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10
58 사기꾼과 거짓말쟁이 (5)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과 발은 무언가로 꽁꽁 묶인 상태였다. 눈에도 안대가 씌워져 있어,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다. 머리 뒤가 축축했다. 내 피인지, 아니면 와인인지 모르겠다. 초재생 덕분에 고통은 없었지만, 와인 냄새가 가득한 뒤통수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가 들리고 몸이 흔들리는 걸 보니, 내 몸은 어딘가에 실려 이동 중인 것 같았다.
자동차인 것 같긴 한데, 바닥이 딱딱한 걸 보니 일반적인 차량은 아닌 것 같았다.
트럭? 컨테이너? 뭐가 됐든, 몸이 결려 죽을 것 같았다.
근처에 누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데, 이거 어쩐다…….
━바보 같은 놈.
마침 반가운 레이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된 거긴. 방심하다가 뒤통수를 맞아서 쓰러진 거지, 뭐.
‘끄응.’
레이의 적나라한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머리에 와인 병을 맞고 기절했다니……. 아무리 방심했어도 그렇지, 그런 허접한 공격에 당하다니. 이래서야 빌런 조직의 보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수 있겠느냐고!
크흠, 그래도 애들이 없는 상황에서 당한 거라 다행이었다. 그 앞에서 당했다면 며칠이고 놀림을 받았을 테니까.
‘육체 강화계가 아니라서 제 몸이 조금 말랑말랑한 경향이 없잖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랄까……. 전투 버전이 아닌 저는 꽤나 약하달까…….’
━뭐냐, 그 역겨운 말투는.
큼, 큼. 속으로 헛기침을 내뱉은 나는 레이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신나 버린 게 문제죠. 흐흐, 네 놈의 작전은 이미 모두 까발려졌는데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 하면서 변신 시간을 주는 하급 엑스트라처럼 행동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냥 방심했다는 거 아니냐?
‘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중요한 순간 방심하는 것 또한 악당의 덕목이라고 할까.’
━네 논리대로라면 저쪽이 영웅이라도 된다는 건데, 그건 아니지 않냐.
그도 그렇네. 역시 레이는 똑똑했다. 바로 내 말의 논리를 박살 내다니.
━헛소리는 그만하고 정신 차려라.
‘예.’
손과 발을 결박당한 데다가, 시야까지 가려진 채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실려 가는 중이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정신이 백 번은 나갈 상황이지만, 다행히 내겐 레이가 있었다.
‘제가 기절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딜러 녀석이 버튼을 누르니까 웬 가스가 바닥에서 올라오더군. 그 가스를 맡은 사람들은 다들 픽픽 쓰러졌다. 그다음으로는 손발을 묶고 눈을 가린 채로 웬 트럭에 사람들을 실었고.
가스를 썼다는 건가. 내가 일찍 정신을 차린 건, 아무래도 초재생 덕분인 것 같았다.
‘웬만한 약물은 각성자에게는 통하지 않을 텐데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제법 센 걸 준비했다고 하더군.
‘제 옆에 그럼 다른 사람들도 실려 있겠군요.’
━한 명은 빼고.
내가 무어라 묻기 전, 레이가 말을 이었다.
━니키, 그 여자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다른 곳이라면…….’
어디로 갔냐고 물을 순 없겠군. 레이가 볼 수 있는 건 내 주변뿐이니.
‘끄응.’
설마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누군가를 죽일 생각으로 옮겼다면, 처리하는 건 이쪽일 가능성이 컸다. 니키와는 달리 죽여도 별 탈이 없는 인원이라고 생각하면 말이 됐다.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하는 것도 처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이해가 됐다.
━어쩔 셈이냐?
사실 정신을 차린 이상 이곳에서 탈출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각성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약물을 믿은 것인지 딱히 능력을 제어하는 아티팩트도 없었고.
문제는 그렇게 탈출해서는 이 일의 배후를 찾기 힘들다는 거지.
‘일단은 상황을 두고 볼까요.’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가서 뭘 할지 정말로 궁금하니까.
━그래, 네 놈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레이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숨을 죽였다.
이 트럭이 멈출 때까지, 한 번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 * *
나를 실은 트럭이 멈춰 선 곳은 도시와 거리가 꽤 떨어진 교외의 한 주택이었다.
화려한 외관에 규모가 꽤 되는 저택은 끔찍한 범죄 사건의 배경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트럭은 저택의 뒤에 딸린 창고 앞에 멈춰 섰다. 트럭 운전석에 타고 있던 어거스트와 모지아노가 내리고, 트럭의 문이 열렸다.
나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몸의 힘을 쭉 뺐다. 트럭 뒤에 실려 있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힌 두 사람은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어깨에 짊어 멨다.
“젠장, 더럽게 무겁군.”
50대 중년의 남자를 짊어진 어거스트가 욕설을 내뱉었다.
“도, 도와 달라고!”
운동을 게을리한 모양인지 끙끙거리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 모지아노는 어거스트를 도와 남자를 옮겼다.
가장 마지막이 내 차례였다.
“이 자식은 왜 머리를 깨 놓은 거야? 그 와인이 얼마짜린 줄이나 알아?”
“말했잖아, 기분 나쁘게 눈이 마주쳤다고.”
“겨우 그 이유야?”
“아니, 묘하게 암시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거스트의 말에 나를 끌어당기던 모지아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진짜 그런 거면 큰일 난 거 아니야? 그 여자한테도 암시가 통하지 않았다는 건데…….”
“……젠장, 나는 잘못 없어. 아티팩트가 고장 난 거잖아. 보스한테도 그렇게 말해. 아티팩트가 잘못 작동한 거라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닫아 버려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흠, 이왕이면 정보를 더 줬으면 했는데…….
나 또한 그들의 어깨에 실려 창고로 옮겨졌다.
다행이랄까. 창고에서는 텁텁한 먼지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피 냄새가 없다는 건, 어찌 보면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약물에 취한 사람들을 차곡차곡 창고에 버려두고 있을 때, 누군가 난입했다.
“세상에!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디에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였으니까. 남자, 중년, 쓸데없이 좋은 목소리. 그래, 이 목소리. 귀에 아주 익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어?”
“그야, 오늘은 창고를 쓰는 날이 아닌데 왔잖아요.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와 본 거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남자의 말에 어거스트는 짜증을 버럭 냈다. 새로 난입한 인물은 그다지 신뢰를 받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상관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사,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왔는데. 설마 죽, 죽은 건 아니죠?”
소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어거스트는 짜증을 냈다.
“말했잖아. 네 알 바가 아니라고.”
“하지만 오늘은 창고를 쓰는 날이 아니고…….”
“젠장, 진짜 귓구녕이 막히기라도 한 거냐? 이건 네 일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어거스트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질 때였다. 모지아노가 그의 말을 막았다.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제정신이야? 할 줄 아는 거라곤 술 따르며 웃는 것밖에 모르는 놈한테…….”
“그래도 감시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지금 우리한텐 여기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하아…….”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쉰 어거스트가 남자에게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있는 놈들, 우리 보스의 일을 방해하려던 사람들이야. 죽은 건 아니니까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짓지 말고.”
“예, 예에.”
모지아노가 말을 이었다.
“약에 취한 상태라 내일 오전까지는 깨어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고.”
“네.”
순하게 대답하는 남자의 태도에 만족한 듯, 두 사람은 몇 개의 주의 사항을 내뱉곤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대로 저 사람들을 보낼 생각이냐?
‘음…….’
확실히 저 두 놈을 붙잡아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뭔지 묻는 게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겠지. 하지만 말이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신경 쓰여 미치겠거든.
그래서 나는 어거스트와 모지아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몸을 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기척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히이익!”
벌떡 몸을 일으킨 내 모습에 놀라, 남자가 뒤로 넘어졌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아니, 저녁이 아닌가? 때가 맞지 않는 인사라면 미안합니다, 영 앞이 안 보여서 말이죠.”
━태연하게 인사나 할 때냐!
‘왠지 제가 아는 사람 같아서 말이지요.’
얼굴을 확인한 게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니, 나는 확신했다. 저런 잘생긴 목소리로 얼빠진 소리나 해 대는 사람이 흔할 리 없지.
하지만 내 인사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존 스미스 씨?”
“마, 맙소사!”
내게 이름이 불린 남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말했다.
“놀라는 것도 좋지만, 괜찮다면 내 안대를 풀어 줄래요? 아무래도 눈이 가려진 게 좀 답답해서 말이죠.”
“세상에, 잠깐만.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고, 아니, 우리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음, 질문에 대답해 줄 테니, 일단 내 안대를 풀어 줄래요?”
“아니, 잠깐.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당신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게요, 안심해요. 내가 어떻게 그쪽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잖아요, 안 그래요?”
내 말에 존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안대를 풀었다.
오랜만에, 아니, 이 세상에서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푸른 눈동자를 본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나, 나를 어떻게 아는 거죠?”
“크흠, 당신 아나운서였잖아요. 방송을 몇 번 봤거든요. 팬이었어서.”
“와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 봐요. 어, 그러니까 진짜 처음인데……. 제 팬이라니, 원한다면 사인이라도……. 아니. 정말 바보 같은 말이죠, 하하! 하필이면 이런, 이런 상황에 제 팬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쪽 방송으로 영어 공부를 했어요.”
“와아, 그것참 고마운데, 이상하달까, 어, 그러니까…….”
아, 참. 내 얼굴은 지금 누가 봐도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처럼 생겼지. 나는 황급히 말을 둘러댔다.
“어, 그게 내가 영국 사람이거든요.”
“……영국에서도 영어를 쓰지 않나요?”
젠장. 바보 같은 나!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미국 억양을 공부했다는 거죠.”
“오! 그러고 보니 억양이 저하고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존이 순진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래,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었지.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오.”
내 말에 존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저, 저는 그러니까…….”
내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린 존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정말 민망하네요. 그게, 저도, 저도 여기에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닌데…….”
꽁꽁 묶인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 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뻔한 얘기죠. 빚 때문이에요.”
“그래도 아나운서로 성공했을 텐데…….”
“동생이 마약에 손을 댔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그렇게 되더라고요.”
존은 쓰게 웃었다.
“동생을 대신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다행히 여기 보스가 나를 예뻐해 줘서 배가 갈리는 일은 면했지만 말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존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한동안은 누군가의 정부로 살았댔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어쨌거나 상황이 이렇게 돼서 그렇지. 존은 근래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려고 했는지.
그래, 이런 사람이 그런 일을 겪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기에서 존을 만났다는 건 일종의 운명 같은 게 아닐까?
나는 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운명을 믿어요, 존?”
제2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