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94
193화. 무룡대전 (2)
무룡대전 참가자를 위한 대기실 안.
검으로 땅을 짚은 채, 은빛 갑주를 걸친 군터의 모습은 흡사 소년 영웅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용맹해 보이는 그조차 긴장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군터의 입에서 제법 긴 한숨이 토해졌다.
후우우-.
길게 흘려지는 숨결에 딸려 작은 중얼거림도 튀어나왔으니.
“…짜증 나는군.”
군터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쯧,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마음이 이리 흔들려서야…….’
자신의 첫 상대는 무려 3년 차였다.
한데 그런 상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긴장감이 아닌 짜증이 들다니.
군터는 반성을 하면서도 어째서 이런 짜증이 생겼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지?’
일단은 짜증의 원인이 될 만한 것들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어제 한 대련 내내, 방패 뒤에 숨어 있던 뽀삐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연신 하품하는 걸 봐서?
아침에 아린이 그녀 몫의 간식을 다 먹고는 자신의 것까지 들고 튀어서?
아니면 유리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또 ‘권터 같은 새끼’라고 욕을 먹어서?
그것도 아니면 테레시아 선배에게 ‘왜 멀쩡했던 애가 점점 쫌팽이가 되어 가냐?’라는… 한심한 눈총을 받아서일까?
‘…짜증 났던 적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특정하기 힘들군.’
그렇게 군터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을 때.
“군터 아이언스, 입장해라.”
흑검병의 호명에 군터는 투구를 쓰고선 대기실의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털걱- 털걱-.
전신 갑주의 마찰 소리가 묘하게 울리는 가운데.
그다지 길지 않은 통로를 지나, 빛이 들어오는 입구를 통과한 군터.
그를 반겨 준 것은 삭막하리만치 고요한 경기장이었다.
고오오오-.
무룡대전의 첫 경기.
하여 대부분의 기수가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객 수는 많았다.
그럼에도 객석 어디에서도 그 흔한 환호성, 응원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매서운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볼 뿐.
그 고요함에 군터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축제 따위가 아니란 거냐.’
무룡대전은 단순히 남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즐기는 자리가 아니었다.
상위 연차는 자신들이 쌓아 온 것을 과시하며 하위 연차를 짓밟고.
하위 연차는 언제든 선배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위협하는 자리.
또한, 마음껏 그러라고 요람에서 깔아 놓은 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참가자나 관객들 모두 웃고 떠들며 무룡대전을 즐길 수 없는 거였다.
그렇게 군터가 경기장의 중앙에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을 무렵.
저벅저벅-.
군터가 그랬던 것처럼 경기장의 한쪽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180㎝의 신장.
짙은 구릿빛 피부와 곱슬기가 심한 짧은 백발.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소년.
군터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이스 블롬이라고 했던가.’
요람의 먹이 사슬 최하위인 50기에게 있어서는 매 경기, 매 상대가 버거운 이었지만, 저자는 특히 만만치 않았다.
근 15년 이래 최고의 황금 기수라 칭해지는 48기의 서열 4위.
또한, 권터 라이더의 친위대라 칭해지는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
절걱-.
하이스는 경기장 중앙으로 나와 군터를 위아래로 훑었다.
“넌… 유리 홀랜드와 같이 다니는 연놈 중 하나군.”
그런 하이스의 평가에 군터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억을 잃고 제 발로 마귀굴에 기어들어 갔다가, 부절검의 개인 지도에 혹하여 그대로 거기에 눌러앉은 게 벌써 수개월.
그동안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군터가 뼈저리게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다름 아닌 주변의 인식 변화였다.
유리와 친구들, 끼리끼리.
혹은 유리와 그 4인방 등등.
그런 식으로,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서는 군터를 ‘유리의 그 무리’에 포함하여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군터로서는 조금 억울할 따름이었다.
‘내가 그들과 같이 한 묶음이라니.’
자신처럼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그들과 동류 취급을 받다니.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소리이지 않은가.
안 그래도 이유 모를 짜증에 기분이 썩 좋지 못했던 군터는 더 안 좋아진 얼굴을 감추고자 안면 가리개(Visor)를 내렸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려 예를 갖췄다.
철컥-.
“아이언스가의 장자 군터, 선배님께 작은 가르침을 청합니다.”
짜증이 났음에도 여전히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
이에 하이스는 조소를 흘렸다.
“쓸데없고, 멍청한 짓이군.”
“…….”
“선배로서 하나 알려 주지. 왜 무룡대전에 심판이 없는 줄 아냐?”
“…모릅니다.”
“무룡대전의 규칙은 단 하나, ‘승자만이 다음 시합에 진출한다’뿐이다. 승리의 방식이 어찌 되었든 요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거지. 설사 시합 중 한쪽이 죽어 나간다고 해도.”
“…….”
“또한, 무룡대전의 시합은 기수가 경기장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굳이 심판을 배치할 필요가 없는 거지.”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리 말해 줘도 모르겠나? 넌 내가 경기장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기습했어야 한다는 거다. 그게 네가 날 이길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고… 넌 그 기회를 놓쳐 버린 거지. 그 쓸데없는 예의를 차리느라.”
살짝 조롱기가 담긴 하이스의 미소에 안면 가리개 너머 군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만…….”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서 정중함이 사라졌다.
“거슬리는군요.”
“…거슬려?”
“제가 그쪽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그 확신이 말입니다.”
“그쪽이라…….”
선배도 아니고.
하다못해 당신이란 호칭도 아니고.
그쪽이란 호칭에 하이스의 얼굴이 살벌하게 변했다.
“50기는 대체로 선배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편이군.”
하이스가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한 손에 하나씩 들린 그의 단검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본 군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연검.’
48기의 손꼽히는 실력자답게 하이스는 공인 2단이었다.
그것도 꽤 완성된 공인 2단이었다.
“내가 오늘 선배를 어떻게 대하는 게 올바른 태도인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마.”
그리 말하며 하이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동작이 갑자기 커졌고.
탓-!
갑자기 사라졌던 그가 한순간 군터의 정면에 나타나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50기들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헛?!’
‘빠, 빠르다!’
하이스는 움직임은 빠르고, 유연했으며 탄력이 넘쳤다.
마치 한 마리의 검은 표범처럼 말이다.
‘한순간이지만… 움직임을 놓쳤어!’
하이스의 속도는 48기 내에서 권터를 제외하고는 최고라 부를 정도.
하여 50기는 물론 49기까지, 지켜보던 관객 중 상당수가 하이스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군터는 달랐다.
“…….”
안면 가리개 속 그의 눈은 정확히 하이스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눈으로 좇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캉-!
군터의 검이 너무도 덤덤히 하이스의 단검을 받아쳤다.
“……?!”
설마 자신의 속도에 반응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하이스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 놀람에 동작이 끊겼다면 그는 48기 서열 4위가 되지 못했을 거다.
하이스는 빠르게 단검을 역수로 전환했고.
턱-.
카가강-.
그대로 군터의 검을 타고 미끄러져 반대쪽 손의 단검을 휘둘렀다.
스칵-.
연검을 머금은 단검이 군터의 상체를 훑고 지나가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격을 날리려던 하이스는 자신의 안면부를 노리고 날아오는 검격을 피해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유유히 서 있는 군터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군터의 상갑.
그곳에는 하이스의 검이 훑고 지나간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고작 흠집이라…….”
원래라면 연검이 갑옷을 가르고 군터의 피륙을 베어 냈어야 정상.
그런데 베이기는 했을지언정 갑옷은 온전히 뚫리지 않았다.
그건 두 가지 경우를 의미했다.
군터의 전신 갑주가 엄청난 명품이거나.
혹은 연검을 버텨 낼 무언가 특별한 힘이 깃들었거나.
군터의 경우는 당연히 후자였다.
그리고 그 특별한 힘이 무엇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강의 기운이라.”
하이스는 밝은 광택을 머금은 군터의 검을 흘낏거렸다.
그건 분명 강검이 펼쳐져 있다는 증거였다.
‘제법이군.’
1년 차 때 공인 1단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점은 군터가 갑주에도 강검을 활용했다는 거였다.
그것도 자신의 공격에 대응해 순간적으로 갑주에 강의 기운을 둘렀다.
이는 어지간한 숙련도로는 불가능한 일.
군터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파악한 하이스는 조금 얕보던 마음을 버렸다.
스륵-.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그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결국에는 흡사 네발 달린 짐승처럼 반쯤 엎드리게 된 하이스.
“크르르-.
번뜩이는 살기와 낮은 울음소리.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보이는 잔혹한 미소.
고오오-.
그에게서 무시 못 할 기세가 피어올랐고.
타닷-!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군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아아-.
지면을 훑듯 앞으로 쏘아진 그의 속도는 조금 전보다 2배가량 빨라져 있었다.
하이스는 정말 표범의 영혼이 빙의라도 된 듯 짐승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스캉-!
어느새 군터의 곁에 나타난 그는 두 자루의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블롬가(家) 비전 마체술.
숨통 끊기.
슈슈슈-.
하이스의 두 단검은 마치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처럼 군터를 노렸다.
찌르고, 베고, 난도질하는 단검술은 흡사 짐승이 사냥감을 물고 거칠게 머리를 흔드는 모양새.
이에 군터 역시 가문의 절기를 꺼내 드니.
아이언스가(家) 비전 마체술.
뇌천왕의 날개.
거대한 그리핀의 날개가 군터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표범의 송곳니가 날개 사이를 뚫고 들어왔고.
그때마다 군터의 전신 갑주에 실선이 죽죽 늘어 갔다.
“아아…….”
“끝났군.”
관객석에서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마 저렇게 공격을 계속해서 허용하다 보면, 지금에야 버티지만 언젠가는 그 한계치에 도달할 터.
이에 관중들은 이제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
군터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 * *
24강 1조의 경기가 한참 진행 중인 시각.
3년 차의 거주 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속 공터.
그곳은 3년 차에게 있어 절대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금지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장소가 바로 권터 라이더의 수련터였기 때문.
그리고 대다수의 기수가 무룡대전을 위해 원형 경기장에 모인 그 시각에도 권터는 개인 수련에 열중이었다.
훙-.
은빛 검이 허공을 노닐고, 단련된 육체가 빠르게 움직인다.
찌르고, 피하고, 베는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권터의 움직임은 그것이 평범한 훈련이 아님을 짐작게 했다.
그건 마치 가상의 누군가와 싸우는 듯, 상당히 격렬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권터의 두 눈은 어떤 이의 허상을 좇고 있었으니.
스걱-.
권터의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이의 허상.
그건 다름 아닌 수개월 전 권터를 때려눕혔던 유리였다.
권터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유리 홀랜드를 만들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던 것이다.
핏-.
가상의 유리가 내지른 검이 권터의 볼을 스쳤고.
놀랍게도 권터의 볼에 붉은 기운이 생겨났다.
정말로 검에 베인 듯 말이다.
한편 권터는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지만, 가상의 유리는 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탁-.
조금 멀찍이 떨어진 유리와 이에 대치하듯 검을 겨눈 권터.
‘유리 홀랜드…….’
권터는 건들건들 서 있는 유리는 노려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초승달이 되어 유리를 향해 날아갔다.
슉-!
다른 이들은 반응조차 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속도의 비검.
하지만 가상의 유리는 너무도 쉽게 이마저 피해 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츠츠츠-.
가상의 유리가 쥔 검에서 황금빛이 강하게 일렁였다.
이를 본 권터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온다.’
저것이었다.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준 황금빛.
마검과는 차원이 다른… 이미 여러 차례 지금처럼 나타나 악몽을 선사한 잔혹한 폭력.
그것이 또다시 덮쳐들고 있었다.
이를 마주한 권터는 검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뀨득-.
동시에 잔뜩 힘이 들어간 턱 근육.
강하게 이를 깨문 권터가 밀려오는 황금빛을 향해 살벌하게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유리이이 홀랜드으으으!”
그리고 그 순간.
츠르르르-!
권터의 검에 깃들었던 칠흑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꿀렁이니.
콰아아아앙-!
고막을 찢을 듯한 엄청난 폭음이 숲의 상공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