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0
5 암시장 (4)
금 박사는 눈앞을 가리던 뺑뺑이 안경을 내려놓았다. 안경 뒤에 가려졌던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미친 과학자라는 별명답지 않게 금 박사의 눈동자에는 현기가 가득했다.
조금 전에 왔던 ‘자칭’ 미래 예지자라는 놈.
그놈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예지라니, 그런 능력을 가지고 겨우 여기에 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수상했다.
백도산, 그놈을 구하러 왔다고?
웃기지도 않다.
‘내가 알기로 그놈이 어디 예쁘게 보일 놈이 아닌데. 원수가 찾아오면 모를까.’
하지만 정말 저 녀석이 백도산을 구하려는 호의로 이런 말을 한 거라면, 그리고 그 예지라는 게 정말로 맞는다면.
‘충분히 보상해 줘야겠지.’
그 야박한 놈을 대신해서 친구인 자신이라도 말이다.
* * *
돈 굳었다.
공짜로 인식표를 제거한 데다가 당분간 사용할 그럴싸한 신분증까지 얻다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게다가 어쩌면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고.’
설록진에게 백도산은 아주 중요한 패였다. 설록진의 애완견에 지나지 않았던 나와 달리 백도산은 확실히 설록진에게 힘이 되는 패였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설록진의 능력까지 까발리며 그놈을 만나면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과하지.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금 박사라면 입도 무거운 인간이니, 괜히 나에 대해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니진 않을 거다.
‘그래도 괜한 추적이 따라붙기 전에 신분을 한 번 더 바꾸긴 해야겠어.’
예지 능력자라는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가는 어느 순간 납치돼 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금 박사가 입이 무거워도 백도산에게는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부디 설록진의 마수에서 자신을 건져 준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거나 돈도 굳었겠다, 온 김에 헌터 장비라도 사야겠다.
내 단점은 누가 뭐래도 직접적으로 몬스터를 공격할 수단이 없다는 거였다. 헌터가 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하지만 그 게이트만 공략하면……. 어떻게든 답이 생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장비들을 판매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몬스터인가? 긴장감을 끌어 올린 나와 달리 주변의 사람들은 태연했다. 그 태연함에 나 또한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아, 이 근처에 ‘그 가게’가 있었지? 나는 얼굴을 구겼다. 몇 년 전, 그러니까 전생에서 나는 설록진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그 가게에 들러 ‘물건’을 샀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워낙 끔찍하기 때문일까. 발걸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철창을 치는 소리,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분주한 말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당장 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인식표를 제거한다는 범죄를 저지른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놈들은 정말 인륜을 저버린 범죄자들이다.
어린 각성자들을 납치해 멋대로 개조하고 팔아 치우는, 사람으로도 취급할 마음이 들지 않는 놈들이란 말이다.
슬쩍 나는 가벽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대한 맹수를 가둬 두는 철창 안에는 성인은커녕, 2차 성징도 제대로 오지 않은 어린애들이 내가 목에 걸었던 것 같은 인식표를 건 채로 갇혀 있었다.
저 어린애들에게 걸린 목줄은 정부가 나에게 걸어 둔 목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악독한 것들뿐이었다.
가벽을 세워 둔 채로 그 안에서 사람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주제에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가벽 앞에서 토큰을 건네는 이들 대부분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심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은 죄다 흉측하게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다들 멀리서도 그 안의 흉측한 생각을 알아내고 멀어지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저곳에 있는 죄 없는 이들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당장 내가 가진 돈으로는 아무것도 살 수 없다.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여기에는 대체 왜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앞으로 재촉할 때였다.
내 앞에 있던 가벽이 무너지며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젠장!”
“그러게! 자극하지 말라니까!”
장난감처럼 부서진 가벽 사이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림자, 그러니까 가벽을 뚫고 나온 녀석은 주변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녀석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녀석의 몸을 붙잡고 있던 쇠사슬이 바닥에 끌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뒤늦게 가벽 뒤에서 튀어나온 남자들이 그 쇠사슬을 잡으려 했지만, 녀석은 그때마다 짐승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인간과는 다른 사족 보행을 하는 그 녀석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더욱 기겁했다.
나는 그 녀석의 움직임을 보다가 새삼 깨달았다. 네발은 두 발보다 빠르구나.
어쨌거나 사람들을 피해 사방으로 움직이는 녀석의 움직임은 재빨랐고 그 녀석을 잡기 위해 나온 남자들은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잡을 거예요?”
“그래! 빨리 해결하라고!”
그 소란에 손님들이며, 주변에서 멀쩡히 장사하고 있던 가게들의 주인까지 합세해 남자들에게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 녀석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목줄을 매 놨다면서? 뭐 하는 건데. 버튼을 눌러!”
“이미 먹일 수 있는 만큼 먹이고 있다고!”
남자들의 말처럼 녀석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는 파지지직 하며 전류가 튀고 있었다. 저렇게 전류가 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면 사람 하나가 통째로 튀김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녀석은 꿋꿋하게도 버티고 있었다.
피딱지와 때로 엉망이 된 얼굴은 덥수룩한 머리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여리여리한 턱선이나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남은 피부를 보건대 겨우 십 대 후반은 됐을까 싶게 어린 녀석이었다.
물론 얼굴만 그렇지 몸뚱어리는 웬만한 성인을 압도할 만큼 거대했지만.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차림새 때문에 보기 싫어도 녀석의 불끈불끈한 근육이 눈에 박혔다.
“이런.”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란에서 빠져나갈 생각밖에 안 하던 나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녀석은 마치 나에게 구해 달라는 듯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푸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에 바늘이 꽂혔다.
녀석의 몸을 꿰뚫은 바늘은 하나가 아니었다. 연달아 두 개, 세 개가 날아들어 몸에 꽂히자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전류에도 굳건히 버티고 있던 녀석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어어어!”
그 모습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와, 드디어 끝이네.”
가벽 안에서 나온 하얀색 가운을 입은 남자가 어깨를 낮추며 주변에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이거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요.”
“이번 달에만 벌써 두 번이야!”
“죄송합니다, 그만큼 싱싱한 애들이 많이 들어와서요.”
“하긴 저쪽 가게 애들이 좀 팔팔하긴 하지.”
아무래도 저 가게에서 노예들이 탈출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기운이 좋아 보이는 게 쓸모는 있겠네. 저런 놈을 길들이려면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되겠지만 말이야.”
“뭐, 그렇죠. 하지만 저런 놈이야말로 길들였을 때 보람이 크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대는 중에도 녀석은 여전히 눈을 뜨고 버티고 있었다. 몸을 마비시키는 마비약에 당하고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다니. 정신력이 말도 안 되게 좋은 놈이었다.
하지만 곧 버티던 것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박아 버렸다. 끝까지 허우적거리는 그놈을 본 한 남자가 입술로 혀를 핥으며 말했다.
“저거 언제 다시 시장에 내놓을 건데?”
“그래! 스테이지에 올려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스테이지에 올릴 생각이면 나한테 꼭 연락하라고. 그 재밌는 판을 놓치기 싫으니.”
괜한 탈출 소동으로 녀석에게는 영 좋지 못한 사람들의 관심이 붙어 버렸다. 쯧쯧 그렇게 혀를 찰 때였다.
“거기, 우리 상품에 관심이라도 있으신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에 나는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짙은 고동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나를 보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멋쩍은 듯이 웃었다.
“아, 아니요. 다른 쪽으로 가던 길에 소란이 나서 구경하던 것뿐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우리 상품을 눈여겨보던데. 어때, 저 안에 더 좋은 것들이 있는데.”
“아뇨, 됐습니다.”
그렇게 남자의 말을 거절하고 발을 옮겼을 때였다.
남자들이 쓰러져 있는 녀석을 들어 올렸다. 뭉쳐 있던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리고 비로소 드러난 녀석의 얼굴에 나는 입을 벌렸다.
“……!”
난 녀석을 안다.
‘김재호?’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아니, 여기에 있는 게 당연하겠군. 설록진의 명령으로 내가 이곳에서 사 갔던 게 바로 저 녀석이니까.
설록진이 거두기 전 녀석의 이력은 화려했다. 몇 번이나 전 주인을 물어뜯어서 계약이 파기됐다고 했지.
설록진이 머리를 휘저어 충성스러운 고기 방패로 만들기 전까지는 이곳의 골칫덩어리라고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마주칠 줄이야.’
이것도 일종의 우연인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저 녀석을 지금 데리고 가는 건 어떨까.
김재호는 그림자에 스며 들어갈 수 있는 재능을 가진 각성자였다. 적을 은밀하게 제거하는 데 놈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설록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무기가 필요했다. 김재호는 그런 나에게 딱 필요한 인재였다.
하지만 어떻게?
세뇌로 저 녀석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던 설록진과 달리 내 능력은 그저 거짓말을 잘하는 것뿐이다.
지금 내 전 재산을 털어, 아니, 그 이상의 돈을 투자해 저 녀석을 ‘구매’한다고 쳐도 내가 저 녀석을 길들일 수 있나?
하지만 녀석은 아직 인간성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어쩌면 ‘구원자’ 노릇을 한 번은 해 볼 때가 됐을지도.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말인데요. 아까 그놈은 얼마나 합니까?”
내 말에 남자는 답지 않게 충고를 건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런 것보다 제대로 된 물건을 사는 게 나을 텐데. 보면 알겠지만 저건 불량품이라서 말이야.”
“사람들 말대로 길들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잘 부서지지도 않을 것 같고.”
나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제법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나니, 이 표정을 지으면 꽤나 못돼 보일 테지.
내 얼굴에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5억.”
그 말에 내 입이 딱 닫혔다.
김재호, 인마.
너 생각보다 비싸구나.
* * *
결국 난 그날 김재호를 살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점은 저 녀석은 앞으로 삼 년 뒤까지도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판매되지 못한다는 거였다.
완전히 이곳의 악성 재고가 되어 눌러앉을 팔자라는 거지.
그러니 앞으로 삼 년 안에만 저 녀석을 데리러 오면 된다.
사람을 사고판다는 개념은 역겹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룰을 따라야 한다지 않는가.
몇 번의 반품을 거치고 나면 녀석도 떨이로 나올 테니, 그때를 노려야겠다.
그럼 다른 물건이나 좀 보러 가 볼까.
공략해야 할 게이트가 있으니 말이다.
제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