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96
33 세레나의 빙궁 (3)
레이의 말대로 이 게이트가 멸망한 차원의 복제품이라면, 그동안 게이트에서 왜 같은 몬스터가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됐다.
그러니 이 ‘세레나의 빙궁’에서도 다른 게이트에서 나왔던 몬스터가 나올지도 모르지. 여기가 어떤 차원인지만 알아내면, 다른 게이트의 공략을 참고할 수도 있겠는데.
━환경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차원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는 얘기죠.’
몬스터를 보면 조금 더 확실하게 판별이 가능할 텐데, 아쉽게도 나는 가장 후열에 배치된 짐꾼이었다.
공략대는 지원 팀(탐색조)-공략 팀-지원 팀(대기조)-짐꾼의 순서로 움직였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움직이는 만큼, 앞에서 무슨 전투가 일어나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 짐꾼이라면 참 감사히 여길 배려지만,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이 정해진 배열을 깰 수도 없다. 우리가 스폰된 지역은 설산의 중간 지점이었다. 산맥을 타고 쌩쌩 부는 바람도 문제였지만, 발 한 번 잘못 내디디면 굴러떨어질 만큼 좁은 길목이 많았다.
그런 골목에서는 한 명씩 조심히 건너가야 했기에 이동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짐꾼들 또한 3성급 이상의 각성자라지만, 짐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등에 짊어진 짐을 가지고 무사히 움직이는 것. 그게 바로 짐꾼의 역할이었으니까.
앞에서 전투가 일어나든 말든, 짐꾼들은 그저 우직하게 움직였다.
손끝까지 곱아드는 추위 때문인지 두꺼운 옷을 입고 말도 삼가는 지금, 짐꾼들이 하는 거라고는 이동, 식사, 휴식밖에 없었다.
“휴식!”
대장의 말에 짐꾼들은 멈춰 섰다.
“식사!”
명령에 따라 나는 옆에 맨 가방에서 건조식량을 꺼냈다. 각자 버너를 꺼내 물을 녹이고 끓는 물을 건조식량에 뿌려 스튜 형식으로 먹는 것.
시리우스여서 그런지, 게이트 건조식량도 제법 괜찮았다. 내가 게이트 채굴 일을 할 때 먹었던 건 진짜 돌가루를 갈아 놓은 것 같았는데 말이다.
나는 파우치에 든 스튜를 홀짝이며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까 앞쪽에서 소리가 나더라니,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불이 녹고 그을린 흔적. 그리고 누군가의 타격에 맞고 떨어져 나간 절벽의 돌까지.
안타깝게도 몬스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중간 조에서 모두 챙겼거나, 아니면 형태가 남지 않는 몬스터였겠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장이 외쳤다.
“다시 전진!”
짐을 챙겼다. 나는 슬쩍 한서현을 바라봤다. 한서현이 버텨 내기엔 꽤나 고된 행군이었다. 가면을 써서 안색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내 눈빛에 한서현은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날 밤이 될 때까지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온 우리는 모두가 쉴 만한 터를 발견했다.
백 명이 넘는 인원이 충분히 머물 수 있을 정도로 뒤로 설산이 든든하게 버텨 주고 앞쪽으로는 뻥 뚫린 지형이었다. 옆에 강이라도 흐르면 배산임수의 완벽한 지형이었겠지만, 아쉽게도 강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엔 이보다 더 좋은 지형이 없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남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지형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건지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부터는 짐꾼들의 몫이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짐 중에서 장비를 꺼냈다.
사실상 짐꾼들이 들고 온 짐 중 제일 무거운 것이 이 숙소를 짓는 데 들어가는 재료들이다. 임시 숙소라지만, 온갖 방어 회로가 새겨져 있어 벙커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는 놈들이다.
나도 근래 아티팩트를 제작하며 제법 손재주에는 자신이 생겼으므로 주변을 훑어보며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다.
사실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짐에서 분리된 패널들을 꺼내니, 마법이 각인된 듯 서로 척척 붙었거든. 내가 만든 패널은 숙소의 벽이 될 테지. 그동안 기둥과 바닥을 맡은 다른 짐꾼이 뚝딱뚝딱 숙소의 틀을 다졌다. 나는 완성된 패널을 그곳에 넘겼다.
순식간에 제법 그럴싸한 임시 숙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지어진 숙소가 무려 40여 채.
게이트 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숙소 안에는 모든 것이 쾌적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누워서 쉴 수 있는 침대와 테이블, 거기에 샤워도 가능한 욕실까지 붙어 있을 정도였으니.
내가 기지를 짓기 전에 머물던 텐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견고해 보이는 건 덤이었다.
나는 힐끗 시선을 유선제가 있는 공략조 쪽으로 던졌다. 그쪽에 지어진 숙소는 그야말로 펜트하우스가 부럽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그냥 베이지색으로 통일된 짐꾼들 숙소에 비하면 저쪽은 아주 휘황찬란했다. 심지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까지 있을 정도니. 방도 몇 개나 되는 듯 크기도 다른 숙소에 비해 훨씬 컸다.
함께 게이트에 입장하긴 했지만, 짐꾼인 나와 공략조에 속한 유선제의 위치는 엄청나게 달랐다.
당장은 저 잘난 얼굴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확실히 저런 대우를 받을 정도로 유선제가 대단한 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 봤자 이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하지.’
그 주변에 있는 얼굴을 살피고 싶었지만, 마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보기엔 너무 멀었다.
결국 공략조를 살펴보는 걸 포기한 나는 한서현과 함께 짐꾼용 숙소로 들어왔다. 다행히 짐꾼용 숙소는 2인 1실이었다.
나는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으어, 죽겠어요.”
나를 보자마자 한서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여태까지 꾸역꾸역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정보는?”
“으음, 아직까지는 특별한 게 걸리지 않았어요. 확실히 눈 때문에 시야 확보가 잘 안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고 걸었으니까요.”
“정보를 얻기에 좋은 상황이 아니긴 했지.”
“그러니까요. 오늘 밤에 뭔가 이야기가 오가길 바라야죠.”
“그래.”
쥐돌이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다는 거다. 오는 동안에는 추위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으니 큰 소득이 없었지만, 오늘 밤은 다르겠지.
이 숙소는 사람의 마음을 녹여 놓았으니까.
“이번 공략이 실패한다고 시리우스가 크게 흔들릴 거라 그래서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확실히 이런 규모의 공략이 실패하면 타격이 크긴 하겠네요.”
게이트 공략이 처음인 한서현이 보기에도 시리우스의 공략대는 대단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오늘 짐꾼들에게 지급된 것들만 해도 뒷배가 든든하다는 느낌이긴 하지.
“이번 공략은 진연화 부길드장의 시험대나 다름없거든.”
“시험대요?”
그 말에 나는 한서현에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 어차피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시간도 꽤 남아 있으니까.
역사 교육 한번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 시리우스가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길드가 됐는지는 알지?”
내 말에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우스를 창시하고 이끈 진가(眞家)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실상 그 진가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도 긴밀하게 엮여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시리우스, 과거에는 북극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길드를 창시한 건 진용석이다. 지금의 진연화 부길드장에게는 친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진용석 헌터는 본인부터가 엄청나게 강한 헌터였어. 거기에 정치판까지 제멋대로 주물러 댔지. 혼란한 시기에 나타난 믿음직스러운 영웅상이니, 대한민국 모두가 그를 추앙했지.”
진용석 헌터는 그야말로 올바른 길드 마스터란 이런 것이다, 하고 세상이 내놓은 교과서 그 자체다.
솔직히 능력치를 따지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사기캐다.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한 헌터면서 동시에 정치 감각과 운영 능력까지 뛰어나다고?
게다가 그때의 대한민국은 혼란기였다. 게이트가 막 등장한 시기니까. 그 모든 혼란을 잠재운 게 바로 진용석이다.
모두의 추앙을 받던 그가 만든 길드가 바로 북극성.
“하지만 진용석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순 없었지. 그다음으로 길드를 맡은 게 바로 진용석의 아들 진강훈이었지.”
하지만 불행히도 진강훈은 진용석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헌터로서의 능력도, 정치가로서의 눈치도, 길드를 운용하는 판단력까지. 무엇 하나 진용석의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물론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진강훈도 어느 정도 기본은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 진용석이었고 자신의 ‘모자란’ 아들을 직접 훈육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선택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진강훈 헌터는 사고로…….”
“아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지.”
나는 설록진에게 들었다. 설록진은 툭하면 자신‘만’ 아는 옛날이야기를 내게 털어놓길 좋아했으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꽤 놀랐다. 진강훈이 죽은 나이는 불과 서른세 살.
“진강훈이 죽었을 때, 그의 딸 진연화는 불과 열한 살이었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용석은 후회했을까?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진연화는 할아버지인 진용석을 원망했을까? 뭐, 설록진도 여기까지 말해 주진 않았다.
다만 그다음으로 이어진 일을 말해 줬을 뿐이다.
“진용석은 진연화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해.”
“겨우 열한 살이었는데요?”
“진연화는 각성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진용석의 운용 능력과 정치 능력을 타고 태어났거든. 게다가 진용석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이었지.”
진용석이 택한 방법은 최대한 자신의 인재들을 진연화에게 붙여 주는 거였다. 당시 북극성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였고, 대한민국의 인재들은 모두 북극성에 속하길 바랐으니까.
진용석은 그들을 철저히 자신의 사람으로, 그리고 진연화의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
“적어도 진용석이 살아 있었을 때 북극성으로 들어온 사람들, 그러니까 진용석 키드라고 불리는 사람들까지는 진연화를 따랐지. 진용석에게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함받은 사람들이니까.”
진용석이 뿌린 씨는 잘 자랐다. 그에 의해서 목숨을 구하게 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의 돈으로 학업을 마치게 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진용석은 그들의 주인이 ‘진연화’라고 인식시키려 했지만, 진용석의 손이 닿은 이들은 진용석만을 따르려 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 어차피 북극성의 주인은 진용석이고, 진연화는 그의 손녀니까. 하지만 오 년 전 진용석이 쓰러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지.”
빌런들의 습격으로 진용석이 쓰러지며, 진연화는 불과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북극성이라는 거대 길드를 지탱해야만 했다.
길드 내에 가득한 ‘진용석의 아이들’은 그녀의 아군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적이었다. 이 길드를 완전히 ‘그녀’의 것으로 하려면 진용석 키드들을 견제해야 할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다.
“그 새로운 인재의 시작이 바로 유선제야. 그전에도 제법 포텐셜이 있는 헌터는 많았지만, 유선제만큼 대단한 헌터는 없었거든.”
그러니 유선제가 중요한 거다. 그래서 설록진이 유선제를 노린 거고.
내 말을 들은 한서현은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사람들이고, 할아버지가 물려준 길드인데 그렇게까지 척을 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북극성이던 이름을 시리우스로 바꾼 것으로 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할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야.”
사람들은 흔히 북극성이 제일 밝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밤하늘에서 제일 밝은 별은 시리우스, 즉 천랑성이다.
그녀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지은 북극성이라는 길드 이름을 바꾼 데에는 다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제9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