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55
20 은월회 (3)
[중국어를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는데?] 장리우위앤은 놀란 얼굴이었다. 백도산 또한. 조금 전까지 나를 얕보던 말을 한 장리우위앤은 티를 내진 않았지만, 크게 당황했을 거다.“중국어를 잘한다는 소리는 없지 않았나?”
“못한다는 소리도 안 했는데요.”
조금 더 못 알아듣는 체를 하며 속을 떠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중요한 이야기 전에 신경전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쪽 친구는 호탕하네.”
이번엔 장리우위앤 측에서 내뱉은 한국어였다.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한국은 내 주요 거래처니, 한국어를 익혀 두는 건 당연하지.”
그럼에도 중국어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역시나 이쪽을 떠보기 위함인가.
“일단 식사부터 들도록 할까?”
언제 이 말을 하나 했다. 나는 옆에서 침만 줄줄 흘리고 있던 김재호에게 말했다.
“먹어도 돼.”
내가 말하자마자 김재호는 접시에 달려들었다. 식사 매너는 어디로 사라진 지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 안으로 쓸어 넣는 그를 보며 장리우위앤이 웃으며 말했다.
“친구가 많이 배고팠나 보군.”
그 웃음에 꺼림칙한 기색은 전혀 없지만, 저 정도 위치가 되면 속마음을 겉으로 전혀 드러내지 않게 되는 법이다.
한서현도 조심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한 입 먹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엄청나게 맛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벨츠머츠라는 건 팀 이름이라고 알고 있는데 자네 이름은 뭐지?”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거렸다. 딱히 마땅한 가명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제법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곧 벨츠머츠 그 자체죠. 리더, 헤드. 원하시면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
말투만 매끄러웠지, 그 내용이 허접한 게 함정이지만.
━아무렇게나 부르라니.
‘딱히 이름을 생각 안 해 둔 걸 어떻게 해!’
그러고 보니 조직 이름만 정했지, 우리들의 이름도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이미 새로운 신분증을 만들어 둔 나나, 제대로 된 신분이 없는 김재호와 달리 한서현에게는 꼭 가명이 필요할 텐데.
음, 나중에라도 생각해 봐야겠다.
“하긴, 자네 이름은 중요하지 않지.”
영 허술한 내 변명을 장리우위앤은 장난스럽게 웃어넘겼다. 곧 그 웃음은 사라져 버렸지만.
“이야기는 들었겠지. 지금 이곳은 꽤 위험해.”
“적사회 쪽이랑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쪽이 우리를 먼저 쳤어. 사전 고지도 없이 비겁하게 각성자를 이용해서 흔적도 없이 우리 사람들과 업장을 날려 버렸어. 전쟁이라고도 할 수 없어. 학살이었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얽힌 일이라면 리우위앤의 말처럼 그동안의 양상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에 가까웠을 거다.
“내가 원하는 건 적사회 녀석들을 이곳에서 쫓아내는 거야. 가능하겠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은 모르겠는데요.”
내 말에 장리우위앤의 뒤에 선 여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이 자리에서 이따위 말을 해? 이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심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여기에 끌려왔는데, 어떻게 확답할 수가 있겠느냐고.
“일단 최선을 다해 보긴 하겠습니다.”
“으음, 그래.”
장리우위앤 또한 찝찝한 표정이었다. 백도산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들과 같이 식사하고 싶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자리를 떠야겠군.”
그렇게 말한 장리우위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맛있게 먹고 가게.”
그렇게 말한 장리우위앤은 그대로 자리를 떠 버렸다.
명백한 무시였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맛있게 먹어라, 얘들아.”
* * *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여태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천시연, 치앤츠리앤은 입을 열었다.
“정말 보기만 해도 실망스러운 놈들이군요.”
그 말에 장리우위앤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보기만 해도 어수룩해 보이기는 했다. 가면을 쓴 남자는 건방졌고, 그 뒤에 있는 어린애는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길거리 삼류들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뜬 것도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백도산이 소개해 준 자리니만큼 이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백도산에게마저 실망감이 들 정도였다.
“정말 저런 녀석들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치앤츠리앤의 말에 장리우위앤은 피식 미소를 흘렸다.
“나쁠 건 없지 않나? 어차피 저들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글쎄.”
장리우위앤이 말했다.
“우리가 조금 더 우스워질 뿐이겠지. 잃을 게 없잖나, 우리는.”
상황은 무척이나 나빴다. 은월회가 그동안 적사회에게 빼앗기거나 파괴된 구역이 80%에 달했다. 불과 육 개월 만에 이곳을 수십 년간 지배했던 그들이 밀려나고 있는 거다.
적사회는 이미 이 시대의 대세가 된 지 오래였다.
이들을 부른 것도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적사회에는 괴물이 있었다. 흔적도 없이 모든 걸 집어삼키는 괴물이.
* * *
백도산은 우리를 향해 대신 사과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우리 꼴을 봐요. 무시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일에 마음이 상할 만큼 제가 섬세하지를 못해서.”
오히려 불편한 사람이 사라지니 밥맛만 더 돌더라.
그리고 저런 사람은 백번 말로 설득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결과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그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한번 그놈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말로 백도산과 헤어진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정보를 캐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부터 먼저 말해 둘 셈이었다.
“적사회의 두목은 사마헌이라는 남자야. 하지만 이 사람을 경계할 필요는 전혀 없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거든. 진짜 문제가 되는 건 그 사람의 양딸. 사호주. 쑤어하오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지.”
“여자애라고요?”
“응. 겉모습은 열다섯 정도 되었으려나.”
내 말에 한서현은 입을 벌렸다.
“잠깐,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게 겨우 열다섯 먹은 여자애라고요?”
“겉모습만 그래. 실제로는 그것보다 몇 살은 더 먹었을걸.”
“그, 그게 재능이에요? 동안?”
“아니, 그녀의 재능은 ‘거래’야. 자신의 무언가를 대가로 희생해서 힘을 얻는 식이지.”
그녀의 시간은 고정되어 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을 대가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도 그녀의 겉모습은 열다섯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때에는 이미 그녀가 활동한 지 십 년도 넘었을 때였다.
실제로 그녀가 정확히 몇 살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본인조차 본래의 나이를 잊어버렸으니까.
“그, 그런 재능도 있구나.”
“그래.”
“그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냥.”
“거짓말이 재능이라고 했으면서.”
“말했잖아, 이런저런 잡다한 재주가 있다고.”
“이런 건 잡다한 게 아닌 거 같은데.”
한서현은 영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 여자애가, 그러니까, 여자애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몇 살인지 모르는 그 사람이 우리 적이라는 거죠?”
“그래. 만만하게 봐서는 안 돼. 특이한 재능을 가진 만큼 말도 안 되게 세니까.”
재능은 말 그대로 재능이다. 그냥 타고 태어나는 거다. 이렇게 거래의 형태로 존재하는 재능은 유일하다.
그래서 그녀는 특별하다.
제한을 걸면 걸수록 강해지는 재능이라니.
그녀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대략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나는 쑤어하오주가 파괴한 단지를 비추고 있는 뉴스 화면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 파괴력이라면, 진짜 많은 걸 포기했을 거야.”
은월회가 그 어떤 대비도 없이 무너진 것도 이 ‘규격 외의 괴물’이 끼어들었기 때문.
“이 정도라면 자기 기억까지 내걸었겠는데.”
“기억이요?”
“그래. 기억과 감정. 양부가 꼬드겼을 거야. 그래서 자기 말만 듣는 무감정한 전투 기계가 되도록 만들었겠지.”
쑤어하오주의 인성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비견될 만큼 무심하고 잔인하지만 그건 모두 후천적인 거다. 양부의 말을 신뢰하고 믿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를 직접 만나 봤던 나는 안다. 쑤어하오주는 애초에 이런 전쟁을 일으킬 만큼 의욕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 모든 건 양부라는 인간이 지시한 거다.
“그러니까 그 별 볼 일 없다는 양부 쪽이 진짜 보스네요.”
“그래.”
나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애초에 쑤어하오주가 이 짓을 벌이게 된 것도 모두 그 양부라는 놈 때문이었으니까.”
그녀가 적사회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것도, 사람들을 죽이고 그 위에 올라앉은 것은 모두 그 양부 때문이었다. 양부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여자였으니까.
“그 양부라는 사람은 정확히 어떤 사람인데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입만 산 사기꾼이지.”
문제는 그 사기를 너무 잘 쳤다는 거다. 쑤어하오주를 발견하고 그녀를 자신의 입맛대로 맞는 전투 병기로 개조시켜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얻어 냈으니.
“너는 지금부터 그 사람을 찾아.”
“그럼 보스는요?”
“나는 일단 쑤어하오주, 그 사람을 찾아볼 생각이야.”
“자, 잠깐만요. 지금 엄청나게 세다고 하지 않았어요? 만나면 막 죽고 그 정도 아니에요?”
“그래도 아무나 막 죽이고 그러지는 않아. 양부가 우리를 죽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안전할 거야.”
내 말에 한서현은 입을 벌렸다.
“혹시 죄송한데, 미치셨어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와하하 웃으며 버르장머리 없는 그의 주둥아리를 단죄했다.
“아야!”
“아주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구나!”
“못 할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여태까지 그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한참 얘기해 놓고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니.”
“다 생각이 있어서 보러 가는 거야.”
내가 쑤어하오주를 만나는 건 지금으로부터 4년 뒤, 그러니까 나는 이때의 쑤어하오주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한번 보러 가 보는 거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일단은 우리의 적을 알아야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도 알아내지 않겠나.
“가장 좋은 건 쑤어하오주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야. 애초에 양부의 말에 놀아나지 않게 설득하는 거지.”
“그게 가능할까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쑤어하오주는 양부를 사랑했다. 정상적인 부성애라고 절대 볼 수 없는, 잘 작동하는 물건을 애정하는 듯한 딱 그 정도의 사랑이라도 그녀는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 사랑이라도 없으면 안 될 정도로 그녀의 삶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이 세상에는 다른 것들이 많다.
그녀가 사랑할 만한 것들이.
어쩌면 그걸 알려 준다면 이 비틀린 비극을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쑤어하오주를 미리 만나 볼 생각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막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응.”
나는 그녀를 가까이에서 봐, 몇 가지 버릇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그녀가 들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이스크림 가게라든가.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은 한서현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진짜 내가 미쳐.”
제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