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01
34 게이트를 공략하는 법 (2)
효율적인 ‘공략’을 위해 우리는 역할을 나눴다.
탐색의 재능을 가진 이재은은 이혜원과 함께 마을을, 나는 빙궁을 수색하기로 했고 유선제와 나머지 인원은 본진(이라고 해 봤자 임시 텐트가 전부지만)에 남기로 했다.
한서현은 나와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본진에 남아.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 신호를 보내고.”
모래를 다룰 수 있게 된 지금 한서현보다 이 공간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이왕이면 유선제의 동태를 확인해 주었으면 했다.
혹시 모를 배신자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저놈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알겠어요.”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서현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원래 얼굴이었다면 조금 귀여웠을 테지만, 털이 숭숭 달린 아저씨인 지금은 도저히 못 봐줄 꼴이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나는 전과 달리 빙궁의 뒷문으로 향했다. 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부분부터 빠르게 훑어볼 생각이었다.
━궁은 왜 살펴보는 거냐?
“이곳은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라면서요?”
━그렇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뜻이잖습니까, 그거.”
나는 그동안 게이트 너머의 세상을 ‘인스턴트 던전’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다. 게임에나 나오는 일종의 ‘가짜’ 세상이라고 생각한 거다.
죽이면 전리품이 떨어지고, 때로는 성장의 발판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까지 하니 그 생각은 점점 굳어졌다.
“누구도 이곳이 진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게이트 안에서는 소통 가능한 인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인간처럼 보이는 것들도 모두 인간형 몬스터라는 이름의 인간이 아닌 무언가였고요.”
하지만 그거야 세상의 간섭을 막는 누군가의 조치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여기가 허상이 아니라는 거다.
━이미 이 세계는 멸망한 지 오래다.
“멸망하기 전까지 이곳은 평범한 세상이었겠죠. 수많은 사람이 살아갔던.”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속속 발견되었다. 세탁실이라든가, 화장실이라든가. 주방 같은 것들. 몬스터가 아닌 사람들이 이 성에 살아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주방에서는 막 음식을 만들던 중인지 잘린 식재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궁이에 있는 냄비 안에는 수프가 끓던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모든 게 얼어붙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겠지.
그곳을 살펴보며 나는 한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이 성을 얼린 게 무엇이든, 그 어떤 반응도 할 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는 것.
“마치 폼페이 유적을 보는 것 같네요.”
━그건 또 뭐냐?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는 바람에 도시 하나가 전부 재에 덮이는 일이 있었거든요. 사람들 또한 피할 새도 없이 화산재에 덮였죠. 나중에 그곳을 발굴해 보았을 때 모습이 꼭 이랬다고 해요.”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신발 한 짝을 바라보았다.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이곳에서 도망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폼페이에서도 사람들의 흔적은 남지 않았습니다. 고온과 기나긴 세월에 남은 시체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후에 과학자들이 비어 있던 화산재 틈에 석고를 붓자 그날 사람들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죠.”
나는 신발을 넘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어쩌면 특수한 방법으로 모습을 살려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 아마도 어려울 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세계의 법칙에 의해 사라진 것일 테니까.
“세계의 법칙이요?”
━다른 차원의 존재와 함부로 접촉하면 안 된다든가 하는?
“하지만 전 레이와 만나지 않았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확실히 그런 규칙이 있다면, 그동안 왜 어떤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는지 납득은 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괜찮은 건가. 나는 레이의 눈치를 살폈지만, 마음이 상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을 사용인들은 그야말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 성에 남은 건 첨탑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여자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세레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서현이 묘사한 여자는 20대 초반의 미녀. 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창백한 피부에, 푸른 머릿결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비록 첨탑에 갇혀 있었지만, 그녀의 취급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며, 고급스러운 가구들까지. 방에 꾸며진 가구는 모두 최고급품이었다.
본성에 있는 것들과 비교해도 퀄리티가 그렇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라나. 갇혀 있긴 했어도 최소한의 삶은 보장했다는 뜻이다.
첨탑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그녀가 정말로, 아니면 진정한 보스를 부르는 트리거일지는 모른다.
━2차 공략대라는 놈들이 여길 공략했다며? 그놈들은 어떻게 한 거래?
“뭐, 정석적인 공략대로 했겠죠.”
딱히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다던 언급이 없었으니 여태까지 해 왔던 공략대로 해 왔을 겁니다.
“탐지 마법으로 첨탑에 몬스터가 있다는 걸 깨닫고, ‘세레나’를 깨워서 죽이는 거요.”
그것만큼 간단한 ‘공략’법은 없다.
내가 괜히 이 성을 구석구석 뒤지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이 성을 조사해 이 성의 비밀을 알게 되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못 찾으면?
“정석적인 공략대로 해야죠. 정면 승부로는 승리할 방법이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유선제가 내 말을 영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의 전력으로는 S급의 게이트를 정면 돌파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여기에서 정보를 얻어 내야겠죠.”
나는 누군가가 급하게 도망친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용인들이 모여 있었던 곳이라 그런지, 위층과는 달리 물건들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사용인들이 머물렀던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자그마한 방들에는 별로 특별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침대, 그리고 자그마한 협탁과 옷장 같은 것들 것들이 전부였다.
━이런 데에 중요한 게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 시기의 하인들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시종급은 돼야 글을 알았지.
레이의 말처럼 이곳 사람들은 문맹이었는지, 책이나 필기구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겨우 책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 찾긴 했지만, 이미 투명하게 얼어붙어 버린 책은 책 모양의 얼음덩어리일 뿐 책으로서 기능하지 못했다.
혹시나 이 얼음을 녹이면 뭔가 달라질까 해서 근처에 불덩어리를 띄워 봤지만, 얼음은 그대로였다. 혹여 마력이 부족했던 걸까 싶어 화력을 올려 보니 책이었던 얼음은 그대로 녹아 물이 되어 버렸다.
“속까지 투명하진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이미 이건 얼음이었다. 녹인다고 해서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끄응.”
━책을 찾아도 저래서야 읽지도 못하는 거 아니냐?
“어쩌면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쓰게 웃었다. 성은 넓었지만, 딱 내가 필요한 정보가 ‘펼쳐져 있는’ 상태의 책을 발견할 정도로 넓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결국 별 소득 없이 사용인들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타고 올라간 위층에서부터는 확실히 귀족들이 사용한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공간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화려했으니까.
질릴 정도로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캐비닛을 지나는 중에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하나 더 있긴 하군.
“뭡니까?”
━보통 이렇게 큰 성을 지어 놓은 놈들은 자기애가 특출나기 마련이지. 그런데 이 큰 성에는 초상화가 단 한 점도 없지 않은가?
“아.”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다. 레이의 말대로 이 성에는 그 어떤 인물화도 없었으니.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초상화도 사라진 게 아닐까요?”
━게이트가 날리는 건 생명체들뿐이다. 물건들은 건들지 않아. 생각해 봐라. 그동안 들어갔던 게이트 안에서 이렇게 그림이 단 하나도 없었던가.
“모르죠, 여기가 내 첫 게이트니까.”
━맙소사. 처음부터 S급 게이트에 왔다고?
나는 레이의 경악을 뒤로 넘기고 생각을 이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베르사유의 궁전을 지은 루이 14세는 평생 700여 점의 초상화를 남겼을 정도로 초상화 중독이었다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이 정도 규모의 성에는 인물화가 심심찮게 걸려 있기 마련이었다. 그 성의 주인이든, 그 주인대의 조상이든.
그리고 그건 게이트의 세상에서도 별다를 것 없었다.
저번 옥션에서도 흡혈귀의 고성에서 발견된 흡혈귀 초상화 따위가 1억 2천만 원에 팔렸었지.
확실히 이렇게까지 초상화가 없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그 어떤 인물화도 없다니.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모두 제거한 것처럼 말이다.
“일단 계속 수색해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방들을 뒤지다 나는 이 성의 성주가 머물렀을 법한 거대한 사무실을 하나 찾았다. 고급스러운 책상과 잔뜩 어지럽게 늘어선 서류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늘어선 책장까지. 완벽한 집무실의 모습이었다.
나는 입구에서 가까운 책장으로 시선을 먼저 돌렸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발견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책장과 하나로 얼어붙어 있어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책장에 꽂힌 책을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이곳에는 내가 말했던 펼쳐진 페이지가 가득했다.
나는 책장 위에도 흩어져 있는 서류들에 시선을 던졌다. 다행히 펼쳐져 있던 서류들 위에 쓰인 글자들은 얼핏 구분이 가능할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이곳의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3획짜리 재능 ‘번역’.
마나 회로를 자극하자 내 눈앞에 책에 적혀 있던 글자가 해석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부 구휼…… 요청…….」
투명한 유리 위에 적혀 있어서 글자 몇 개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대충 해석은 되었다. 하지만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말 그대로 동부에 가뭄이 들어 사정이 어려워졌으니 도움을 달라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서류 해석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변에 가뭄이 들어 도움을 받을 수 있진 않을까 요청하는 서류네요. 받는 이는 ‘헤르맨 백작’이고요. 이곳에 살았던 성주의 이름 정돈 알게 됐네요.”
이 서류의 옆에도 여러 가지 서류가 깔려 있었지만, 역시 얼음으로 되어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흠.”
여기에 있는 책만 어떻게 읽을 수 있게 되어도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꼼짝도 않는 서류를 떼어 낼 수는 없는 노릇.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올렸다.
━저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저도 봤습니다.”
화려한 의자 뒤에는 거대한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커튼은 누군가 급하게 걷어붙인 형태로 굳어 있었다. 걷어진 커튼의 틈으로는 ‘숨겨져’ 있었던 문이 보였다.
나는 문에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것들처럼 얼어붙었나 했지만, 아니다.
이건 잠겨 있는 거다. 손잡이는 쩔걱하는 소리를 내며 분명히 돌아갔으므로.
흠, 나는 눈에 집중했다.
아티팩트라면, 어떻게든 푸는 게 가능하다.
나는 마나를 끌어 올려 손잡이 안으로 침입시켰다.
딸깍.
문은 가볍게 열렸다.
“좋아, 들어가 보실까.”
이 안에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제10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