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9
“에이린.”
“응?”
“곧 다시 봬요.”
루실리온이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을 땐 입이라도 맞추는 줄 알았다.
단순히 귓가에 대고 속삭인 것뿐이긴 했지만…….
‘이것도 다 노림수겠지.’
나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로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디에 다녀오셨냐고 물었다.
‘너무 늦기는 했지.’
그래도 하루 만에 모든 일이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짝퉁 스핑크스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그가 내는 문제가 설마 다 아는 문제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가주님!”
“아, 으응. 로랑.”
“제 얘기 들으셨어요?”
“응……, 앞으론 늦을 때 꼭 말할게. 오늘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내가 더듬더듬 변명을 내뱉자 로랑의 얼굴이 대번에 울상이 되었다.
“가주님이시잖아요, 가문의 기둥이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응, 미안해.”
내 대답에 로랑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로랑도 주름이 많이 늘고 중년의 티가 확 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저는…… 에이린과 평생 함께해 줄 수 있어요.] [응?] [아주 긴 시간을 살아갈 너와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야.]문득 떠오른 대화에 기분이 다시 침울해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언젠가 이 사람들은 전부 나만 남기고 죽겠지.
‘드래곤이라니, 종족을 골라도 꼭 이런 걸 골랐네.’
나는 로랑의 뺨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주었다.
“미안해, 로랑.”
“네? 아니에요……. 그냥 걱정이 많이 됐어요. 물론 가주님이 무척 강하셔서 이제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요…….”
로랑이 부끄럽다는 듯 작게 읊조렸다. 나는 그녀를 보며 설핏 웃어 주었다.
“그래도 역시 가주님은 제게 아직 어린아이 같으신가 봐요.”
“응.”
“위대하신 드래곤님이라 저보다 더 많은 걸 보고 계실 텐데 괜한 걱정이죠.”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로랑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걱정이 좋다고 해야겠지.
“이제 한 개 남았어.”
그 뒤에는 가문에만 콕 박혀 있을 예정이었다. 아빠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엄마의 비밀을 밝히고 난다면…….
그때는 이제 남은 시간을 충실하게 보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청화무는 내일 아침에 봐야겠네.’
새로 심었으니 다시 자라게 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식사는 괜찮으세요?”
“음, 간단히 요기할 걸 가져다주면 좋겠어.”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응, 고마워.”
로랑은 제게 주어진 임무가 퍽 기꺼운 듯 잰걸음으로 재빨리 방을 나섰다.
“대화 다 했냐?”
창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싶더니 이윽고 그림자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며 사람의 형체가 눈앞에 툭 내려앉았다.
“……설표?”
“엥? 설표가 뭐냐, 설표가. 우리 사이에 정 없게.”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되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뭐, 내가 딱히 이름이 없기는 한데……. 화이트라고 불러. 고귀한 내 털색이 아주 새하야니까 말이야.”
“으음….”
굳이 우리 사이에 이름을 부를 일이 생길까?
내가 망설이는 듯 보이자 설표가 인상 좋게 씩 웃으며 내게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러지 말고 나 츄르 좀 더 주라. 다 먹었어.”
“……저기, 대체 식사량이 어느 정도 되는 거예요?”
“음, 덩치가 크니까 아무래도 많이 먹기는 해야겠지. 내 덩치 집채만 한 거 너도 봤잖아.”
보기는 했지만, 그걸 츄르로만 배를 채우려고 하니까 만들어 줘도 만들어 줘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아니던가.
“밥을 먹고 간식으로 츄르를 먹는 건 어떨까요? 애초에 츄르가 식사 대용은 아니라서.”
“뭐? 그거 먹고 났더니 다 맛없던데.”
그야 그렇겠지.
불량식품은 원래 맛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방 가득 츄르를 만들어 줘도 하루 이틀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니 이건 심각한 사항이었다.
‘안 되겠어, 츄르 개발부서랑 생산 공장을 만들자.’
공장을 만들면 최소한 내가 계속 생산할 필요도 없고 일자리도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바로 큰 손도 있으니 망할 부담도 없다.
“빈 창고에 가득 쌓아 둘 테니까 거기에서 꺼내 드세요. 제가 이 세계에서도 개발할 수 있도록 할 테니까 조금만 천천히 드셔주시고요.”
“오, 정말?”
“네, 제국 어디에서든 먹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거기에 수인국도 있으니까 망하진 않겠지.
‘오라버니들이랑 샤르네에게 편지를 써야겠네.’
세 사람이라면 충분히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르네는 연금술사이기도 하고 칼란은 연구자였으니까.
‘공장은, 아빠랑 논의해 보고.’
그나저나 아빠한테 염색 사업을 벌여달라고 한 건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나?
딱히 보고가 올라오진 않은 것 같다.
‘염색 사업도 저 개발팀에 맡기자.’
유통이나 실제로 상용화하는 건 아크레아와 넬리아 자르단에게 맡기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았다.
‘음.’
나는 관리 감독만 하면 되는 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도 같아서 신기하다.
머릿속으로 사업을 정리하고 나니 아빠랑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내일은 아빠에게 갔다가 황성에 가야겠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은 나무를 살리는 일뿐이었다. 새하얀 그란 푸르스의 열매.
‘이것만 얻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날 것 같았다.
“아, 덥다.”
슬슬 바람이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는 걸까?
“아가씨, 식사 가지고 왔어요.”
로랑이 가져다준 식사는 샌드위치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였다. 음식은 맛있었고 우유는 긴장한 몸을 살살 녹여준다.
따뜻하고 포근한 밤이었다.
* * *
“아빠!”
집무실 문을 두드리곤 벌컥 열고 들어가자 일을 하고 있던 아빠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린.”
“어쩐지 제 쪽으론 서류가 거의 없다고 했는데 아빠가 다 하고 있던 거예요?”
“네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건 따로 모아두고 있었다. 요즘 바빠 보여서 말이다.”
“네, 그거 거의 다 끝났어요.”
팔을 뻗어 아빠를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문지르자 아빠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그러게요. 시간이 너무 빨라요.”
아빠는 여전히 아름답고 잘 생겼지만, 그래도 얼굴에서 은근히 세월이 묻어났다.
아주 작은 주름이 생겼고 미간을 찌푸리면 예전보다 더 깊은 주름이 팼다.
‘만난 지 십몇 년은 됐으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지 않을 순 없는 것이다.
‘아빠도 언젠가…….’
언젠가 나를 떠나겠지.
나는 아빠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 간절히 바라고 간절히 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존재한다.
내가 드래곤이라고 한들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내가 어떻게 할 순 없는 것이다.
아빠가 그걸 바랄 것 같지도 않았다.
‘엄마도 있으니까.’
아빠는 어쩌면 엄마랑 다시 만나고 싶을 수도 있다.
평생을 산다는 건 그게 불가능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빠.”
“왜, 무슨 일 있었니? 표정이 좋지 않구나.”
“그냥, 사랑해요.”
그러니까 있을 때 제 감정을 많이 전해 두자. 언젠가를 위해서 끊임없이.
“에이린?”
“아, 그리고 저 사업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데요.”
아빠의 반문에 나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해사하게 웃으며 재잘재잘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하던 아빠도 내 이야기를 듣는 사이 제법 진지한 표정을 하게 됐다.
“…그런 신기한 음식이 있다는 거니?”
“네. 되게 신기하죠? 고양이들은 사족을 못 써요.”
“……확실히.”
아빠는 굉장히 낯선 표정을 하면서도 내 말에 순순히 수긍을 해 주었다.
“근데 무슨 설표를 데리고 왔다는 말이냐?”
“아, 수인국에 사는…….”
“별의별 게 다 꼬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아빠의 눈이 어쩐지 스산하게 빛났다.
“그나저나 이 편지는 다 뭐예요?”
“쓰레기. 바로 태울 예정이었다.”
한쪽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편지는 개봉조차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직 뜯지도 않…….”
툭, 화르륵!
내가 손을 뻗기가 무섭게 아빠가 그대로 가져간 편지를 전부 벽난로에 쑤셔 넣었다.
“……아빠?”
“쓰레기, 라고 했잖니.”
“네에…….”
아빠가 쓰레기라고 한다면 쓰레기이긴 하겠지만…….
“얘기나 더 해 보렴, 아가. 그래서 그 대신관이랑 가서 또 뭔 짓을 했다고?”
으득.
말소리 사이로 은근히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뉘앙스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내 착각인 걸까?
되물어보기엔 아빠의 표정이 너무나도 해사했다.
그러니까, 불길한 쪽으로 해사했다는 뜻이다.
해사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더 입을 털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냥 있었던 일만 열심히 보고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빠의 표정은 한층 더 해사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