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158
157화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때가 되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배 위, 한 남자가 대머리로 석양을 비추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후.”
그의 이름은 빅토르 페트로프. 일명 ‘불곰’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레드 마피아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인 ‘드라콘’에서도 나름 입지 있는 인물로, 주먹도 쓸 만하고 수완도 좋아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극동(極東)지역의 밀수는 거의 다 빅토르가 맡고 있다고 봐도 될 수준.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닥터…….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보스의 명령까지 받아낸 거지?”
빅토르는 처음 보스의 명령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닥터’라는 놈의 부탁대로, 거래를 마친 뒤 한국인 한 명을 죽여라. 그게 보스의 명령이었다.
물론 보스의 말이니 따르긴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했다.
목표가 누구길래 보스한테 부탁을 하면서까지 살인을 의뢰하는 건지 말이다.
‘뭐, 나한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의뢰 내용이 상당히 수상하긴 해도, 빅토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빅토르는 정광제와의 거래만 잘 마치고 거액의 돈과 함께 조직으로 돌아가면 된다.
탁.
바다에 꽁초를 튕겨 버린 빅토르가 난간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하를 불러 물었다.
“소음기 달린 것들은 준비해놨나?”
“예. 권총으로 20자루, SMG로 10자루입니다.”
“오케이.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한국인 하나 처리하는 데엔 차고 넘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빅토르는 다시 배의 난간 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부산 땅이 점점 눈에 보이던 그때.
“음?”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빅토르가 주변의 바다를 휙휙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빅토르는 분명 뭔가를 느낀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물고기였나…….’
대수롭지 않게 넘긴 빅토르는 다시 육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이주혁 씨.”
“예. 또 보네요.”
나는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간단하게 먹은 뒤, 강유찬을 만나기 위해 항구로 이동했다.
거기 도착하니 해가 져 어둑어둑한 항구에서 강유찬 혼자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없나 봅니다?”
“예. 클라이언트는 잠시 후에 도착하실 겁니다.”
“그래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강유찬의 말대로, 작은 항구에는 인부로 보이는 몇 명만 돌아다닐 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정확히 뭘 하면 됩니까? 그냥 클라이언트 옆에서 대기하면 되는 겁니까?”
“예. 명목상 경호긴 한데, 크게 하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애초부터 경호가 필요 없던 거 아닙니까?”
“사실 그렇긴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성의 표시죠.”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러면 대놓고 날 데려오기 위해서 한 의뢰라는 거 아닌가?
강유찬도 내가 정말로 경호원인 줄 알고 따라왔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젠 날 설득할 생각도 없나 보네.
여기까지 왔으니 개연성 같은 건 생각 안 한다 이거지?
“뭐 자잘한 건 넘어가고, 절 벌써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이주혁 씨.”
“예.”
“음……. 제가 소문을 들었는데, 이 근처 식당에서 작은 문제가 좀 생겼더라고요.”
그게 벌써 이놈 귀에 들어갔어?
선생의 연락책을 맡고 있다더니, 소식통 하나는 빠르구만.
“문제라니요.”
내가 시치미를 떼자, 강유찬이 마른세수를 하며 물었다.
“제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고 계시잖습니까?”
“어차피 국제파는 이번 거래랑 상관없다면서요?”
“문제 일으키지 말아 주시라 한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 서비스가 별로라 한마디 했더니 죽자고 달려들지 않습니까. 근데 뭐 그걸 그냥 맞고 있어요?”
강유찬은 할 말이 없는지 혀를 내둘렀다.
“그거 때문에 부르신 거면 다시 가보겠습니다. 9시 전까지 좀 쉬고 싶네요.”
“그게 아니라…….”
뭐라 말하려던 강유찬 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잠시만요.”
강유찬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 전화를 받았다.
“예. 강유찬입니다.”
그리고 이내 발걸음을 옮겨 내가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한 곳까지 멀어졌다.
“멀리도 간다.”
하지만 저런다고 못 들을 내가 아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귀에 감각을 집중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금고가…….”
금고. 금고라.
나도 사람인지라 다 듣진 못했지만, 핵심 키워드로 추정되는 단어 하나를 건졌다.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로 돌아와 팔짱을 끼자, 통화를 마친 강유찬이 다시 돌아왔다.
“이주혁 씨.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요? 뭔 일 있습니까?”
“급하게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겨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예. 편하게 다녀오십쇼. 올 땐 천천히 오시고요.”
“하하.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강유찬이 떠나고, 나는 내가 들은 단어를 곱씹었다.
금고. 금고라. 이거, 왠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같은데.
‘한인석의 비밀 금고.’
이 시점에서 강유찬 저놈이 금고라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분명히 그 금고를 말하는 거겠지.
판교신도시의 투자자와 참여 건설사 명단.
그게 선생 놈이 감방 안의 한인석을 죽여서라도 없애고 싶은 정보니까 말이야.
근데 이걸 어쩌나. 네가 찾는 금고는 내 호텔 방에 있는데.
선생 놈과 강유찬이 허탕을 칠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음.”
근데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놈들이 한인석이 가지고 있던 금고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냐는 것.
분명 한인석은 나한테만 그 정보를 말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 가정했을 때, 금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정된다.
나, 한인석 본인, 남상민. 그리고 아마…….
‘곽환성.’
한인석은 분명히 나한테만 얘기한 거라 했지만, 그 음흉한 노인네가 나만 정보를 얻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리 없지.
도청장치든 뭐든, 모종의 방법으로 우리 대화를 엿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곽환성이 그걸 들었다 해서, 그 정보를 선생 놈한테 그대로 일러바쳤을까?
그건 말이 안 된다. 곽환성도 분명히 선생 놈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럼 대체 놈들이 어떻게 안 거지?’
영 찝찝하긴 하지만, 설령 군사 작전이라도 정보는 새어나가게 되어 있는 법.
어차피 완벽하게 숨길 순 없으니, 나는 그냥 금고를 선점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 된다.
선생 놈이 금고의 존재를 알았다 해도, 가지고 있는 건 나란 말이지.
구우웅-.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뱃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저 배는 불곰이 밀수품들을 가져온 배일 거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얼마 지나지 않아, 시커먼 옷을 입은 놈들이 커다란 상자 여러 개를 배에서 가지고 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
“%&^!”
나를 본 놈들이 큰 소리로 뭐라 지껄이는데, 러시아어라 뭐라 말하는진 전혀 못 알아들었다.
수까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대충 욕인 것 같긴 한데.
내가 양손을 머리 옆에 들고 다가가자, 인상 더러운 놈들 몇이 다가와 날 포위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 배에서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내렸다.
‘저 새끼네.’
사진에서 보던 험상궂은 면상. 저놈이 불곰, 빅토르가 분명하다.
이름대로 덩치도 산만하네.
놈은 손을 들고 있는 날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부하들한테 뭐라고 지시했다.
불곰은 뒤로 물러난 부하들 사이로 다가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러시아어로 지껄였다.
“#&^*@.”
“아이 캔트 스피크 러시안. 이 새끼야.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내 물음에 불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오케이. 당신이 빅토르 맞지?”
“그렇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되나? 그냥 당신들이 작업하는 거 지켜보기?”
“기다려라.”
“또 기다려?”
불곰은 짧은 영어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뭔가 띠껍긴 한데, 또 영어를 못 한다니 한마디 할 수도 없고. 참.
내 답답한 표정을 봤는지, 불곰이 어색한 영어로 말했다.
“곧 올 거다. 통역. 기다려라.”
“오케이. 통역. 그거 좋은 소식이네.”
구글 번역은 언제 출시되는 거야? 말이 안 통하니까 답답해 죽겠네.
할 짓도 없어서 그냥 이놈들이 상자 옮기는 거나 구경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굴러왔다.
끼익-.
거기서 내린 동양인 하나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했다.
“^$#@%#? 하하.”
물론 난 알아듣지 못했지만.
딱 봐도 통역 느낌이라 나는 그 남자한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그쪽이 통역사 되십니까?”
“아, 예. 김종엽입니더. 하하.”
“아이고, 넣어두십쇼.”
남자가 명함을 꺼내려는 것 같길래 손을 내젓고 물었다.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서요. 저 사람한테 말 좀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번에 경호원으로 온 사람인데, 제가 러시아 말은 할 줄 몰라서.”
“아, 당연히 가능하지예. 그랄라고 돈 받고 온 긴데.”
넉살 좋은 새끼네. 불법적인 거래 현장에 통역하러 온 놈 치곤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런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놈이거나, 여기서 뭘 하는 건진 모르는 놈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는 김종, 뭐더라? 하여튼 통역이랑 같이 불곰한테 갔다.
“제가 하는 말 그대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예.”
“어이, 불곰. 대충 몇 명이서 온 거냐?”
불곰은 내 말을 통역하는 통역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가 알 거 있나? 할 일이나 하지.”
“일이 있어야 하지, 병신아……. 어휴, X발.”
혼잣말을 좀 크게 떠들었는지, 옆에 있던 통역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전해드리기에 쫌…….”
“이건 됐습니다. 이제 볼일 보세요.”
나는 통역한테서 떨어진 뒤, 계속해서 놈들이 옮기는 상자를 살폈다.
마음 같아선 몰래 하나씩 열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놈들 주머니에 있는 총이 날 조준하겠지.
어떻게 빠져나가려면 빠져나갈 수 있긴 한데, 아직 팀원들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은 이상 섣불리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묘한 분위기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때.
우르르-.
저 멀리서 한 무리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드디어 오셨구만.’
정광제의 국제파 패거리였다.
그에 불곰의 마피아도 마찬가지로 상자를 중심으로 모여 섰다.
선두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정광제가 이쪽과 10m쯤 떨어진 거리에 딱 멈춰섰다.
“오랜마이네.”
다짜고짜 꺼낸 말에 이쪽에 서 있던 통역이 불곰에게 말을 전했다.
그걸 들은 불곰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를 통역이 전했다.
“잡설은 말고, 빠르게 거래부터 마치잡니더.”
“그래? 거래 좋지. 좋은데…….”
주머니의 손을 찔러넣고 있던 정광제의 시선이, 마피아들한테서 조금 떨어져 있던 나를 향했다.
“거기 이주혁이. 이게 어떻게 된 기고?”
“음? 나?”
“그래. 니 말이랑 다르게 강유차이가 없는데?”
정광제의 그 말에 나는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여튼 대가리가 안 돌아가요. 다 보는 앞에서 너 죽이겠냐?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정광제가 고민을 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에 난 슬쩍 몸을 돌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강유찬이 자리를 비웠지만, 어떻게든 날 처리하려 할 것이다.
일단 강유찬까지 조지는 베스트 플랜은 나가리고…….
“음?”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강유찬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작전.
원래 저 상자 안에 든 것들은 없애버리려고 했다.
마약은 필요도 없을뿐더러, 불법 무기 같은 건 괜히 가지고 있다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굳이 저걸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저 물건들을 그냥 둔다는 가정하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선생의 본거지.
내가 가장 궁금했던 공리회의 주요 거점이 될 거다.
히죽.
‘강유찬. 넌 날 끌어들이면 안 됐어.’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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