1,000억 넘게 벌지 않았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는 무한한 부(富)가 뒤따를 거란 낙관과 희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굳이?
사서 고생을?
[ 오빠는 꿈을 이뤘잖아요. 그럼 혹시······ 내 꿈도 이뤄줄래요? ]그렇게 나는 깨달았다.
내 꿈이 산산조각나지 않게.
소중히 아끼고, 보살피는 것.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것.
‘탐코코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게 내겐 더 가치있는 일이었다.
내 적성에 잘 맞기도 했고.
“······돈을 쓰는 회사?”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정기현에게 말했다.
“네, HN그룹에도 하나 있지 않나요.”
“돈은 모든 회사가 다 쓰지?”
“그렇긴 합니다만, 돈을 잘 쓰는 게 목적인 곳이 있지 않습니까.”
“······아.”
정기현은 머리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자네, 지금 >HN재단>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서울중앙병원>도 이 재단 소속인 건 알고?”
“당연하죠.”
>HN재단>.
매출로 보나, 병상 수로 보나 한국 1위인 >서울중앙병원>을 보유한 곳.
그뿐이랴.
전국 각지에 상급종합병원 8곳을 보유하고.
사회복지, 의료복지, 장학사업까지 도맡아 하는 공익재단이 바로 >HN재단>이었다.
“잠깐만. 돈을 쓰는 건 맞지, 맞는데······.”
정기현은 급히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런 답을 줄 거라곤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미래를 쥐고 흔들기로 했으니.
더 제대로 휘둘러야겠지.
내 뜻을 더 확실히 전달하기로 했다.
“제가 돈 버는 것보다 쓰는 걸 더 잘합니다.”
“그래? 자네 걸어다니는 중소기업 아닌가?”
“아무리 많이 벌어도 잘 쓰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제 전문성도 소비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제 사업들도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만드는 일인데 >HN그룹>에도 마침 비슷한 일을 하는 조직이 있어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래, 흠······.”
턱을 괴고, 고민에 빠진 정기현.
당연히 그 거대한 재단을 내게 선뜻 내줄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다.
다만.
나름대로 준비한 명분은 있었다.
“그리고 회장님, >HN재단>에서 공익 목적으로만 돈을 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기현이 날 정말로 신뢰한다면.
>HN재단>을 맡길 수밖에 없는 명분.
“허, 참······ 어디까지 알고 말하는 건가?”
“적당히 압니다. 어떤 케익이 좋을지 알아서 알아보라고 하셔서.”
“클클······ 맞아, 그랬지.”
정기현은 날 흘겨보며 비시시 웃더니.
테이블을 탁! 내려쳤다.
“오케이! 다음에 또 이야기하지.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자네, 의외로 간이 크구만?”
“하하, 지금 당장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우선은 재단 사업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으래?”
“꼭 >HN재단>이 아니어도 제가 따로 재단을 설립할 마음도 있어서요.”
“호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생각 좀 해보고 연락주겠네.”
“네, 회장님.”
이 정도면 충분한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아, 이놈이!”
정기현은 후다닥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내 목에 팔을 감고, 헤드락을 걸었다.
“언제까지 회장님, 회장님 할 생각인가!”
“악!”
“다음에 또 그렇게 부를 때마다 헤드락일 줄 알어!”
“넵, 할아버님!”
“클클, 그래! 얼마나 듣기 좋아!”
······이러다 너무 격의 없는 사이가 되는게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
신유원을 보낸 뒤.
와인 한 잔을 들고 >월광> 앞으로 온 정기현.
그 검푸른 달빛을 느리게 훑으며.
그는 막내아들 정수현을 떠올렸다.
“······.”
고된 일이다, 그렇게 안 살아도 된다.
아니, 그렇게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리고 말려도.
결국 미국까지 날아가서 존스홉킨스 의대에 들어갔던 그 고집불통 막내아들.
[ 아버지가 가진 것은 제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래? 네놈한테 의술이 그렇게 의미가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주마, 뜻을 펼쳐보거라.
그런 마음으로 정기현이 설립했던 게 바로 >HN재단>이었고, >서울중앙병원>이었다.
그러나 세상도 야속하시지.
정수현은 자신을 위해 지어진 병원과 재단을 보지도 못한 채, 아니 존재조차도 모른 채 총기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그 막내아들을 똑닮은 녀석이 나타나더니 하필 관심있다는 게 그 재단, 그 병원이라니.
“클클······.”
이런 운명을 저주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라도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라며 운명에 감사해야 할까.
정기현은 와인을 홀짝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감상적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었다.
신유원의 제안은 분명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뼈가 있었다.
>서울중앙병원> 작년도 매출액이 2조 5천억.
웬만한 대기업 못지않은 규모였다.
게다가 병원이라는 특성상.
유동자산을 확보하기에 아주 유리했다.
>서울중앙병원>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만 7천 억 가량 정도이니.
그리고 그 >HN재단>의 현금을 이용해.
정기현은 그룹사 곳곳의 지분을 사들여 지배권을 통제하고 있었다.
괜히 이연수를 >HN재단> 이사장에 앉힌 게 아니었던 것.
>HN재단>에는 이연수.
>HN그룹>의 최상위 지배회사인 >HN솔루션>에는 김치호.
정기현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두 사람이 >HN그룹>이라는 초대형 마차를 이끄는 마부인 셈이었다.
그러므로.
[ 그리고 회장님, >HN재단>에서 공익 목적으로만 돈을 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신유원의 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HN그룹>의 지배구조와 승계질서를 개편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믿고, 맡기라는 의미였으니.
그렇다고 이 그룹을 다 집어삼키겠다는 야망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도와줄 테니 재단에 자리를 얻어달라.
그럼 앞으로 좋은 일이나 하며 살겠다, 정도에 더 가까웠지.
“······역시 보통놈이 아니구만.”
정기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에게도 퍽 반가운 제안이었으니까.
제대로 믿을 놈 하나 없는 이 밥그릇 싸움.
든든한 마부 하나 더 얻어서 나쁠 건 없었다.
심지어 이연수의 건강도 심히 악화된 상태 아닌가.
‘이 여사도 좀 쉬어야지.’
정기현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대신, 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이 여사, 아직 안 잤어? 그래그래. 아니, 내가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정기현은 >월광>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보름 뒤쯤에 재단 이사회 열리잖어. 그때, 이사장 대리 하나 필요하지 않겠어?”
백의를 두른 괴도
성큼성큼 코앞까지 다가온 연말.
평소라면 도대체 내가 올 한 해 뭘 했다고 벌써 이렇게 끝이 나나, 이렇게 부질없이 또 한 살을 먹는 걸까, 실망했겠지만.
올해는 달랐다.
그간의 노력이 만들어낸 과즙이 이 겨울에도 팡팡 터지고 있었으니까.
[ 선배님! 저희, 저희 1차 심사 통과했습니다! ]잔뜩 상기된 목소리의 주인공.
>화사한> 얼간이 3인방 중 그나마 정상, 이화준이었다.
나는 거실 테이블에 은빛 손톱깎이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오, 축하드립니다!”
다이소 중국제 20개를 부어서 만든 레전더리급 손톱깎이라서 테스트하려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소식이라면 잠시 미룰 수밖에.
[ 진짜 대박입니다! 으아아! ]폰 너머로 다른 두 멤버들이 울부짖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런데 화준 씨. 무슨 심사인데요?”
[ 네? ]“일단 축하는 드렸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아아, 저희 >iF 어워드> 인테리어 부문에 여의도 팝업스토어 디자인 접수했었거든요. 그거 1차 온라인 심사, 가뿐하게 통과해버렸습니다! ]>iF 어워드>.
디자인 전공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레드닷>, >IDEA>와 더불어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였으니까.
“진짜 대박 맞네요?”
[ 그니까요! 담당자한테 전화도 왔습니다. 수상 유력 후보라고, 2차 프리젠테이션 잘 준비하라고요! ]“와······ PT는 어디서 하는데요?”
[ 본사, 거기 어디였지, 독일 하노버요! ]독일까지 가서 PT를 한다고?
역시 세 얼간이······.
나 같은 범재와는 끕이 다른 녀석들이었다.
“축하해요. 좋은 소식 들으니까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아아, 그랬지.
그래야 넘어올 거 같아서. 예산도 무제한으로 줬었고.
[ 저희 상 받으면 선배님한테 큰절 100번 올리고, 소고기 100키로 사드리겠습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폰 너머에서 메아리처럼 계속 들려오는 감사합니다, 고맙슴다, 선배님 리스펙······.
잠시 귀를 떼고 있다가 겨우 통화를 끝마쳤다.
“······진짜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래도 우리 카페 디자인으로 그렇게 잘 됐다니 기분은 너무 좋았다.
팝업스토어 대박에 >화사한>의 공도 컸으니.
그야말로 윈윈.
‘간 김에 본상도 탔으면 좋겠네.’
그들의 축복을 기원하고는 다시 레전더리 손톱깎이를 테스트하려는데 또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또랑또랑한 목소리.
진예나였다.
“봤죠. 일 매출 보고도 아까 받았는데 효과 좋은 것 같던데요?”
주해림이 그랬었다.
지금 추이라면 12월 >마켓킬리> 콜드브루 매출이 200% 이상 뛸 것 같다고.
[ 그냥 좋다고요? 연말 베스트 에디션에다가 그것도 제일 앞자리에다 넣어줬는데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니죠. ]생색은.
자기도 우리 커피가 잘 팔릴 것 같으니까 돈 벌려고 넣은 거 아냐.
그치만 사업이란 게 별 거 있나.
좋은 게 좋은 거지.
“맞습니다. 진 대표님이 최고십니다.”
근데 오늘따라 좀 까칠하시네.
왜 그러실까.
[ 그리고······ 저희 우수 입점업체 대표님들 초대해서 뉴이어 이브 파티할 건데 오실 거죠? ]뉴이어 이브 파티?
“송년회요?”
[ 네. ]“일정 알려주시면 참석해볼게요.”
[ 네, 좋아요. 그······ 만나는 분이랑 같이 오시든가, 그거는 자유롭게 하시구요. ]어?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는 잠시 벙쪄서 답을 못하고 있다가 떠올렸다. 진성그룹이라면 어떻게든 알 방법이 있겠구나 하고.
아니면 혹시.
정기현이 재벌모임에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나?
“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네.”
참, 이 사람 한결 같네.
겉과 속이 똑같아서 좋아.
어쨌든 이렇게 잘 챙겨주면 고마웠다.
12월에 이렇게 바짝 땡겨주면 콜드브루로만 연 매출 100억을 넘길 기세였으니까.
연말 선물로 뭐 하나 보내야겠다 생각하는데.
“어, 나온다!”
마침 TV에서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CF가 흘러나왔다.
아주 전형적이고 진부한 게임 CF였다.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로를 견제하는 남자 2명과 인게임 플레이 화면이 교차되는 영상.
‘이건 뭐 어쩔 수 없었지.’
납기도 급했고, TV CF는 워낙 짧은 터라.
>코덜트> 팀에게도 최대한 쉽고, 결과물이 빨리 나올 수 있는 기획으로 부탁했으니까.
풀 스토리는 유튜브 바이럴 쪽에서 길게 풀릴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CF에는 한방이 있었다.
[ 냥─! ]고양이 귀를 달고 냥냥 펀치를 날리는 우리 초절정존예 배우님의 등장.
‘진짜 예쁘다······.’
요즘은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CF로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새롭고 짜릿한지.
으아아······ 마음 같아서는 유튜브에서 100번도 더 돌려보고 싶은 장면.
그치만 그럼 재미가 없지.
이렇게 TV에서 나오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실시간으로 보는 게 더 재밌었다.
길이가 십 몇 초밖에 안 돼서 아쉬운 맛도 있었고.
“아, 또 보고 싶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CF가 방영된 직후 각종 커뮤니티 베스트 게시글에 우리 CF 짤이 올라오고, 이 여신은 누구냐며 난리가 났으니.
‘누구긴 누구야. 내 약혼자다, 이것들아.’
돈 들여 찍길 잘한 것 같았다.
여러모로 효과도, 타이밍도 다 좋았다.
원래도 반응이 좋았던 >갓냥이는 살고 싶어!>는 며칠째 앱마켓 1위를 고수하는 중이었다.
종전 1위였던 >넥스트소프트> RPG 신작마저 밀어낸 엄청난 기세였다.
‘준호 말로는 중장년층 유저가 확 늘었다던데.’
배우기 쉽고 친숙한 캐쥬얼 게임이라.
TV CF의 효과를 톡톡히 누린 셈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민채연이 이슈가 되면, 슬슬 출격 준비 중인 >생존보험> 홍보에도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터.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올 한 해 열심히 살았다.
아니, 잘 살았다.
흐뭇하게 자평하며 레전더리급 손톱깎이를 집어들었는데 또 걸려온 전화.
‘아니, 누가 내 거실에 몰카 설치했어?’
어떻게 손톱깎이만 들면 전화가 오나.
한숨쉬며 폰을 봤더니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일단 받았다.
“네, 신유원입니다.”
[ 아, 신 대표님 안녕하세요. ]낮은 톤으로 울리는 중성적인 목소리.
익숙한 음성이었다.
“어? 유 회장님이십니까?”
[ 오, 어떻게 단번에 알아들으시네요? ]“하하, 그러게요.”
맞구나.
>남산클럽>에서 만났던 >넥스트소프트> 회장, 유가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 다름이 아니라 저희 식사 한 번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 목요일 저녁 아니면 금요일 점심, 일정 어때요? ]아아, 이렇게 갑자기?
목요일 저녁, 금요일 점심······ 다 괜찮은데.
“저는 다 좋습니다.”
[ 하하, 좋아요. 그럼 혹시 >파크레인 소프트> 대표님이랑도 일정 맞춰주실 수 있나요? ]>파크레인 소프트> 대표랑?
이게 무슨 상황이지, 고민하는데 유가인이 바로 용건을 말했다.
[ >갓냥이> 때문에 제가 요즘 머리가 좀 많이 아프거든요? ]“아······.”
회장님이 30시간이나 플레이할 여유가 돼?
아, 게임회사 회장님이니까 당연한 건가.
[ 그래서 건설적인 미래를 같이 그려보자는 의미에서 그쪽 대표님이랑도 이야기 좀 해보고 싶은데. 제가 직접 연락할까 했는데 신 대표님이랑 이야기하는 게 더 매끄러울 것 같아서요. ]뭐야, 이거 미친 호재였네······.
우리 준호, 이렇게 빨리 엑싯하는 거야?
아니다, 엑싯 안 하는 게 이득인가?
이건 성좌님도 불러서 다 같이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네.
일단 눈앞의 일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가 그쪽이랑 연락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하하, 고마워요. ]“네, 비서님 연락처 하나만 남겨주십쇼.”
[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이 번호로 바로 연락줘요. 거추장스럽게 여럿 거칠 거 없잖아요? ]아주 시원하신 분이었다.
“좋습니다, 회장님.”
그렇게 통화를 끝마치고.
마침내 다시 집어든 손톱깎이.
따각─
따각─
“이야, 죽인다······.”
내 예쁜 손톱처럼.
올해도 깔끔하게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아, 참! 메일 마저 보내야지!’
물론 새로 착수한 헬스케어 프로젝트는.
아직 비밀이었다.
*
그 시각, 서울중앙병원.
흉부외과 임상과장 박호종 교수는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세상에 미친놈이 한둘이 아니야······.’
요 며칠째 도착한 괴상한 메일 때문이었다.
[ 제목: 1217 오진 리포트 ─ 흉부외과 ] [ 안녕하세요. 12월 17일자 흉부외과 오진 리포트 첨부합니다. 꼼꼼히 살펴보셔서 아무쪼록 환자분들 치료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같은 내용.
같은 첨부파일.
“하놔······.”
바이러스나 랜섬웨어를 심어뒀을까 봐 열어보지도 않고, 바로 휴지통에 버렸다.
스팸메일 등록도 잊지 않았다.
다만, 효과는 없었다.
발송 이메일 주소는 매일 달라졌으니까.
“정성이다, 정성이야.”
심지어 이 메일을 받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진료과, 직급 가리지 않고 의사란 의사에게 전부 발송되고 있는 모양.
덕분에 병원 여기저기 소문도 파다했다.
들어보니까 실제 환자명, 병명까지 다 적혀있다던데.
‘참, 큰일이야.’
그렇게 환자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면 인턴, 레지, 간호사, 사무직원 중 하나일 텐데.
‘누구한테 앙심을 품고 이러나.’
정말로 그런 거라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행동이었다.
개인정보 침해, 영업 방해, 명예훼손 등등 해서 까딱하면 감방에 들어갈 수도 있는 짓이었으니까.
‘다들 바쁘니까 쉬쉬하는 거지.’
박호종은 혀를 차며 교수실을 나섰다.
띵─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
다른 과 인턴들이 타고 있길래 짧게 목례하고 올라탔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야, 그거 오늘 꺼 확인해봤어?”
“어.”
“어떻게 됐는데?”
“또 없어졌어.”
“진짜로?”
“어, 진짜. 미쳤다니까.”
박호종은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귀를 닫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럼 어제 그 환자, 미스가 맞았단 거네?”
“어! 그 선배 또 멀쩡한 유방 절개할 뻔했잖아.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귀를 의심케 만드는 이야기들.
“근데 진짜 그렇게 제대로 진단하고 나니까 그 리포트에서 그 환자 이름이 빠져있는 거야.”
“······소오름.”
“미쳤지? 뭐하는 사람이야, 도대체?”
박호종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휙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그 이야기, 오진 리포트라고 오는 메일 이야깁니까?”
인턴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답했다.
“네, 맞습니다.”
“거기에 적혀있는 게 사실이었다고요?”
“예······.”
박호종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자들이 그런 찌라시에 속어넘어갔다니, 히포크라테스가 무덤에서 통곡할 일이었다.
“폴스 파지티브는 암 진단에 있어서 필연적인 부산물입니다. 웬 미친놈이 우연히 때려맞췄다고 믿을 생각이었습니까?”
“아······.”
말문을 잃은 인턴들.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하며 박호종은 시선을 뗐다.
그런데.
“저, 박 교수님······ 우연히 맞춘 게 아닙니다.”
“뭐요?”
“그 오진 리포트, 맞아떨어진 게 벌써 4번째입니다.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구요.”
박호종의 세계관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저희도 어이가 없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근데 그렇다니까요? 교수님은 그 파일 안 열어보셨어요?”
미친, 쌩 지랄을 하고 있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박호종은 속으로 욕을 뱉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띵──
그 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
박호종은 내리지 않았다.
‘민낯을 제대로 밝혀주지.’
그놈의 오진 리포트를 제대로 해부할 생각이었다. 이대로라면 병원 전체 분위기가 흐려질 것 같았으니.
다시 돌아온 교수실.
박호종은 오늘자 흉부외과 오진 리포트를 다운받아서 열었다.
적혀있는 건 오직 1명.
폐식도외과 전공의에게 폐결핵 의심 진단을 받은 환자였다.
‘근데 폐암 가능성이 높다고? 돌겠네.’
폐암은 유방암과 더불어 통계적으로 가장 오진이 많은 질병. 폐결핵과 폐암을 서로 오진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환자 1명을 콕 집어서 맞힐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말도 안 되지!’
박호종은 다른 모니터에 해당 환자의 진료차트를 열어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때, 화면이 새로 업데이트되더니.
담당 전공의가 실시간으로 기입한 진단명이 나타났다.
“······암이라고?”
충격에 빠진 박호종.
벼락에 맞은 듯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게 어떻게······.”
서울중앙병원에 백의를 두른 괴도가 나타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