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47
246화. 진심과 의심 (2)
유리와 친구들의 안식처.
속칭 마왕성은 정문에 내걸린 경고 문구처럼 외부인의 방문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었다.
마왕성의 내부를 구경해 본 이들 중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거주자인 유리와 그 일당들, 그리고 요한과 세경뿐이었다.
한데 오늘.
그 무시무시한 마왕성에 방문한 생존자 명단에 율리아 싱이란 이름이 추가되었다.
“…여기가 그 소문이 자자한 마왕성이구나.”
무치의 안내를 받아 마왕성의 식당 겸 회의실 겸 수다 장소인 공간에 도착한 율리아.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좋은데?’
율리아는 감탄했다.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한 마왕성의 내부에 이렇게나 고풍스럽고 아늑한 공간이 있을 줄이야.
이건 마왕성이라기보다는 여느 명문가의 접객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곳을 설계한 이의 감각이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이걸… 요람 안에서 만들었다니.’
남들은 동굴 파고 생활하고, 심지어는 그마저도 없어서 아침 이슬 맞으며 노숙하는데 이런 곳에서 지내다니.
지난 2년간 자신은 무얼 했나 자괴감이 드는 율리아였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유리가 그녀의 앞에 나무 잔을 내려놓았다.
“마셔.”
“고마워.”
율리아는 유리가 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홀짝거리다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볼품없는 나무 잔에 담긴 것치고는 그 내용물이 몹시 훌륭했다.
이 요람 내에서 이렇게나 향이 깊은 차를 마실 수 있다니.
‘대체 요람에서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지?’
율리아는 그저 이 상황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테레시아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율리아가 은은한 눈길로 물었다.
“…테레시아, 혹시 평소에도 이런 걸 마시는 거야?”
“자주는 아니고, 가끔? 유리가 직접 배합한 차(茶) 종류인데, 자기도 얼마 없다고 잘 안 주거든.”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답변에 율리아는 탄식했다.
“…이러니 거주 구역이 아닌 여기에 살지.”
3년 차의 거주 구역 생활이 분명 1, 2년 차 때보다 훨씬 나은 건 사실이었다.
제법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천막도 있고, 하루 한 끼지만 매일 빵과 같은 간단한 식량도 제공된다.
그러니 평범한 3년 차 기수는 분명 만족하리라.
하지만 이렇게나 훌륭한 환경의 마왕성에서 지내 온 테레시아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이건 좀… 부럽네.’
찻잔에 가려진 테레시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꼭 승리의 미소처럼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그렇게 율리아가 테레시아를 조금 질투 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때였다.
“그래서 부탁한 거는?”
훅 치고 들어온 유리의 목소리에 율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 자신이 마왕성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고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유리가 자신에게 한 가지 정보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신색을 정돈한 율리아가 진지한 낯빛이 되어 입을 열었다.
“리사 베르포트에 관한 정보 말이지?”
“어, 뭐 좀 알아?”
“우리 현가의 정보망을 뭘로 보는 거야? 당연히 알지.”
율리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답을 줬다.
“리사 베르포트, 베르포트라는 거대 가문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야.”
“거대 가문? 명문가란 소리야?”
“음, 명문가라기보다는…….”
율리아가 살짝 말끝을 흐린 순간.
한쪽에서 탄성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으니.
“아! 대륙 4대 상가!”
놀람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린이었다.
그녀는 날 듯 말 듯 하던 기억이 마침내 떠올랐는지 속이 후련한 얼굴이었다.
반면 아린의 외침을 들은 테레시아와 군터가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4대 상가라고?”
“3대 상가를 잘못 말한 거 같은데?”
그들의 반응에 아린은 눈을 끔뻑였다.
“에? 4대 상가 아냐? 난 어릴 때 그렇게 배웠는데?”
“난 3대 상가라고 배웠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아린, 테레시아, 군터.
그들의 상황을 정리하는 건 율리아의 몫이었다.
“…일반적으로는 3대 상가로 알려져 있지.”
“오호? 그럼 일반적이지 않다면?”
유리의 눈에 가득 차오른 호기심을 보고 율리아가 서둘러 이야기를 이어 붙였다.
“일반적으로 세계 3대 상가라면 청금, 백금, 녹금의 가문을 말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색상의 금이 추가돼.”
“뭔데 그게?”
“흑금.”
율리아의 이야기에 테레시아와 아린, 뽀삐, 군터, 무치는 처음 듣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반명 유리는 더욱 흥미를 보였다.
“흑금이라… 어쩐지 구린내가 폴폴 나는 느낌인데?”
그 말에 율리아는 피식거렸다.
“정확해. 흑금, 다시 말해 베르포트 가문이 다루는 검은 금이란 양지에서 오가는 자금이 아냐. 드러나서는 안 될 비자금을 세탁해 주는 수수료, 대부업을 통한 고리대금, 거래되어서는 안 될 물건을 거래하고 취하는 이윤 등등. 속칭 지하 세계에서 오가는 자금을 독점하고 있는 곳이 바로 흑금의 베르포트야.”
“독점? 그걸 독점하고 있다고?!”
“그래, 독점.”
“와 씨, 미쳤네! 그게 다 얼마야?!”
“당연히 어마어마하지. 우리 현가는 다른 3대 상가를 합쳐도 베르포트에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예측하고 있어.”
거기까지 설명한 율리아가 아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아. 베르포트가 수십 개의 허위 상가를 점조직처럼 운영해 그 총책이 자신들인 걸 철저하게 숨기고 있거든. 어지간한 정보력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정보인데…….”
그런 사실을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는 시선.
이에 아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 그냥 어릴 때 그렇게 배워서. 헤헤.”
“이런 비밀스러운 정보를 교육할 정도의 가문이라…….”
명문가의 후손이라면 응당 어릴 적 세계 각지의 유명한 가문에 대한 교육을 받게 마련이다.
특히 요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는 필수적인 교육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이런 은밀한 정보마저 어린아이들에게 교육시키지는 않을 터.
어지간한 가문은 말이다.
“하… 하하하.”
마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율리아의 시선에 아린은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율리아는 다시 유리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리사 베르포트에 관한 정보는 왜 달라고 한 건데?”
율리아의 질문에 유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게…….”
그리 운을 뗀 그는 망설임 없이 리사와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아마 유리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율리아 싱.
요람에 들어온 이래, 수 싸움에 관해서는 유일하게 자신이 인정한 상대였다.
그런 그녀의 고견이라면 충분히 상대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유리가 지난날 있었던 리사와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좔좔 읊어 대며 설명을 끝마쳤고.
이를 들은 율리아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확실히 쉽지 않은 상대네.”
“그렇지? 어쩐지 뭔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더니만… 세계 4대 상가의 후계자일 줄이야.”
“베르포트 가문의 후계자면 확실히 암계(暗計)에 능할 거야. 방심하지 마.”
“혹시 도움 좀 줄 수 있겠어? 걔가 한 말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그쪽 의견도 들어 보고 싶은데?”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일단 내 생각에는 걔가 널 보자마자 얼굴을 가리고 물러선 거부터가 설계의 시작이었던 거 같아.”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 정도 예상 가는 게 있긴 해.”
“어떻게?”
“그게…….”
유리와 율리아는 신중하게 리사의 행동과 말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고, 이를 곁에서 듣는 다른 이들은 듣기만 해도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유리와 율리아가 예측하는 수를 그들은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사람.
“저기…….”
장내에서 오고 가는 신중한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무치.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에 유리와 율리아의 대화가 끊기고 좌중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무치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정말 별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이 인근에서 살게 해 달라는 뜻 아닐까요?”
그런 무치의 말에 유리와 율리아는 서로를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동시에 무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왜?”
“왜?”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둘의 되물음에 오히려 무치 쪽이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라뇨? 정말로 그냥 근처에 살고 싶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죠?”
이를 들은 유리와 율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개똥 퍼먹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럴 리가 있겠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요람에 들어와서도 하루하루가 경쟁의 연속이었다.
상대의 행동과 언사, 그 속에 담긴 의도를 분석해 수를 계획하는 게 일상이었던 유리와 율리아.
그들에게 무치의 의견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에이, 말도 안 되지. 이 요람이 어떤 곳인데. 그딴 뜨뜻미지근한 마음가짐이 여태 존재할 수 있겠어?”
“그래, 맞아.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쳐도… 그 리사라는 애는 유리를 언제 봤다고 그렇게 맹목적으로 호의를 보이는데?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지.”
그런 유리와 율리아의 단호함에 무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에 동의한다는 태도였다.
그런 분위기에 무치는 깨달았다.
‘아, 이 사람들은… 인간 불신이 극에 달했구나.’
무치는 요람이란 곳이 더욱 무서워졌다.
대체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사람의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에 무치는 약간의 사명 같은 게 생겼다.
이 인간 불신과 의심병에 걸린 이들에게 아직 사람에게는 진심이란 게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그래서 무치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냥, 유리 선배가 걔한테 가서 딱 자리를 지정해 주면 거기로 옮겨 갈 거 같은데요? 고맙다고 하면서요!”
물론 이에 되돌아오는 건 유리의 차디찬 코웃음이었다.
“하? 그렇게 고분고분 물러날 거라고?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 * *
“아아, 여기가 성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군요. 알겠사옵니다. 저희의 거처는 이곳에다 짓도록 하겠습니다. 유리 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공손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리사를 보고 유리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어, 어라?”
그의 눈이 혼란으로 가득해졌다.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치며, 그답지 않게 열렬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던 무치.
하도 녀석이 난리를 피워 대자 유리는 속는 셈 치고 무치가 말한 대로 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게 말이 되네?”
분명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는데.
그랬었는데… 정말로 무치가 말한 것처럼 리사가 넙죽 고개를 숙이고 알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고맙다는 말까지 하면서.
이에 유리를 살짝 얼이 빠졌고, 구경을 왔던 율리아는 말도 안 된다면서 턱을 늘어뜨렸다.
테레시아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는데 무치만 그것 보란 듯 가슴을 쭈욱 내밀었다.
한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유리는 물러나는 리사를 불러 세웠다.
“어이, 리사 베르포트.”
유리의 부름에 쪼르르 다가온 리사.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유리에게 불렸다는 사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꼼지락거렸다.
“부, 부르셨사옵니까?”
“…너, 왜 그냥 가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가란다고 왜 가냐? 어째서 시키는 대로 하냐고.”
리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리 님께서 명하신 일이온데?”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걸 왜 묻냐는 듯한 진실된 눈빛.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이 당연하다는 것에 확신을 품은 목소리.
이에 유리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리사가 보인 행동은 그 어떤 의도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었다는 걸.
그렇기에 유리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나 알아? 우리 친해?”
“유리 홀랜드 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친하다니요. 저는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은 적도, 앞으로 품을 생각도 없습니다.”
“아니, 그럼 왜 내가 시키는 대로 넙죽넙죽하는 건데? 친해질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물음에 리사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유리 님은 존재만으로도 제게 구원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렇게 유리를 똑바로 바라본 리사는 ‘앗 눈부셔!’ 하는 표정으로 다급히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문 유리.
“…….”
그는 조용히 결심했다.
앞으로 수십 년 뒤 자신이 자서전을 쓴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로 리사의 이름을 적기로 말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시험 삼아 툭 질문을 던졌다.
“야, 너희 집 돈 많다며.”
“그렇사옵니다.”
“그럼 나 돈 좀 빌려줘. 100만 골드 정도만.”
과연 이것에도 네가 아무렇지 않겠냐는 듯한 유리의 눈빛에 리사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봐…….”
‘그럼 그렇지, 이게 맞는 거지!’라는 듯한 유리의 표정.
하지만 이는 금세 뒤바뀌었다.
“빌리시겠다뇨.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럼요,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저의 것이 전부 당신의 것인데.”
“……?!”
어째서 리사 베르포트가 자신에게 이토록 맹목적인 신뢰와 호의를 보이는지 유리는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리도 알고 있는 게 있었다.
다년간 축적된 경험과 본능이 말해 주고 있는 것.
그건 바로…….
‘찾았다, 내 황금 고블린! 여기 있었구나…….’
지금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돈주머니!”
리사를 바라보는 유리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