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44
#344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건물 지하, 글라자의 수뇌부들은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군요.”
마리아의 말에, 모여있던 이들이 불편한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오늘은 레이븐이 복귀하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연락이 두절된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니콜라이가 빛바랜 금발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기다릴 만큼 기다린 것 같은데… 아무래도 도망간 것 같군.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 눈치챈 모양이지.”
그가 이죽거리자, 미하일은 주름진 얼굴로 담담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곳에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지 않나? 본인 의지가 아닐 가능성도 있을 텐데.”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듣자 하니 놈이 갔던 곳에서 소란이 있었다는데, 일만 끝내고 도망친 거 아닌가?”
팔짱을 끼고 있던 중절모의 중후한 남자, 알렉산더가 한 마디를 얹었다.
“아직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연락이 끊겼을뿐더러 약속한 기한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지.”
“이유는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겠군. 규칙대로 레이븐은 살생부에 올리고 마무리하는 게 어때?”
“만약 거기서 죽었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니콜라이의 제안을 들은 수뇌부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마리아는 곤란한 마음이었다.
‘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레이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가장 좋은데…… 이렇게 되면 또 글라자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그런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걸 본 니콜라이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거기서 뒈졌든 안 뒈졌든, 살아있으면 선생이 알아서 주워가겠지.’
레이븐의 신병을 넘기겠다고는 했으나, 분명히 장담할 순 없다고 덧붙였다.
스윽.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경호대장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자기네가 직접 찾겠지.’
그리 생각한 니콜라이는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이 상황이 나쁘지 않은 건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이븐의 아버지가 숨어 살던 곳을 리신페이에게 알려준 당사자였다.
그리고 현재 삼합회의 사천지부장과 몰래 내통하고 있기도 했다.
‘리신페이가 죽었거나… 중상을 입기만 해도 다음 산주의 경쟁에서 뒤처진다.’
미하일로선 자신과 협력 관계인 사천지부장이 삼합회의 다음 주인이 되는 게 좋았다.
그래서 레이븐의 복수를 이용해 그의 경쟁자 중 하나인 리신페이를 제거할 계획을 꾸민 것이다.
리신페이도 없애고,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목숨을 노릴 게 분명한 레이븐도 죽게 둔다.
일거양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미하일은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렸다.
“우선, 레이븐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당장 결정할 문제는 아닐세.”
“음.”
“연락이 올 때까지 더 기다려보고 판단해도 될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그 말에 다들 미묘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겠죠. 대신 너무 오래 기다릴 순 없어요.”
“당연하지. 나도 시간을 길게 주자는 말은 아니네.”
미하일은 마리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우리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마리아는 그가 어떤 의도로 꺼낸 말인지 곧바로 이해했다.
글라자 측에서도 레이븐이 돌아오지 않을 시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다.
“좋아요. 다른 의견 있으신 분 있나요?”
마리아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인 걸 확인한 니콜라이가 피식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어차피 뻔한 얘기, 이만 줄이지.”
드륵-.
“그놈 찾으면 연락하라고.”
니콜라이는 벌떡 일어나 재떨이에 담배를 던지고 뒤돌아 나갔다.
탁.
회의실의 문을 닫고 나온 그는 곧바로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뒷자리의 문을 열고 타자, 운전석에서 대기하던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출발합니까?”
“그래. 그 주점으로.”
“예.”
부웅-.
차가 출발하고, 니콜라이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무슨 일이죠?
“선생. 소식 들었나?”
-돌아오지 않았다죠.
그 말을 들은 니콜라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소식 한번 빠르군. 어떻게 할 거지? 그놈이 아예 도망쳤다면 나도 손쓸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죠.
선생, 민지훈은 크게 미련없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니콜라이는 이내 신경을 끄고 화제를 바꿨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듣기론 마피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던데.”
마피아들은 강화된 정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븐의 마피아 보스 암살 사건으로 인해 상황이 달라졌다.
마피아의 주 수입원 중 하나, 무기 밀매.
그중 한국과 일본에 총화기를 판매하는 건 꽤 벌이가 좋았다.
그 밀수 루트를 꽉 쥐고 있던 조직의 보스가 죽었으니, 다른 조직들이 자리를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피아가 대놓고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당연한 소리를. 어지간히 멍청한 게 아니라면 그러겠지. 내 말은 우리가 어떻게 할 거냔 뜻이야.”
-분위기는 어떻죠?
니콜라이가 시트 뒤로 기대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 말할 것도 없지. 각자 다른 주머니 차고 눈 굴리는 게 눈에들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팅-. 탁.
담배에 불을 붙인 니콜라이가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슬슬 청산할까? 웃기지도 않는 회의 하는 것도 지겨워서.”
-아마 조만간 삼합회에 큰 변화가 있을 겁니다.
“큰 변화라. 아는 게 있나 보지?”
-산주가 위독하다더군요.
그 말에 니콜라이가 멈칫했다.
“아직 조금 남았다고 들었는데?”
-거의 확실한 정보입니다.
“젠장. 어째 큰일은 연달아 터지는군그래.”
니콜라이가 물고 있던 담배를 잘근거렸다.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인가? 삼합회의 보스가 바뀔 때까지?”
-그쯤이면 충분하겠죠.
“후. 그럼 나도 준비를 시작해야겠어.”
-예. 머지않아 삼합회와 마피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우리는 그 틈을 노릴 겁니다.
“좋아. 기다리고 있겠다.”
뚝.
니콜라이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창문 바깥으로 웃음과 함께 연기를 뱉어냈다.
“글라자의 몰락이군.”
* * *
철썩.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배 안.
“크윽.”
그곳의 선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끄으……!”
땡그랑.
유현의 옆구리에 박혀있던 총알이 바닥에 떨어졌다.
총알은 바닥에 기다란 핏자국을 남기며 굴러갔다.
“후우….”
물고 있던 천을 뱉은 유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깨끗한 천을 배에 칭칭 둘렀다.
이미 총알을 빼낸 왼쪽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유현은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커헉. 허억…….”
구경이 큰 리볼버의 총알은, 방탄조끼를 뚫고 유현의 옆구리까지 파고들었다.
만약 방탄조끼라도 없었다면 총알은 그대로 등 뒤로 뚫고 나갔을 것이다.
그럼 그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뿌득.
유현은 이를 갈며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지원이 오는 바람에 리신페이를 확인사살하지 못했고, 제압한 경호원들의 총을 뺏어 빠져나왔다.
몇 번 오가며 건물의 구조는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몸만 빼내는 건 가능했다.
“제기랄….”
그러나 유현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건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킬러였다고……?’
엄하지만 자상했던 아버지.
그런 그가 리신페이의 형을 암살했다니, 믿기 힘든 소리였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그 말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
마음속으로 의문을 가지고는 있었다.
왜 그런 외진 곳에서 남들과의 교류 없이 살았는지.
하지만 아버지가 킬러였다면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은퇴한 킬러가 천수를 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리 숨는다 해도 그동안 쌓아온 원한들이 가만히 두지 않으니까.
‘아버지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동안의 업보가 돌아온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리신페이에게 아버지를 살해할 동기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자신을 죽이려고 한 건 별개의 문제다.
꾸욱.
“저, 저기…….”
유현이 주먹을 말아쥐자, 고기잡이배를 몰고 있던 선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장은 유현의 눈빛에 다급히 덧붙였다.
“그, 이제 슬슬 목적지를 말해주셔야 어딜 가든 합니다만…….”
협박에 못 이겨 밤중에 배를 끌고 나왔지만, 어디로 데려다 달라고 말해주질 않아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현이 물었다.
“한국까진 갈 수 있나?”
“하, 한국이요?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다른 친구들이 옮겨다 주고 그랬었는데, 요새는 단속 때문에…….”
유현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러자 선장이 움찔했다.
“후…….”
중국에선 삼합회에게 쫓기고, 러시아로 돌아가면 글라자가 그를 노릴 것이다.
‘아버지가 숨어있던 장소를 알려준 건… 분명 내부인이다.’
정말 아버지가 킬러 출신이었다면 은신처를 그리 허술하게 정하지 않았을 테니까.
척.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은 선실 벽에 걸려있던 구명조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선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입어.”
“예?”
“입으라고.”
선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구명조끼를 받았다.
“그거 입고 뛰어내리던가, 싫으면 한국까지 운전해.”
그 말에 선장은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현이 다시 자리에 앉아 어깨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선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배의 방향을 바꿨다.
‘이런 X벌…. 잘못 걸렸구먼…….’
* * *
쿵. 쿵. 쿵.
주성재가 운영하는 클럽 스텔라.
배상훈은 그곳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어어.”
그를 마주치는 웨이터들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올 때마다 돈을 쓰고 가는 배상훈은 이미 VIP라고 소문이 난 상태였다.
웨이터는 자연스럽게 룸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오늘도 골드 에디션입니까?”
“어. 그걸로.”
“옙! 끝내주는 언니들로 모셔 오겠습니다!”
손을 싹싹 비빈 웨이터가 공손하게 인사하고 룸을 나갔다.
테이블에는 순식간에 값비싼 위스키와 잔, 안주들이 놓였다.
배상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쓰벌….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노는 게 좋아도 한두 번이지,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시는 것도 못 할 노릇이었다.
단지 가끔 유흥을 즐기는 정도인 배상훈으로선 이렇게 망나니처럼 사는 게 슬슬 질렸다.
애초에 이런 생활이 적성에 맞았다면 HID에서 복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쯧.”
배상훈은 이제 위스키병만 봐도 속이 쓰려 왔다.
그때, 웨이터가 다시 들어왔다.
“저, 형님.”
“왜.”
“옆에서 형님을 초대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엥? 누군데.”
“돈 많은 집안 아들입니다. 형님 소문을 들었는지, 같이 한잔하면서 얘기나 좀 하고 싶답니다.”
“그래?”
배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잣집 도련님의 초대라.’
씩 미소를 지은 배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아주 수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지.’
아무래도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번 가 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