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70
25 모래 폭풍을 잠재우는 법 (1)
우리는 거대한 코뿔소를 타고 이동했다. 중간중간 몬스터들이 달려들면 현장에서 내려서 상대하거나,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내가 처리했다.
라미레스는 본인도 나서겠다고 했지만, 라미레스가 나선 후에 단검을 주워 줘야 하는 건 이쪽이라 사양했다.
도대체가. 애초에 무슨 생각으로 단검을 가지고 왔는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저 사람 말이에요. 아무래도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저렇게 단검을 일회용으로 써 댔다가는, 뭘 잡아도 파산할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실전 경험도 없는 한서현조차 널 의심하게 됐잖냐, 인마!
늘 거짓말과 뻥카로 나 자신을 치장하며 어떻게든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허술한 위장이었다.
그래도 라미레스를 내쫓을 생각은 없다.
일단은 누가 봐도 저놈은 강자다. 라미레스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묘하게 허술한 위장으로 보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기는 해도, 본인 자체는 늘 여유롭게 굴고 있었던 것이다.
라미레스의 행동에는 위기감이 철저히 결여돼 있었다.
진짜 재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는 저런 태도가 설명이 되지 않지.
━저놈이 너희를 공격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죠. 목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힘을 숨기고 들어올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오히려 더 가까이에 둔다는 생각이다.
[그나저나 지나칠 정도로 인기척이 없네요. 중간에 다른 생존자를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라미레스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셔틀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서로 방향이 엇갈렸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다들 센터로 돌아간 걸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확실히 모래 폭풍 속에서 이런 식으로 몬스터들의 습격이 이어지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의 전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유사시 6성급 헌터의 화력을 낼 수 있는 나야 이번 사냥에 제대로 나서지도 않았다고 쳐도, 인체 개조를 통해 인간의 신체 능력을 뛰어넘은 김재호와 지치지 않는 언데드들을 다루며 유사시 몬스터의 사체를 일으켜 물량전까지 뛸 수 있는 한서현.
그리고 수상쩍지만, 확실히 1인분 이상은 해 주고 있는 라미레스까지.
물량 공세로 쏟아지던 몬스터 웨이브까지 막아 낼 정도의 실력자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겠지.
이 상황에 개인으로 고립되었다고 치면…….
글쎄,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좋은 결과가 예상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버티기뿐이다.
모래 폭풍이 사라질 때까지 전자 기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그들과 접촉하는 것도 방향을 제대로 잡아 이곳을 탈출하는 것도 어렵다.
우리의 제1목표는 이 모래 폭풍 범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지만, 당장 방향을 제대로 잡기도 힘든 지금은 우리가 모래 폭풍 바깥으로 나가는 것인지, 오히려 모래 폭풍과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마침 해도 떨어지는지 점차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일단은 계획을 세워야겠다.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 쉬어야겠다.”
나는 한서현에게 말해 몬스터를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이만 여기서 오늘 밤을 보낼 생각이라서요.]
[여기서요?]
라미레스의 반응이 이해될 만큼, 이곳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평지다. 확실히 모래 폭풍 안인 걸 감안하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지. 가장 좋은 건 모래 폭풍을 완전히 피할 만한 장소를 찾는 거다. 모래 폭풍을 막아 줄 동굴 같은 거라든가.
하지만 그렇게 경우 좋게 우리에게 딱 맞는 장소가 갑자기 등장할 리 없다. 이가 없으니 잇몸으로라도 버텨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상황이 꽤 좋은 편이다.
[저 몬스터를 벽으로 세우고 천막을 깔면 대충 하루 정도는 편하게 묵을 숙소를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오오! 그런 방법이!]
요란하게 반응하는 라미레스를 뒤로하고 나는 차분히 몸에 메고 있던 배낭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설치하기 시작했다.
광원이 되어 줄 랜턴과 저녁 식사로 먹을 것들을 꺼내는 사이 김재호와 한서현은 미리 챙겨 온 기둥과 방수포로 대충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사이 라미레스는 멍한 표정만 짓고 앉아 있었다.
“왜 저래?”
한서현에게 묻자 한서현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자꾸 뭐 도와줄 거 있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영 도움이 안 돼서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더니 저래요.”
“뭐라고 했는데?”
“sit. 앉으라는 뜻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쓰면 꼭 개한테나 쓰는 말 같은데.”
“알 게 뭐예요.”
한서현은 라미레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여전히 라미레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한서현의 태도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충 어깨를 으쓱하고 그 시선을 넘겼다.
본인인 라미레스조차 그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내가 껴들 필요까지는 없겠지.
대충 우리가 챙겨 온 식량으로 저녁까지 해결했다. 라미레스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고글을 벗지 않았다. 나는 라미레스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이 모래 폭풍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나처럼 초행이라고는 해도, 혹시나 알고 있는 게 있는가 싶어서였다.
[아, 네. 사실 이렇게 모래 폭풍이 호주에 불기 시작한 건 몇 개월 정도 됐습니다.]
[몇 개월이나 됐다고요?]
[4~5개월 전에 터진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최상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저 모래 폭풍을 이끌고 말이죠.]
그 몬스터의 이름은 예브리카.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몬스터는 주변 반경 20km 정도에 모래 폭풍을 두르고 다녔다. 하지만 딱히 활발하게 활동하지도 않고, 반쯤은 가사 상태로 지내기에 여태까지 내버려 둔 거다. 최상급, 그러니까 S급 이상의 몬스터를 토벌하는 건 엄청난 자원이 필요한 일이었으니 여력이 없는 호주 정부로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을 터.
여태까지는 이 근처까지 접근하는 일도 없었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본래 모래 폭풍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와는 먼 곳에서나 불고 있었다는 뜻이다.
[왜 이토록 예브리카가 가까이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장벽을 넘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라미레스의 말대로 만약 예브리카가 장벽 쪽으로 접근한다면, 곧장 지옥이 펼쳐질 거다. 장벽이 무너지고, 그 무너진 장벽으로 이 근처에 있는 몬스터가 쏟아져 들어갈 테니까.
호주가 그런 식으로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다 싶지만, 확실히 위기는 위기다.
[그동안은 방치했다고 쳐도 슬슬 예브리카를 사냥해야 하지 않습니까?]
[으음, 호주 내에는 저 정도의 몬스터를 처리할 만한 헌터가 없어서 말이지요. 외국에 원조를 요청했는데 온다고 했던 사람이 없답니다.]
확실히 반쯤 버림받은 땅이 된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단다.
최상급 몬스터를 처리할 방법…… 같은 건 나에게도 없으니 내일부터는 이 모래 폭풍을 빠져나갈 방법부터 찾아야겠다.
[일단 지금은 푹 쉬고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상황에 불침번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다. 불침번의 순서는 가장 어린 한서현이 첫 번째, 내가 두 번째, 김재호가 세 번째, 마지막으로 라미레스가 서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자신을 배려한 걸 알았는지, 라미레스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뭐, 가장 믿지 못할 인원이라서 끝에 배정했다는 건 말하지 말아야지.
피곤했는지 라미레스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게 맞을까요?’
나는 눈을 감은 채 레이에게 물었다.
━어차피 아는 척을 해도 뾰족한 수가 없지 않냐?
그거야, 그렇다. 계속 머리를 굴려 보아도, 라미레스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네놈의 미래 지식으로도 말이냐?
‘가명일 게 뻔하지만, 이름을 들어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고 능력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제 앞에선 능력을 제대로 쓰지도 않았고요.’
라미레스의 거짓말은 처음부터 눈치챘다. 조준 보정이라면서, 조준할 때는 물론 목표물을 맞혔을 때조차 그의 마나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신기에 가까웠던 단검술은 그냥 실력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니었더라면 속았을 거다. 마력을 끌어 올린 채로 사용하지만 않은 거니까. 선글라스를 벗었다면, 그 안에 있는 동공이 빛나는 것도 볼 수 있었겠지.
최근 레이와 훈련하면서 내 몸에 있는 마나 회로를 횟수 하나하나 단위로 분석하고 있는 내가 아니었더라면, 깜빡 속을 만한 속임수였다.
‘궁금한 건 저런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저희를 속이는 이유입니다.’
나의 경우는 간단하다.
나는 범죄자고, 정부에 의해 쫓기는 몸이니까.
하지만 라미레스는?
━너처럼 범죄자일 수도 있잖냐.
‘그러기엔 너무 허술하죠.’
━하긴. 단검을 주 무기로 쓴다면서 단검을 회수할 방법조차 생각해 두지 않은 멍청이는 처음 봤다.
‘일단은 넘기렵니다. 지금으로서는 깊게 생각할수록 제 손해 같거든요.’
지금은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수밖에 없겠지.
* * *
다행히 불침번을 순서대로 서는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잔뜩 지쳤기 때문인지, 평상시에는 악몽으로 고생하던 한서현도 쥐 죽은 듯이 잤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밤새 널어놓았던 아티팩트를 주섬주섬 챙기며 입을 열었다.
[최선의 목표는 일단 귀환이겠지요.]
[예에. 그런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귀환해야 할지도, 잘.]
확실히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아침에 본 하늘도 여전히 모래 폭풍으로 뿌연 상태였으니 말이다.
[예브리카가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겠는걸요.]
확실히 주변 10m밖에는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다.
귀환을 목표로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괜히 조난당했을 때 제1수칙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가 아닌 것이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목표 지점과 더 멀어질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아니, 그 가능성이 훨씬 큰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인다?
어제야 전투가 벌어진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성이라도 있었지, 지금 상황에서 그런 판단은 어리석다라는 말이 나오기에 딱 좋은 짓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경우는 좀 나았다.
[비행이 가능한 몬스터 하나만 잡으면 모래 폭풍 위로 새를 날려 보내 방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런 방법이.]
내 말을 들은 라미레스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끙끙거리는 얼굴이 됐다. 무언가 커다란 고민이라도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죠?]
[혹시 위로 새를 보내게 되면 이 모래 폭풍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려 줄 수 있나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굳이 모래 폭풍의 중심, 그러니까 예브리카의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 저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시선에 라미레스가 어딘가 단단히 찔린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그냥 그 대단한 최상급 몬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냥 호기심이 생겨서 모래 폭풍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말해 달라고 하는 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고말고.
하지만 왠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아직은 비행 몬스터를 처리하지도 않았으니…….
“보스! 재호 형이 이거 잡아 왔어요! 언데드로 만들어서 띄워 볼까요?”
빌어먹을 타이밍. 김재호가 잡아 온 비둘기형 몬스터를 손에 든 한서현이 방긋 웃고 있었다.
[오! 비행 몬스터를 구했나 보군요! 이러면 이제 방향을 알 수 있겠네요!]
그래라, 한번 해 봐라.
한서현이 죽은 몬스터를 되살리는 동안,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예브리카를 찾으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어, 그냥 그쪽에 몬스터가 있구나 하고 경계할 생각입니다.]
나는 거짓말의 전문가다. 평생 뻥을 치고 살아와서 그런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주 뻔히 보인다.
[거짓말이로군요.]
정곡을 찌르면 좀 미안해할 줄 알았더니, 내 말에 라미레스는 되레 짓궂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 그쪽도 저에게 거짓말을 했죠.]
우리 둘의 분위기를 보고 한서현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아니야.”
[그쪽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됐지.]
그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도움이 된다고?
[어째서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까?]
[끄응.]
내 말에 라미레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얼굴이다. 심지어는 눈을 가리고 있던 고글까지 위로 올려 썼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반겼다. 라틴계 이름을 가명으로 댄 주제에 생긴 건 완벽한 아일랜드계다. 발갛게 물든 낯에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확실히 미남이긴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미레스를 살폈다.
이상할 정도로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누구더라……. 막 그렇게 머릿속을 떠도는 정보를 조합하려는 찰나. 라미레스의 입이 열렸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예브리카를 토벌하기 위해서거든요.]
예브리카는 못해도 상급에 속하는 몬스터다. 그런 걸 ‘단신’으로 처리할 만한 사람은 전 세계를 기준으로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제야 내 머릿속에서 퍼즐이 착착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거짓말해서 죄송했습니다. 제 이름은 테이카 쿠퍼, 미국에서 온 7성급 헌터입니다.]
테이카 쿠퍼. 미국 최고의 헌터로 꼽히게 되는 SS급 잠재력의 중력 재능을 가진 각성자.
네가 여기에 왜?
나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제7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