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91
78 악몽이 지나간 뒤 (1)
“내려 줘.”
나는 김재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이제 위험한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김재호는 나를 순순히 내려 주었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한서현을 지나쳐 바로 치앤츠리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저우샤오첸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정신을 놓은 것 같구나.
‘제정신일 수가 없죠.’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되었으니.
이 도시를 파괴할 재앙이 들이닥치는 건 막았지만, 이건 해피 엔딩인가?
저우샤오첸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치앤츠리앤에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진정한 악몽은 이제야 시작일 테니까.
저우샤오첸의 환상으로 빚어낸 풀밭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숨이 끊긴 뒤에도 그녀가 불러낸 환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왜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환상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환상을 현실로 불러낸 것이니까.
━엄청난 재능이다.
‘예.’
안타까웠다. 이곳에서 그녀의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게 끝난 것이.
살아 있었다면,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바랐던 대로 정말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외면한 채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택했고, 그 결과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거짓말은 나쁘다니까요.’
거짓말이 재능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니, 나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거짓말로 자기 자신을 속여 보았자, 결과는 이렇다.
저우샤오첸이 죽으며 당장에라도 폭주할 것 같았던 마나는 안정화되었지만, 여전히 지닝시의 상황은 끔찍했다. 지금 우리가 자리 잡은 두 블록 안에 있었던 모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밖의 공간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마나에 중독된 채 쓰러져 있었다.
도로는 연달아 교통사고로 엉망이지, 빌딩에는 화재가 번져 난리고, 거기에 가스관까지 폭발해 지금도 매캐한 연기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아, 엉망이네.”
그야말로 엉망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마법처럼 영웅이 등장해 모든 일을 해결해 버렸다는 식의, 만화 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얼렁뚱땅 페이지를 뒤로 넘겨서 모든 일을 해결해 버리는, 그런 꼼수를 쓸 수가 없다는 거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빌런’을 해치운 뒤지만, 기뻐할 수도 없다.
그 빌런이라는 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그렇지.
그래도 말이다. 언제까지 여기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나는 치앤츠리앤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순 없습니다.”
뭐, 이런 말을 해 봤자 귀에 들어올 리 없겠지만. 그래도 말은 해 봐야지.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사방을 짓누르던 마력은 이미 사라졌다. 출입을 막던 마력장이 사라졌으니, 곧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 거다.
여기에 이대로 있다가는, 이 일을 저지른 범인으로 몰리기에 딱 좋다는 거다. 나는 치앤츠리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죠.”
“……내버려 둬.”
치앤츠리앤이 말했다. 나를 향한 예의를 어디론가 갖다 버린 채였다. 이젠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어졌겠지.
“내버려 두라니, 여기에서 죽고 싶은 거야?”
내 말에 치앤츠리앤은 쓰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치앤츠리앤이 이곳으로 오며 무슨 결심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한서현에게 전달받은 말은 딱 하나.
‘그 여자요. 거짓말을 한 죄를 갚을 테니 딱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어요.’
그 말대로 치앤츠리앤은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갚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우샤오첸이 한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본인이 치른 거다.
저우샤오첸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자신을 속였고, 그 결과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아아, 거짓말이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거짓말이 재능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면은 결국 이런 꼴을 맞이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주제에 잘도 숨을 쉬듯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래도 이 정도 스케일로 거짓말하진 않았잖습니까.’
기껏해야, 음, 사람들을 속이고 조작해서 신분을 도용하고 도둑질을 한 정도잖냐. 그 정도 거짓말은 누구나 하고 다닌다고.
어쨌거나 치앤츠리앤은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이미 치렀다. 자기가 아끼던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인 사람을 두고 더한 대가를 치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죽고 싶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뜻을 존중해 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괜히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어찌 말하자면, 당신이 이 도시를 살린 거나 다름없잖아.”
치앤츠리앤은 저우샤오첸을 죽임으로써 이 지닝시에 더한 재앙이 들이닥치는 걸 막았다.
지금 이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였더라면 저우샤오첸은 절대로 순순히 죽어 주지 않았을 테니까.
치앤츠리앤이었기에 저우샤오첸이라는 이름의 재앙을 막을 수 있던 거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니 죽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말을 내뱉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말투가 너무 가벼웠나. 쉽게 말이 나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치앤츠리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이 나 때문에 죽는 게 얼마나 개같은지, 그 다음에 찾아오는 상실감이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지, 나보다 더 그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정말 죽고 싶다면야, 그래, 죽어도 좋아.”
한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나이기에 할 수 있는 배려랄까.
이 말은 진심이다. 하지만 이대로 치앤츠리앤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적어도 한 가지를 묻기 전까진.
“그래도 말이야, 이 말은 해야겠어.”
나는 무릎을 꿇고 치앤츠리앤과 눈을 맞댔다. 치앤츠리앤의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가 속삭였다.
“죽은 샤오첸이 그걸 바라지 않을 거다, 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저우샤오첸의 복수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복수…… 라고?”
“그래, 물론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저우샤오첸의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 애초에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가만히 잘 있던 저우샤오첸을 납치한 건 해성회 쪽이잖아?”
나는 치앤츠리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쪽이야말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든 범인이라, 그거지.”
자고로 복수보다 더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 말을 들은 레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사람을 살리겠다고, 다른 놈을 죽이자는 말을 해?
‘하지만 언제나 먹히는걸요.’
게다가 난 사람을 위로하는 일에 서툴단 말이다. 어디선가 들은 좋은 말들을 갖다 붙여서 적당히 사람들을 구슬리는 일에는 익숙해도 진심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건 내 전공이 아니다.
정호산 같이 좋은 사람들은 적당히 좋은 말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 같은 놈은 이런 방법밖엔 모른다.
죽어? 네가 왜 죽어? 진짜 죽어야 할 놈이 살아 있는데, 왜 죽냐고!
내 말을 들은 치앤츠리앤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해성회…….”
“그래, 애초에 해성회가 저우샤오첸을 납치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니야?”
그녀가 만든 약이 이 세상을 뒤집어 놨을 수는 있지만 말이지. 그래도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죽진 않아도 됐을 거다.
그러니까…….
“복수.”
“그래, 복수.”
죽어 가던 치앤츠리앤의 눈동자에 불이 들어왔다. 저우샤오첸을 꼭 끌어안은 치앤츠리앤이 내게 물었다.
“……그놈들을 찾아갈 생각인가?”
“그래. 나도 그쪽에는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말이지.”
“좋아.”
치앤츠리앤의 눈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따라가겠어.”
역시 기운을 북돋는 데에는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한서현이 말했다.
“사람들이 시 안으로 진입했어요. 곧 있으면 여기까지 올 거예요.”
난 치앤츠리앤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아까와는 달리 치앤츠리앤은 내 손을 붙잡았다. 품에 저우샤오첸의 시체를 꼭 붙든 그녀를 보며 한서현이 말했다.
“원한다면 그분은 제가 옮겨 드릴 수 있는데.”
“아니, 도움은 필요 없어.”
“그렇다면야.”
한서현은 치앤츠리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시체를 스켈레톤으로 만들어 준다는 소리를 안 해서 다행입니다.’
맨날 나한테 툭하면 그런 말을 하길래, 걱정했는데. 그래도 안에서만 새는 바가지라 다행이었다.
우리는 차송진과 김재호가 있는 쪽으로 합류했다.
“하늘이…….”
차송진의 말에 나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저우샤오첸이 죽으며 이 주변에 흩어졌던 마력은, 마치 그녀의 동공 색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때 이르게 찾아온 벚꽃처럼 사방으로 흩날리는 저우샤오첸의 마력을 본 차송진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쁘네.”
그래, 지금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참으로 더럽게 예쁜 풍경이었다.
* * *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설록진은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강이신’이라는 놈에 대해 확실히 알아보기 전까지는, 함부로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궁지로 몰았던 인간이다. 시간을 들여 정보를 찾을 가치는 충분했다.
설록진은 강이신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긁어모았다. 하지만 그 수는 턱없이 적었다.
강이신의 삶은 고작 A4 용지 다섯 장 분량밖에는 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두 살 때 보육원에 맡겨졌고, 재능을 각성한 뒤에는 바벨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졸업 후에 게이트 채굴 업체에 취직.
그나마도 불법 게이트 사건과 엮인 뒤에는 살인자로 공개 수배를 당한 신세. 그 이후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었다.
강이신이 공개 수배가 되는 데에 힘을 쓴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면 조금 그렇겠지만, 직접 그와 다시 대면하기 전까지 설록진은 강이신이라는 이름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이신이라는 헌터는, 아니, 헌터도 되지 못한 이 각성자는 설록진의 눈에 들 가치도 없는 쓰레기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쓰레기라고 여겼던 그가 무려 자신의 능력을 무효화시킨 데다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것을.
설록진은 바벨 아카데미에서 빼돌린 자료를 손에 쥐었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강이신의 증명사진 밑으로는, 그의 프로필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생일 1월 20일, 178cm, 70kg, A형, 시력은 1.5. 개인적인 정보 밑으로 적혀 있는 강이신의 재능에 설록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거짓말.”
강이신의 재능은 ‘거짓말’이었다.
“푸핫.”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거짓말이라니. 헌터가 되지 못하고 도태된 것도 당연하다.
겨우 거짓말.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 것도 거짓말이었나.’
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적어도 놈은 그렇게 믿었지.’
설록진은 그다음 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이신은 사교성이 더럽게 없는 인간이었다. 보육원에서도 늘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았고 바벨 아카데미에서는 대놓고 따돌림을 당할 정도였다. ‘바벨의 수치’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바벨의 수치라고 불릴 만큼 강이신의 능력은 형편없었으니까.
그런 강이신과 친분이 있다고 말할 만한 사람은 딱 하나였다.
‘정호산.’
길드의 루키.
그리고…….
‘얼마 전에 순직한 각범부의 신입.’
그가 죽은 날짜를 본 설록진이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빼돌린 건가, 아니면 정보가 샐 것을 걱정해 처리한 걸까.
‘전자라면 실망이고 후자라면…….’
글쎄, 어쩌면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이해할 가능성이 있는 씨앗을.
제29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