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18
117화. 신기록 (1)
유리는 종이에 적힌 글귀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감탄했다.
“내가 대뜸 욕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대뜸 욕먹은 경우는 처음인데?”
그것도 이렇게 신선한 방식으로 욕을 먹으니 기분이 안 좋기보다는 오히려 흥미가 생길 정도였다.
유리는 작은 틈 앞에 쪼그려 앉아 그사이를 자세히 살폈다.
가늘고 좁은 틈새로 비치는 유리의 황금빛 눈동자.
한참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던 유리가 볼을 긁적였다.
“…안 보이네?”
마나로 안력을 높여 보아도 틈새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유리는 가늘고 긴 마류의 거미줄을 뽑아 틈 안으로 넣어 보았다.
미약한 공기의 흐름이 마류를 타고 전해졌다.
‘그냥 기다란 관인데?’
틈 너머에 사람이 있을 만한 공간은 없었다.
다만 위로 길게 뻗은 팔뚝 굵기의 관이 있을 뿐.
그마저도 무언가에 막힌 것인지 마류의 거미줄이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이에 유리는 마류를 거두고 욕 적힌 종이를 다시금 펼쳐 보았다.
‘하지만 이걸 보면 분명 사람이 있는 거란 말이지.’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사용한 기관은 문을 닫고 일정 시간 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건 다시 말해 기관을 수리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
유리는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 너무도 궁금했었다.
‘이 기관 만든 사람들, 보통 솜씨가 아냐.’
그건 지금까지 기관을 돌파해 온 유리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러 번을 반복해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시간에 발동되는 함정.
그 각도와 위력 역시 모두 동일했다.
거기다 더 놀라운 점은 그런 함정의 설계가 20개의 동굴 모두에 똑같이 적용되어 있다는 거였다.
함정을 재설치하거나 정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생길 법도 하건만, 지금껏 유리의 계산상 오차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함정을 돌면서 종종 생각했다.
‘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이번에 새로 만든 요새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제법 괜찮을 텐데 말이지.’
때문에 기회가 되면 정비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려 하였지만, 지난 12일 동안 사람은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었다.
상황이 그러니 이제는 진짜 사람이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의심스러워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접촉해 왔다, 이거지?’
유리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가 쪼그리고 앉아 마치 귓속말하듯 틈새로 양손을 모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계십니까아아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절벽에 울려 퍼졌다.
유리는 쪼그리고 앉아 틈을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5분여.
조금 전처럼 글자가 적힌 점수지가 나오나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유리가 다시 외쳤다.
“거기 있는 거 다 압니다아아아아!”
다시금 이어진 정적.
그럼에도 유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꾸 절 무시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아아아?”
아무리 말을 걸어도 역시나 묵묵부답.
이에 유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탁탁-.
“난 분명 경고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그는 작은 틈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왜 저러는 거지?”
“그, 글쎄?”
“아무리 잘 생겼어도… 저건 좀 그렇다.”
이번에 새로 온 세 명의 신입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의 눈에 비친 유리는 벽과 대화를 시도하는 미친놈 그 자체였다.
* * *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리라 경고했던 것과 달리, 유리는 딱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는 것 보다 지금 당장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유리가 길게 호흡을 토해 냈다.
적당히 몸의 근육을 이완하여 긴장을 풀어 낸 순간.
번뜩-.
유리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시계의 작동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고, 어느새 동굴에 도달해 있었다.
‘첫발을 내디디면.’
탁-!
유리가 가볍게 땅을 디뎠다.
‘기관이 진동을 감지해서 입구가 닫히고.’
쿵-.
유리의 뒤쪽 철문이 내려앉았다.
‘옆 통로의 출구는 열리고.’
드르륵-.
벽 너머에서 옆쪽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이에 유리의 눈이 빛났다.
‘동시에 모든 함정이 활성화된다.’
그러나 활성화만 되는 거였다.
함정이 발동되기 위해서는 함정이 설치된 구역별로 진동이 가해져야 했다.
다시 말해 함정은 침입자가 만들어 낸 진동을 감지해 개별, 혹은 연계되어 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유리가 시간을 단축하는 데 있어 가장 애를 먹은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단순히 함정의 파손 여부가 감점 요인의 전부가 아니었어.’
정확하게는 100개의 함정을 모두 발동시키고, 파손시키지 않아야 100점이었다.
함정이 발동하지 않아도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거였다.
거기다 함정이 파괴되지 않고 살짝 제자리에서 이탈하는 것만으로도 파손으로 간주하여 감점이 들어갔다.
‘아예 건드리지 말고 피하라는 거지, 이건.’
함정은 모두 발동시키되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지랄맞은 채점 기준.
이러니 10초의 벽이 쉽사리 깨질 리 있겠는가.
‘이제부터 0.001초의 불필요한 움직임도 있어서는 안 돼.’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유리는 마류까지 일으켰다.
그의 육체는 지난 시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학습해 온 동작을 거침없이 되풀이했다.
좌측에서 날아드는 칼날.
유리는 이를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해 냈다.
‘0.07초 뒤 2시 방향에서 연계 함정 발동.’
좌측의 칼날을 피해 내기 무섭게 우측에서 칼날이 날아들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두 칼날이 동시에 날아왔다고 생각했을 공격.
하지만 유리가 보기에는 명백하게 두 공격 사이에 시간 차가 존재했다.
따라서 그는 두 함정 사이의 틈을 찾아냈다.
스르륵-.
극한으로 운보를 펼친 유리의 신형이 0.07초의 틈, 그 미세한 공간을 파고들었다.
스삭-!
두 칼날이 유리의 목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생각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약간이라도 실수가 있었다면 다량의 출혈이 생겼을 상황.
그러나 당사자인 유리는 덤덤하게 다음 함정을 공략해 나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순간들.
그럴 때마다 마류가 찰나의 틈을 찾아냈고, 운보가 유리의 육신을 그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동작 한 동작.
그 찰나의 시간이 이어져 유리는 순식간에 반환점을 돌았고, 그 뒤로도 유령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며 전진해 나갔다.
그렇게 마침내 출구를 통과한 유리.
탓-!
그의 손이 시간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드륵- 철컥!
시계가 정지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후우…….”
작게 숨을 토해 낸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시곗바늘은 정확하게… 열 번째 칸에 걸쳐 있었다.
꾸득-.
“…뚫었다.”
마침내 뚫어 낸 마(魔)의 10초.
유리가 미소를 머금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그가 긴장된 눈으로 점수지가 나오는 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륵- 탁!
점수지가 튀어나왔다.
유리는 이를 들어 조심스럽게 펼쳤다.
【200.】
마침내 원하는 점수를 얻어 낸 유리의 얼굴에 희열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유리가 동굴을 응시했다.
‘아직… 아직 더 줄일 수 있다.’
마의 10초를 뚫어 내면서 느꼈다.
여전히 자신의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운보의 운용이 빨랐다면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계속 간다.’
스스로의 기록에 만족하기 전까지 유리의 도전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그때까지 기록 등록도 없을 것이다.
그리 다짐한 유리는 【200.】의 점수지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동굴의 시계를 작동시켰다.
* * *
탁-!
빠르게 움직인 손이 시계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시간을 확인한 넬리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6초.”
스륵- 탁!
곧이어 튀어나온 점수지를 받아 확인한 넬리는 미소를 머금고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순위판이 있는 간이 건물.
얼추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쯤 넬리는 잠시 멈칫했다.
간이 건물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본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먼저들 와 있었네.”
넬리의 목소리에 간이 건물에 먼저 도착해 있던 이반과 파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 왔냐?”
“왔어?”
“응.”
두 사람이 건넨 인사를 가볍게 받아 준 넬리는 연신 하품을 쩍쩍 하고 있는 사내에게 자신의 점수지를 내밀었다.
“점수 등록 좀 할게요.”
“흐아아암……. 오늘은 손님이 많네.”
얼굴에 귀찮음이 가득한 페터가 넬리의 점수지를 받아 펼쳤고.
슬쩍 곁눈질로 이를 확인한 파나가 어설픈 휘파람 소리를 흉내 냈다.
“휘유, 158점? 이 정도면 80위권에 들어가는 거 아냐?”
그리고 그런 파나의 예상대로 넬리의 이름이 80위의 말단에 걸렸다.
【89위 / 50기/ 넬리 블랑/ 158점】
간신히 80위권에 턱걸이한 넬리.
고작 89위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점수에 만족했다.
158점은 그녀가 이 퀘스트장에 온 이후로 받은 점수 중 가장 높은 점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넬리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순위판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저도 등록 부탁드립니다.”
이반이 자신의 점수지를 페터에게 내밀었다.
이를 받아 확인한 페터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군.”
“죄송합니다. 저 친구가 먼저 점수를 낼 줄은 몰라서.”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반은 딱히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우쭐해하는 듯한 표정이었지.
“쯧.”
이에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 페터가 두 개의 명패를 만들었다.
그렇게 순위판이 또 바뀌었다.
【88위 / 50기/ 이반 바스킨/ 160점】
【90위 / 50기/ 넬리 블랑/ 158점】
“……?!”
갑자기 앞자리가 바뀌게 된 넬리가 이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쭐한 이반의 얼굴이 너무 얄미워 넬리가 눈을 부라렸지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렇게 넬리와 이반이 묘한 기싸움을 하고 있을 때, 파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둘 다 순위권에 들었네? 그럼 너흰 언제 7성 동굴에 도전할 생각이야?”
그 물음에 넬리와 이반이 언제 기싸움을 벌였냐는 듯 동시에 파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반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7성급? 그거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거긴 하냐?”
이에 동조하듯 넬리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실력으로는 아직… 부족해.”
보통 그들처럼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순간이면 적당히 자신감이 붙어 ‘7성 동굴에 도전해 볼까?’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둘의 반응은 지금껏 7성 동굴에 도전해 목숨을 잃은 어리석은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으니.
이는 두 사람이 한 사람에게 했던 질문과 그 답변 덕분이었다.
[응? 7성급? 아아, 그거? 음, 뭐랄까…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랄까?]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에 7성 동굴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
넬리와 이반의 시선이 그의 이름을 찾아 순위판을 쭉 훑어 올라갔다.
그렇게 순위판의 가장 꼭대기.
그곳에 그의 이름의 떡하니 박혀 있었으니.
【1위 / 50기/ 유리 홀랜드/ 200점(9초)】
자신들로는 꿈에도 꾸지 못할 어마어마한 기록이 보란 듯이 박혀 있었다.
그렇기에 넬리와 이반이 7성급 도전을 포기한 거였다.
‘저런 기록을 세운 유리 홀랜드조차 아직 7성급에 도전하지 않고 있는데.’
‘겨우 순위권 말단에 이름을 올린 우리가 7성급에 도전한다고?’
넬리와 이반이 동시에 생각했다.
‘어림없는 소리지.’
‘어림없는 소리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귀중한 생명 둘을 살린 유리였다.
* * *
동굴을 빠져나온 유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또 9초.”
마의 10초를 깨고 이를 다시 9초까지 줄이는 데 성공한 게 바로 어제였다.
그리고 다시 하루 동안 기록 단축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이에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한계네.’
지금까지 2성급 동굴을 돌파하는 것을 훈련 삼아 운보의 숙련도를 올려 왔었다.
그렇게 운보의 숙련도가 오르면서 차츰 기록을 단축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2성급이 너무 익숙해져서 운보의 숙련도가 더 오르지 않아.’
그 말은 다시 말해 기록 단축 역시 힘들다는 뜻이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써먹긴 했지.’
사실 이 정도면 2성급 동굴의 단물을 빨아 먹다 못해 즙이란 즙은 전부 착즙하여 경험치로 바꿔 먹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 덕분에 운보의 숙련도가 크게 오르지 않았던가.
이제 더는 2성급 동굴에서 얻을 게 없다고 여긴 유리.
그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네.’
완벽하게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기록을 세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선 유리.
그의 시선이 절벽의 꼭대기, 7성급 동굴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