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87
286화. 백룡고 (2)
“아오 씨, 허리야.”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네모난 금속 상자를 빠져나온 유리.
“하여간 탑승자에 대한 배려가 없어요.”
그는 자신이 타고 내려온 승강 장치를 흘끗거리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투덜거리기에는 그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램프를 앞세운 유리가 빠르게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터벅터벅-.
사람 2명이 양팔을 벌리면 닿을 듯한 폭.
한길로 쭉 이어진 통로를 묵묵히 따라 걷기 시작한 지 몇 분여.
갑자기 통로의 폭이 넓어지며 거대한 철문이 유리의 앞을 막아 섰다.
철문에는 정교한 그림이 양각되어 있었으니.
라이더 가문의 상징인 검은 태양.
그리고 이를 휘어 감고 있는 백색의 드래곤.
하지만 그보다 유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철문의 꼭대기에 적힌 글자였다.
백룡고.
유리는 그 명칭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람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사건 이후, 권터에게 백룡고 출입 권한을 양도받은 유리.
그리고 마침내 그 앞에 선 그의 감상은 매우 간단했다.
“깊게도 숨겨 놨네.”
일전에 방문한 흑룡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백룡고의 보안 역시 만만히 볼 수준이 아니었다.
백룡고에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니 유리를 방문한 흑검병들.
그들은 과거 흑룡고 때와 마찬가지로 유리를 꽁꽁 싸매 어딘가로 납치하듯 호송하였고.
그도 모자라 갑자기 네모난 금속 승강기에 태워 유리를 지하로 내려보냈다.
달랑 램프 하나만 들려 주고 말이다.
그러면서 흑검병들이 알려 준 주의 사항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백룡고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라는 것.
둘째, 승강기는 하강 작동을 한 이후,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자동으로 상승한다는 것.
특히, 탑승자가 있든 없든 승강기가 무조건 작동한다던 흑검병의 경고를 떠올린 유리는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는 데에만 15분이 걸렸는데 2시간이 뭐냐? 드럽게 쩨쩨하네.”
꼭꼭- 숨겨진 백룡고가 자리한 지하는 깊었고, 승강기의 하강 속도는 너무 느렸다.
그 탓에 허공에서 쓸데없이 15분을 허비하고 말았으니, 유리가 불만을 토해 내는 것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저 백룡고 안이 어떤 구조인지 모르니 원하는 풍도결을 찾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고작 남은 시간은 1시간 45분.
하여 1분 1초가 아까운 그였기에 굳게 닫힌 백룡고의 문을 아니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왜 안 열려 있어?”
그냥 내려가면 된다기에 왔더니만, 제일 중요한 백룡고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니.
심지어 사방을 둘러봐도 문을 여는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하여 유리는 검 자루로 손을 가져다 갔다.
“여는 법을 설명 안 해 줬으니까 앞으로 벌어지는 일은 내 잘못 아니다?”
여는 법을 몰라 과격하게 힘을 썼다 한들.
그로 인해 문이 부서졌다고 한들 그게 어찌 자신의 잘못이겠는가.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내려보낸 놈들 잘못이지.
그렇게 꼭 누구보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유리가 막 검 자루를 움켜쥔 순간.
드륵-.
철문에 양각된 백룡의 검은 눈동자가 도르륵 움직였다.
그러고는 정확히 유리를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어라……?”
…저게 왜 움직이지?
백룡과 눈이 마주친 유리는 순간 움찔하며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사이 백룡의 눈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철컹- 드르를.
두꺼운 철문이 좌우로 벌어지며 활짝 개방되었다.
“…….”
마침내 백룡고가 열렸다는 사실에도 그저 멍하니 서 있는 유리.
잠시 그리 서 있던 유리가 정신을 차리고 슬쩍 백룡고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계십니까?”
좌우를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다시 그대로 멍하니 굳어 있던 유리는…….
“…시간 없으니 얼른 가야지.”
잰걸음으로 쏜살같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라고 중얼거리며.
그러면서도 뒤는 단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쵹쵹쵹-.
총총걸음으로 달리듯 빠르게 걷는 유리.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백룡고 천장에 수없이 많은 발광석이 박혀 있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유리는 다시금 멈춰 서야만 했다.
그의 앞에 세 갈래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고] [약재창] [병기창]각각의 통로마다 내걸린 표지판을 확인한 유리의 뇌리로 율리아의 목소리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풍도결은 서고에 있는 거로 확인됐어. 아니, 정확히는 서고에서 불출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된 거지. 다만 그 정확한 위치는 특정해 내지 못했으니 네가 직접 찾아봐야만 해.]율리아가 알려 준 정보를 되뇐 유리는 망설이지 않고 [서고]라 적힌 표지판 밑을 통과했다.
‘약재창을 확인하지 못하는 건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은 이번 백룡고 방문의 목적인 풍도결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그걸 찾아서 손에 넣은 다음에야 약재창이든 병기창이든 구경해야 할 터.
그런 계획을 세우고 서고로 이어지는 통로를 완전히 통과한 순간.
유리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아…….”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10여 미터의 지하 공간.
그건 천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광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유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책장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미쳤네.”
마치 미로처럼 느껴지는 책장들은 단숨에 유리를 질리게 했다.
그리고 더욱 그를 암담하게 만든 사실은…….
“…저길 전부 뒤져야 한다고?”
빈틈없이 책이 끼워진 수백 개가 넘는 책장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풍도결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였다.
“하아…….”
크게 한숨을 쉰 유리는 서둘러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한탄할 시간에 움직이자.’
앞으로 남은 시간은 1시간 40분여.
부디 그 안에 풍도결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유리가 책장의 미로 속으로 들어섰다.
* * *
책장의 미로 속에 들어선 유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규칙’을 찾는 일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서적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했을 리는 없다.’
분명 관리하는 누군가가 있을 테고.
그렇다면 관리를 위해서라도 책을 분류해 놓은 규칙 또한 있을 것이다.
유리가 찾아야 하는 건 바로 그 규칙성이었다.
슥- 슥-.
잠시 그렇게 몇 개의 책장을 빠르게 살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략적인 규칙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역시 서적 종류로 나눠 놨네.’
수백 개의 책장은 딱 중앙선을 기준으로 일반 서적과 마체술 관련 서적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책들을 뽑아 살펴보니 또 다른 규칙도 발견되었다.
바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서적끼리 책장에 꽂혀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유리는 자신이 찾은 규칙을 좇아 빠르게 책장 사이를 걸어갔다.
중간중간 책장에 꽂힌 책들을 뽑아 보며 나아간 그가 마침내 멈춰 서고.
“…이쯤인가?”
그는 풍도결이 꽂혀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책장들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빠르게 늘어가는 숫자.
그러다 결국 숫자가 스물에 가까워지자 유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환장하겠네…….”
3m 높이에 달하는 책장 하나에 꽂힌 책의 수만 해도 족히 500권이 넘어갔다.
다시 말해 풍도결을 찾기 위해서는 비슷한 이름의 책 수천 권 이상을 일일이 뽑아 보아야 한다는 뜻.
“에이 씨.”
작게 투덜거린 유리는 곧장 책장으로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책을 꺼내 빠르게 표지를 살피고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걸 언제 다 확인하고 일일이 다시 꽂아 넣고 있어?’
흑검병이 알려 준 주의 사항에 자신보고 뒷정리까지 하란 소리는 없잖은가?
나머지는 관리하는 사람이 알아서 치우겠지.
그렇게 양심을 내다 버리고 추진력을 얻은 유리.
덕분에 책장은 빠르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더럽게 많이 남았네?’
벌써 10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음에도 겨우 책장 2개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제시간 안에 찾을 수 없을 거란 위기감이 들었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유리의 위기감에 부채질을 하는 상황도 벌어졌으니.
“…젠장, 분류 똑바로 안 해 놓냐?!”
바로 비슷비슷한 이름 사이에서 간혹 튀어나오는 엉뚱한 제목의 책들이었다.
이를 본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류가 완벽한 게 아냐, 이러면 풍도결도 다른 책장에 끼어 있지 말란 법은 없는데…….’
확인해야 할 책은 잔뜩 남았고.
서서히 시간이 줄어들며 심리적 압박을 가해 오고.
입을 굳게 다문 유리는 잔뜩 경직된 얼굴로 손만을 놀렸다.
하나, 둘, 비워지는 책장.
그렇게 약 1시간 하고도 5분 정도가 남았을 즈음.
“아…….”
7번째 책장의 절반쯤을 비워 냈을 때, 유리의 손이 우뚝 멈췄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환희에 찬 중얼거림이 흘러나왔으니.
“…찾았다.”
[풍도결]5㎝ 남짓한 두께.
갈색의 오래된 표지에 적힌 빛바랜 글씨.
그것은 바로 유리가 찾던 바로 그 풍도결이었다.
책 표지를 손으로 슥- 훑은 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침착해. 아직은 몰라.’
이름만 같고, 자신이 찾는 풍도결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책을 펼친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오?”
딱- 펼쳐진 속지에는 그의 다리에 채워진 풍각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리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됐네.”
어렵게 얻은, 백룡고에 들어올 기회를 이대로 날리나 싶었건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원하는 걸 손에 넣으니 맥이 탁 풀린 거였다.
유리는 웃으며 풍도결을 고이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슬쩍 몸을 돌렸다.
“자, 그럼…….”
대륙 최강, 최고의 가문인 라이더가(家)의 역사이자, 그들이 축적한 지식의 창고답게 방대한 양의 서적들이 쌓여 있던 서고.
그렇다면 그들이 축적한 영약과 무구는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일까?
‘이제 다른 곳 구경이나 하러 가 볼까?’
유리는 라이더의 저력을 확인하기 위해 약재창과 병기창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벅저벅-.
그렇게 자신이 어지러뜨린 책을 넘어 떠나가려던 유리.
하지만 그는 얼마 걷지 못하고 우뚝 서고 말았다.
“…어?”
그를 멈춰 세운 건 뇌리에 스친 한 가지 생각이었다.
‘가만? 내가 왜 꼭 이걸 들고 나가려고 했지?’
자신이 원했던 건 ‘풍도결이란 제목을 가진 책’이 아니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물이 자신이 원하는 거였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이거, 외워서 나가면 되는 거잖아?’
풍도결이 적힌 책이 아닌 풍도결만 가지고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유리가 턱을 쓸었다.
‘애초에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하나라고 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것까지 지들이 어쩔 건데?’
그리고 풍도결을 외울 수만 있다면, 다른 걸 들고 나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떠올린 기막힌 생각에 유리의 눈이 반짝였다.
‘문제는 남은 1시간 동안 이걸 내가 외울 수 있냐는 건데…….’
유리는 고민하기보다는 재빨리 그 자리에 주저앉아 풍도결을 펼쳤다.
곧 고요한 적막 속에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락 사락-.
한 장, 두 장, 연이어 책장이 넘어갈수록 유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잠시 뒤.
유리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니.
“이거… 안 되겠네?”
열심히 책의 내용을 머리에 욱여넣어 보았다.
하지만 1시간 만에 5㎝ 두께에 달하는 책의 내용을 통째로 외우는 건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것만 깨닫게 되었다.
‘어느 정도 될 거 같았는데…….’
글자 크기도 제법 큼직하고, 중간중간 그림도 있었기에 외우는 게 가능할 듯싶었지만.
‘안 되네?’
유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내 머리는 역시 이런 쪽으로는 안 어울려.’
이번 기회에 다시금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는 지능 특화가 아닌 잔머리 특화란 사실을.
그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풍도결의 겉표지를 덮었다.
‘미련 갖지 말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안 되는 일에 매달려 봤자 시간 낭비.
그 시간에 약재창과 무기창을 돌아보고, 혹여 다음에 들어온다면 가지고 나갈 물건을 정해 두는 게 훨씬 효율적인 일이었다.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외우지 못한다고? 그럼…….”
유리가 또다시 우뚝 멈췄다.
그는 곧바로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이 되었고, 동시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냥 익혀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되새기며 유리는 풍도결을 내려다보았다.
‘내 머리로는 짧은 시간에 이걸 통째로 외울 수 없어.’
아마 1시간 안에 이 정도 두께의 책을 단번에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율리아와 같은 천재들뿐일 거다.
하지만.
‘몸이라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외우는 거라면?’
율리아에게 두뇌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몸이 있었다.
그것도 현가의 두뇌와 비견될 만큼 특출난 재능을 품은 육신이.
그런 자신의 재능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 풍도결을 익혀 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유리는 그리 예상했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만약 이 시도가 실패하면 자신은 원래 목표했던 대로 풍도결을 들고 나가면 된다.
대신 라이더가의 약재창과 병기창을 둘러볼 기회를 잃게 되겠지.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풍도결 외에도 다른 하나를 더 들고 나갈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유리는 고민을 끝냈다.
실패의 부담보다 성공의 이득이 더 큰 상황.
그러니 지금부터 풍도결을 익혀 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안 할 이유가 없지.’
그리고 어째서인지 유리는 조금 전 풍도결을 외우려고 했을 때와는 달리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는 될 거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