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42
141화. 납치된 공주님 (1)
길길이 날뛰는 세경을 보고 유리는 자책했다.
‘…멍청했네.’
멍청해도 이렇게나 멍청할 수가 있나.
아니면 몇 달에 한 번씩만 만나다 보니 감이 떨어진 것일까?
‘믿을 게 따로 있지 그 노친네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이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한숨을 내쉰 유리가 앞으로 걸어갔다.
아린과 뽀삐, 테레시아는 그런 유리와 반대로 사사삭- 뒷걸음질 쳤다.
“다녀와.”
“유리, 힘내! 넌 할 수 있다.”
“배고프다!”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열심히 응원‘만’ 하는 세 사람.
그들의 행태에 유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세경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그를 본 세경은 더욱 발광했다.
“오냐, 너 이 애새끼 잘 나타났다. 어쩐지 느낌이 쎄하더라니, 네놈이 그 자식의 제자렸다?”
“제자 아닌데.”
“아니긴 무슨! 하는 짓거리가 그 옘병할 새끼랑 판에 박힌 듯 똑같은데!”
“사과해.”
“…뭐?”
“그 노친네랑 나를 똑같다고 한 거. 그거 인격적 모독이야. 빨리 나한테 사과해.”
“…….”
길길이 날뛰던 세경이 처음으로 잠잠해졌다.
그는 ‘대체 이건 진짜 뭐 하는 종자지?’라는 얼굴로 넋을 놓아 버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유리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세경은 종이를 펄럭이며 잠시 꺼졌던 분노의 불꽃을 다시 피워 올렸다.
“소꿉친구? 친구우우우! 누구 마음대로? 그 빌어먹을 새끼가 그러더냐! 지랑 나랑 친구라고?”
세경은 정말로 화가 난 듯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의 손에서 펄럭이는, 자신이 쓴 강의 신청서를 본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응, 그 빌어 처먹을 영감이 그러던데?”
“옘병, 친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꽁술이라는 애칭도 있다던데?”
“공짜 술통!”
“……?”
“그 얼어 죽을 놈이 내 술 창고 털면서 하던 소리가 그거다! 꽁술이, 공짜 술 잘 먹고 간다고!”
“흠…….”
세경과 요한은 친구 사이가 맞았다.
단지 지독한 악우(惡友)였을 뿐.
그것도 일방적으로 세경이 괴롭힘을 당하는 관계였던 거다.
‘하… 노친네, 대체 얼마나 괴롭혔으면 사람이 옛날 일을 가지고 저렇게 발광을 하냐.’
그것도 수십 년 전의 일로 말이다.
‘하긴,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는 법이지.’
세경은 어쩌면 원래 미쳤던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요한의 괴롭힘을 참다 못해 정신 줄을 놓아 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진실에 가까우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 가만? 그러니까 이거… 둘 사이가 안 좋다 이거지?’
그것도 원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순식간에 말려 올라가는 유리의 입꼬리.
“이봐, 꽁술 영감.”
“뭐, 꽁술 영감? 이 후레 잡놈이……!”
“복수하지 않을래?”
꽁술 영감이란 소리에 또 발작하려던 세경은 난데없이 이어진 제안에 움찔 멈췄다.
“…뭐?”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유리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는 세경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면, 이번에는 되레 유리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노친네에게 피의 복수를 해 보고 싶지 않냐고.”
미안, 영감탱이.
나의 비전을 위해 죽어 줘야겠어.
* * *
“음… 의외로 잠잠하네?”
“그러게요, 만나면 당장에라도 미친 듯이 싸워 댈 줄 알았더니.”
“배고프다?”
족히 100m는 넘게 거리를 벌린 것도 모자라 나무 뒤로 몸까지 숨긴 채, 빼꼼히 유리와 세경을 관찰하던 세 사람.
그들은 의외로 잠잠하게 대화를 나누는 유리와 세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동시에 침묵했고.
다시 동시에 중얼거렸다.
“…불안해.”
“불안한데?”
“배고프다…….”
그들의 경험상 유리가 조용하다는 건 무언가 못된 짓을 계획하는 중이거나.
혹은, 이미 사고를 쳤을 때뿐이었다.
* * *
광기로 번들거리는 유리의 눈 때문일까.
아니면 ‘피의 복수’라는 단어 때문일까.
세경은 의외로 잠잠하게 유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복수?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긴, 그 말 그대로지.”
“너… 요한 놈의 제자 아니었냐? 제자가 스승을 해코지하겠다고?”
“제자 아니라고 했잖아.”
“정말인 게야?”
“응. 그 영감한테 이것저것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제자는 아냐.”
“이 자식이 나와 말장난하자는 게야? 그게 제자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꽁술 영감, 내가 영감한테 몇 가지 얻어 배우면 내가 그쪽 제자가 되는 거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거봐, 제자 아니잖아.”
“…….”
순간 할 말을 잃은 세경의 입이 다물어졌다.
유리의 말처럼 단순히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만으로는 제자라고 할 수 없었다.
어떤 가르침을 주고받느냐가 중요하지.
이에 세경이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운보와 뇌익까지 익혔을 텐데? 그 성질 더러운 요한 놈이 제자도 아닌 녀석에게 레드너 가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두 절기를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레드너 가문의 전부라고 해 봤자, 꼴랑 두 개잖아?”
“그 두 개가 레드너 가문의 전부다!”
“그런가?”
“그런 거다!”
“뭐, 그럼 그렇다고 하자고.”
“그래, 잘 생각…….”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세경이 움찔거렸다.
‘내가 왜… 레드너 가문을 대변해서 열변을 토해 내고 있는 거지?’
무언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이상하게 휘말려 드는 것 같은 건 자신의 착각일까.
세경이 세차게 고개를 털어 내며 정신을 일깨웠다.
“이 자식이 어디서 개수작을! 자꾸 헛소리 늘어놓지 마라!”
“헛소리라니, 내 진심을 그렇게 매도하다니. 조금 섭섭한걸?”
어깨를 으쓱인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니까, 요한 영감한테 당한 게 많아 보이던데?”
“많아 보인다고? 단순히 많은 정도일 거 같으냐? 부절검? 위대한 도전자? 세상은 속고 있는 거다, 그 망나니 같은 놈한테!”
“인정,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그 앙갚음을 할 기회를 주려는 건데… 어찌, 궁금하지 않아?”
“…….”
세경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린 유리가 슬쩍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요한 영감이 종종 날 찾아오거든.”
그 속삭임에 세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 요람에 말이냐?”
“응, 막 제집 드나들듯 하던데? 솔직히 그게 아니면 내가 어떻게 꽁술 영감에 대해 알고 있겠어? 다 그 노친네가 왔다 가면서 알려 준 이야기지.”
“흠…….”
세경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그놈이라면…….’
수십 년 전부터 금지에 가까운 골족의 영역을 제 안방 드나들듯 하던 요한이었다.
그런 녀석이라면 충분히 요람마저도 제집 드나들듯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경도 그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
“유리 홀랜드라는 가여운 고아 소년이 저 머나먼 북쪽 땅에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지…….”
유리의 촉촉한 목소리가 고막으로 흘러들었으니.
“그 녀석은 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를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매우 연약하고 불우한 소년이었어.”
촉촉했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며 가냘프게 바뀌었다.
그에 걸맞게 유리의 눈에 슬픔이 깃들었다.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소년의 앞에… 어느 날 요한이라는 심보 고약한 늙은이가 나타난 거야. 그 노인네는 소년에게 제안을 했어. 내가 너의 병을 고쳐 줄 테니, 나의 실험체가 되어라! …라고.”
유리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촉촉해졌다.
그리고 지금 하는 이야기가 유리 본인의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세경은 어느새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년은 어쩔 수가 없었어. 너무도 살고 싶었거든. 그래서 결국 그 악마 같은 노인네와 계약하고 만 거야. 실험체가 되어 줄 테니 살려 달라고. 그렇게… 끔찍한 실험이 시작됐지.”
체력 만들기를 방지한 고문과 같은 훈련.
심심하면 날아오는 구타.
인신공격.
그리고 망할 붕붕이.
개같은 붕붕이.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붕붕이!
등등.
유리는 지금껏 자신이 당한 일에 적당히… 아니, 조금 많이 살을 덧붙여 각색했다.
그 덕분에 유리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 요한은 희대의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편의 대서사시를 쏟아 낸 유리는 아련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실험 덕분에 소년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고문과도 같은 실험으로 성격이 이상해졌다는 거야. 그럴 수밖에… 그 모진 실험을 버텨 냈으니 정신이 멀쩡할 리가 있을까.”
“크흠, 그, 그럴 테지.”
세경은 자신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요한의 성격이 여전히 그대로라면 유리가 들려 준 이야기대로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러한 사실에 유리의 탁월한 연기력, 호소력 짙은 목소리, 감정을 자극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섞이니 절로 유리가 가엽다고 느껴졌다.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에 세경은 화들짝 놀라 애써 콧방귀를 꼈다.
“흐… 흥! 그,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맨날 당했으니, 한 번쯤 되갚아 줘야지 않겠어?”
“……?”
“내가 이곳에 있다면 그 노인네는 분명 또 올 거야. 그때를 노려 피의 복수를 하자고.”
“요한을 죽이자는 거냐?”
“에이, 뭘 그렇게까지. 그리고 그 영감이 우리가 죽이려고 해도 죽기나 하겠어? 죽일 각오를 해야 생채기라도 남겠지.”
“그러면 원하는 게 뭐인 게야?”
“내 목표는 이곳에 아무도 침입하지 못할 요새를 만드는 거야. 침입하면 그 누구도… 그 요한 레드너마저도 무사하지 못할 그런 요새!”
“쯧, 피의 복수네, 뭐니 하더니만, 결국은 그냥 미리 함정을 만들고 요한을 골탕이나 먹이자고?”
“뭐, 그런 셈이지.”
자신이 장황하고 거창하게 꾸민 말들의 핵심을 세경이 짚어 내고 비꼬았지만, 유리는 딱히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싫어?”
그 물음에 세경도 슬쩍 미소로 답했다.
“뭐… 싫지는 않군.”
그가 요한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수십 년 전이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복수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하나, 요한의 능력이 그간 자신이 들어 온 소문의 반만 된다고 해도 아무리 열심히 기관을 만든다 한들 그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리의 제안에 구미가 당기는 거였다.
‘나 혼자서는 힘들지 모르나, 레드너 가문의 마체술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저 녀석이 도와준다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눈알을 굴리는 세경을 보고 유리가 이때다 싶어 잽싸게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꽁술 영감이 알고 있는 기술 좀 나한테 알려 줘 봐.”
이에 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거군.”
“뭐, 겸사 겸사지. 꽁술 영감은 오래 묵은 원한을 앙갚음할 기회를 얻고, 난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고.”
“결국에는 네놈도 복수하는 거니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인데?”
“내 복수? 난 원한이 없는데?”
“하? 그 꼴을 당하고도 원한이 안 생긴단 말이냐?”
“내가 요한 영감한테 험한 꼴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국 살았잖아? 난 그거면 됐어.”
유리가 어깨를 으쓱이자 세경은 그의 속내를 떠보듯 물었다.
“그래서 나에게 배우고 싶은 게 기관 지식에 관한 거였더냐?”
그 말에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게 보이는 눈빛.
유리는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 은근슬쩍 도발하듯 말했다.
“음, 원래는 그냥 기관 지식에 관해서만 배우려고 했는데… 워커라는 성을 달기는 했지만, 꽁술 영감의 야금술 실력은 영 아니라고 하대?”
“내… 야금술 실력이 영 아니라고? 요한 새끼가 그러더냐!”
“응. 그래서 그거 말고 꽁술 영감이 잘하는 걸 배워 볼까 생각 중이야. 이를테면… 연금술 같은?”
유리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세경은 콧방귀를 꼈다.
“하? 내 밑천을 가르쳐 달라? 그것도 연금술에 관해서?”
“응.”
“시건방 떨고 있구나.”
“…….”
“그래, 나의 야금술 실력이 워커의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건 인정하마. 하나, 그렇다고 하여도……!”
세경이 서늘한 눈빛으로 유리를 노려보았다.
“망치조차 안 잡아 본 것들에게 그리 평가받을 실력은 아니다. 내 장담하건대 네놈 따위가 평생을 노력한다 한들 내가 알려 주는 야금술의 반절도 익히지 못할 거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래? 그럼… 나랑 내기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