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190
189화
다음 날 아침, 고상미는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SA시큐리티 회사 내부의 휴게실.
이주혁 측에서 숙소로 제공한 장소였다.
그렇게 아직 숙취가 조금 남은 몸을 일으켜 세운 고상미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있는 창문 너머로는 이제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어딘가 홀린 듯이 걸어간 고상미가 도착한 곳은 SA시큐리티의 대련실.
‘안에 있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간 고상미의 눈에 한창 운동 중인 라세흠이 보였다.
벤치에 누워서 덤벨을 들어 올리던 라세흠이 고상미를 보고 흠칫했다.
철컹.
라세흠은 덤벨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시간부터 어쩐 일이야?”
“그냥, 왠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그러냐?”
대수롭지 않게 답하던 라세흠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씩 웃었다.
“어제 승부는 기억하나?”
“음.”
“이제 술로는 까불지 말라고.”
고상미는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며 웬일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좋아. 대신 다음에 한 번 더 붙자고.”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텐데.”
라세흠이 계속 실실 웃으며 농락하자 고상미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더니 링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음?”
“자존심을 자꾸 긁네. 올라와.”
고상미의 살벌한 눈빛에 라세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도발했나?’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라세흠이 한 가지를 떠올리고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다. 곧 중요한 작전에 투입될 텐데 우리끼리 힘을 뺄 순 없지.”
그 말에 고상미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고작 대련인데 뭘 그렇게 거창한 핑계를 대?”
“핑계라니. 네가 대련을 대련 수준으로 안 할 거잖아? 저번엔 내 모가지를 날릴 기세더니만.”
“대련을 실전처럼. 실전은 목숨 걸고. 모르나?”
“아니, 뭐, 그건 맞긴 한데…….”
자신도 모르게 인정하려던 라세흠이 멈칫했다.
대련을 실전처럼은 라세흠의 지론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도 대련을 빙자해 팀원들을 두들겨 팬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걸 인정했다간 링 위로 올라가야 했다.
고상미를 대련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끈적한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을 간질이고 있었기에 수락하기가 꺼려졌다.
“어쨌든 안 돼.”
고상미가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섬뜩한 소리를 했다.
“네가 안 한다고 나도 참을 필욘 없지 않을까?”
“시작부터 이러지 말자고.”
으름장을 놓던 고상미가 결국 한 수 접었다.
“좋아. 그럼, 그건 다음으로 넘기는 걸로.”
“좋은 선택이야.”
고상미는 안심하는 라세흠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고 했지.’
이주혁과 단둘이 얘기할 때 전해 들은 조언대로, 고상미는 너무 부담스럽게 비비지 않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고상미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난 우리 애들 불러 올게. 넌 작전 브리핑 준비해.”
“음.”
라세흠은 알겠다고 답하려다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근데, 너 몇 살이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말이라 이제 눈치챘네.”
“…….”
잠시 침묵하던 고상미가 순식간에 주먹을 내질렀다.
타악-!
그걸 붙잡은 라세흠은 손이 얼얼함을 느끼며 당황했다.
“뭐야, 갑자기?”
“여자 나이를 묻는 건 실례지.”
“어?”
“매너가 없네.”
손을 뗀 고상미가 성큼성큼 대련실을 떠났다.
라세흠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고작 나이 가지고 무슨…….”
30이 넘도록 혼자였던 라세흠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 * *
민수진은 뭔가를 눌러 참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알아낼 건 다 알아냈거든.”
“무슨 말이니?”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볼일은 끝났단 거다.”
“……정보를 얻으려고 나한테 접근했다는 거야?”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 갈 필요가 없었다.
“어.”
“…….”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민수진이 충격에 빠진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설마 내가 진짜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서 다가간 거라고 생각했나?
그랬다면 조금 미안한데, 순진한 사람 잘못이지, 뭐.
저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서려는데, 민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왜?”
“그…….”
민수진은 불러 놓고 말문이 막혔는지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다 겨우 한 마디만 내뱉었다.
“왜 나는 안 돼?”
“뭐?”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내 가족들 때문이야?”
뭐가 안 되냐는 건지 정확하겐 모르겠지만, 민수진과 계속해서 교류할 수 없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 맞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조용히 살아. 죄짓지 말고. 그럼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민기형과 주변인들은 언젠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만, 민수진은 딱히 범죄와 연관된 건 없으니 큰일은 나지 않겠지.
그렇게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민수진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오지랖도 넓네? 나도 걱정해 주고.”
민수진은 자리에서 가방을 챙긴 뒤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갔다.
완전히 나에게 관심이 떠난 듯한 모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뭔가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인데…… 그래도 떨어져 나갔으니 다행이야.’
어딘가 찝찝한 느낌은 남아 있었지만, 곧 마약 제조 공장을 쳐야 했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럼, 일단 팀원들과 합류해 작전을 어떻게 진행할지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
* * *
그렇게 SA시큐리티로 돌아온 나는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음?”
그런데 회의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작전 브리핑 중이랬는데, 여기가 아니면 어디 있는 거야?
혹시 해서 대련실로 가 보니,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이트보드를 세워 놓고 설명 중인 부장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 왔냐?”
“네. 설명은 어디까지 하셨어요?”
“거의 다 하긴 했는데…….”
뜸을 들이던 부장님이 날 툭툭 치며 구석으로 불렀다.
“왜요?”
조용히 따라가서 물으니 부장님이 고상미의 부하들을 슬쩍 턱짓하며 말했다.
“저놈들, 아무래도 우리 선에서 통제하긴 힘들 것 같다.”
“뭐 문제라도 일으켰어요?”
“씁. 그건 아닌데, 우리가 늘 하던 작전 방식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부장님은 팔짱을 끼고 턱을 쓰다듬으며 설명했다.
“정찰, 잠입, 제압……. 뭐 이런 것들 말이야. 지네들은 그냥 쳐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는 게 좋단다.”
“흠. 그래요?”
그 말에 나는 다시 대련실 중앙으로 나와 우릴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작전의 진행 방식이 불만이란 겁니까?”
“그래.”
어제 배상훈이랑 한판 붙었던 대머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 답답한 방식은 딱 질색이다.”
“이해는 하지만, 제가 거기서 얻어 내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그쪽 방식대로 처리하면 제 목표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요. 여러분은 우릴 도우러 온 지원군 아닙니까?”
내 차분한 설명에도 대머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쪽 방식이 그러면, 우린 따로 움직이는 걸로 하겠다. 우리가 너희 직속 부하도 아닌데, 굳이 네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지 않나?”
도발적인 언사에 나는 고상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고상미는 링 방향으로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후…….”
그래. 이런 식으로 판을 깔아 준다 이거지?
썩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지만, 날 만만하게 보는 이 새끼들에게 뭐라도 보여 주란 뜻이겠지.
겸사겸사 내 실력도 볼 겸 말이야.
스윽.
난 겉옷을 벗고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 링 위로 올라갔다.
“음?”
“뭐야?”
뜬금없이 이러니 고상미의 부하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링에 기댄 채 날 똑바로 쳐다보는 대머리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이, 대머리. 올라와.”
“뭐?”
“존나게 패 줄 테니까 올라오라고.”
이거, 간만에 기강을 좀 잡아야겠어.
그걸 들은 대머리의 민두에 핏줄이 곤두섰다.
“큭. 네가 대표라고 봐줄 것 같나?”
훌렁.
순식간에 웃통을 벗어 던진 대머리가 고상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님. 죽여 버리고 오겠습니다. 말리지 마십쇼.”
“안 말려.”
대머리는 성큼 걸어와 링 위로 올라왔다.
턱.
내 맞은편에 선 대머리가 근육을 꿈틀대며 사나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꽤 실력이 있으니까 날 불렀겠지? 만약 허세였다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 거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내 할 말만 했다.
“내가 이기면 얌전히 우리 작전에 따르는 거다. 고상미 씨?”
그쪽을 바라보자 고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가 이기면 우리는 너희 작전에 따르지.”
“오케이.”
확언을 받은 뒤, 다시 대머리와 눈을 마주쳤다.
대머리는 자신이 질 거라곤 추호도 상상하지 않는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사람들 앞에서 깨지면 대표 자리에서 내려와야 되는 거 아닌가? 쪽팔려서 어떻게…….”
“뭐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닥치고 덤벼라.”
“흐!”
그와 동시에, 대머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화악!
기본적인 태클이었지만, 거기 담긴 파워는 정석을 뛰어넘은 듯 보였다.
‘레슬링 베이스인가.’
그리 생각한 나는 스텝을 밟으며 옆으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대머리의 반응은 빨랐다.
끼익-!
내가 어디로 회피하려는지 확인한 즉시 브레이크를 밟고, 빠르게 방향을 선회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신체 컨트롤 능력이었다.
일반적인 격투가였으면, 여기서 당황하며 태클만 피하다 결국 코너에 몰릴 거다.
그리고 저 두꺼운 근육 사이에 신체가 끼인 채 탭을 치고 말겠지.
일단 나는 정석적인 대응을 해 보기로 하고, 스텝을 밟던 발의 앞축을 들어 대머리의 턱을 향해 찌르듯 날렸다.
저렇게 황소같이 돌격하는 놈들을 상대하기 좋은 기술로, 저 가속도에 발차기의 위력까지 턱에 꽂히게 되면 무조건 무력화시킬 수 있다.
후욱!
하지만 대머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서 막았다.
퍽!
그대로 다리에 힘을 줘 밀어내려 했지만, 근육으로 가득한 대머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밀고 들어왔다.
‘전차구만. 완전히.’
그에 남은 한쪽 발로 바닥을 박차고 옆으로 쑥 빠진 뒤, 대머리의 뒤를 잡는 데 성공했다.
돌진하던 대머리는 링의 로프에 몸을 갖다 박더니, 반동을 이용해 내 쪽으로 다시 날아왔다.
그걸 본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쇠줄인데?!’
WWE링 같은 경우 로프반동을 이용하는 기술이 많기에 로프의 탄성이 높다.
하지만 대련실 링의 로프는 탄성이 거의 없는 쇠줄이었다.
부장님이 구석에 몰리지 말라면서 일부러 더 딱딱한 걸로 설치해 둔 것이다.
쿵!
“크아아!”
대머리가 머리에서 김을 뿜어내며 뛰어왔다.
등짝이 꽤 아플 텐데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더럽게 성가신 타입이야.’
체력과 피지컬을 믿고 붙잡을 때까지 들러붙는 그래플러.
내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란 말이지. 구경하는 맛도 별로 없고.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이대로 피하기만 하다가는 평생 싸울 기세로 달려들 거 같으니까.
“들어와.”
“멍청한 놈!”
내가 정면으로 맞붙으려 하자 대머리가 팔을 벌려 환영했다.
“흡!”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놈의 태클을 받았다.
아니, 받아내는 척을 했다.
탁!
허리를 뒤로 젖히며 뛰어오른 녀석의 몸통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띄우며 대머리의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대머리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끅.”
밑에서 빠져나온 나는 대머리의 몸을 뒤집고 파운딩 자세를 잡았다.
이때 족쳐 놔야 끝낼 수 있다.
퍼억!
내 주먹이 대머리의 얼굴에 꽂혔다.
퍽! 퍽! 퍽!
계속해서 처맞던 대머리가 정신을 차리고 악을 썼다.
“이 X바……!”
뭐라 말하려던 대머리의 대가리에 엘보우를 날렸다.
빡!
“컥.”
적당히 두들겨 놨다 싶어 일어났는데, 대머리는 맷집도 보통이 아닌지 끅끅대며 몸을 바로 세우려 했다.
이 새끼, 질기네.
나는 그대로 꿈틀대는 대머리의 얼굴을 한 번 더 내리찍었다.
쾅!
강력한 한 방.
다시금 발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 라세흠 부장이 곁으로 다가와 말렸다.
“야. 야. 그만해. 그러다 작전도 들어가기 전에 죽겠다.”
그 말에 대머리를 내려다보자, 녀석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내 실력은 다 보여 준 거 같네.
나는 로프에 몸을 기대며 고상미에게 씩 웃으며 물었다.
“됐습니까?”
내 물음에 고상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우린 네 작전을 따를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링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고상미의 부하들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야.”
“좀 하는데……?”
그리고 고상미도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다음에 나랑도 한번 붙자. 재밌겠네.”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부장님을 가리켰다.
“그건 부장님이랑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날 보던 부장님의 표정이 굳었다.
“……이 새끼가?”
왜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자기 짝은 자기가 감당해야죠.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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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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