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01
300화. 흑과 백 (2)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밤.
죄의 미궁 관리소를 떠난 선임 흑검병은 기관 돌파 퀘스트장의 적막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용하군.”
이 얼마나 한적하기 짝이 없는 여유란 말인가.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좋군, 좋아.’
또 다른 임무가 배정되기 전까지는 이 한적한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원했다.
‘어디 그럼… 쉬어 볼까?’
기관 돌파 퀘스트 관리직은 홀로 24시간을 근무하지만, 그 덕분에 인근에 간이 숙소까지 있었다.
다른 때면 홀로 24시간을 근무해야 한다는 건 단점이었겠지만, 퀘스트장을 사용할 기수가 없는 지금에 와서는 그보다 좋은 장점도 없었다.
24시간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흑검병이 기쁜 얼굴로 퀘스트장 인근에 자리한 숙소로 들어섰다.
그러자 훅 코로 파고드는 퀴퀴한 냄새.
이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작자는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게 대체 언제인 거냐?”
짧게 불만을 토해 낸 그는 환기를 시키고자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미안하게 됐군.”
난데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놀란 흑검병은 곧바로 검 자루에 손을 올리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창문을 통해 사선으로 들어오는 달빛 너머.
건물의 구석진 자리.
목소리는 분명 그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흑검병의 눈에 긴장이 흘렀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목소리가 들려왔건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 친구가 요새 너무 바빠서, 아마 청소할 시간이 없었을 걸세. 내가 대신 사과하지.”
흑검병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한 사내가 서서히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왔으니.
저벅저벅-.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단 세 걸음에 달빛 아래 선 그는 노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내였다.
말끔하게 전부 뒤로 넘긴 회색의 머리카락.
거치면서도 냉랭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오른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
괴한의 전신을 슥 훑은 흑검병은 근육을 팽팽히 당기며 물었다.
“누구지? 연배를 보아하니 기수는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우리 흑검병도 아닐 테고?”
“파울 그라고르라고 하네, 외부에서 요람으로 파견 나온 인력이지.”
“그런가?”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흑검병.
“그런데 그거 아나?”
그가 파울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보였다.
“다른 섬이라면 몰라도 이 북도에서만큼은 파견인들이 철석같이 지키는 불문율이 있다는 걸? 그게 바로…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는 거다.”
“…….”
“특히 네놈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맣게 차려입었다가는… 재수 없이 길 가다가 칼 맞을 수 있거든!”
창-!
작은 고함과 함께 뽑혀 나온 검이 곧장 파울을 향해 날아 들었다.
곧이어 달빛 아래 푸른빛이 번뜩이고.
서걱-.
어느새 흑검병과 파울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었다.
“흠… 그건 생각 못 했군. 다음부터는 유념하도록 하지. 아, 그런데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네. 정말로 난 외부에서 파견 나온 인력이거든.”
파울이란 작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흑검병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
심장이 있어야 하는 곳.
그곳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피는 흐르지 않았다.
‘강하군…….’
그는 감탄했다.
나름 실력에 자신 있던 자신을 이토록 손쉽게 처리할 정도라면 최소…….
‘공인 8단…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그것이 흑검병단의 어느 한 조장급 흑검병이 생애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털석-.
앞으로 쓰러진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파울은 이내 그를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기관 돌파 퀘스트장의 꼭대기.
바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관이 포진한 적색의 동굴이었다.
마치 본인 집처럼 그 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선 파울.
그를 반겨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미, 미친 게냐?!”
곧 작은 그림자의 주인이 빠르게 달려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러고는 파울의 옆으로 다가와 기겁하는 목소리를 냈다.
“흑검병을 죽이다니, 젠장할?!”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은 흑검병을 보고 놀란 작은 인영.
그는 다름 아닌 세경 워커였다.
“요, 요람에서 흑검병을 죽이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긴 하는 거냐?!”
다그치는 듯한 그의 물음에 파울은 흑검병을 털썩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왜지? 흑검병을 죽이면 안 되는 건가?”
“다른 곳이면 몰라도 요람에서 이런 짓을 벌…….”
파울이 세경의 말을 중간에 잘라 냈다.
“우리에게 협력하겠다고 수락해 놓고서 이리될 줄 몰랐단 말은 하지 마시게.”
그 냉담한 어투에 세경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게야? 그동안은 그놈의 보안이니 뭐니 지껄이며 안 알려 줬지만, 이제 속 시원히 털어놓을 때도 된 거 아니냐?”
“흠, 그건 그쪽이 딱히 신경 쓸 게 아닐세.”
“옘병, 이 지경까지 와서도 끝까지 주둥이를 안 여는군.”
“하하, 어차피 그쪽도 원하는 바만 얻으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 일이 잘 풀리면 원하는 바를 얻을 테고,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쪽도 아는 게 많아서 좋을 건 없을 걸세.”
“내가 아는 게 적을수록 네놈들만 좋은 게 아니고?”
“서로서로 좋은 거지. 그리고 이번 일에 그쪽의 공로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네. 절대 잊지 않을 테니 믿고 기다려 주시게.”
파울의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그 말처럼 이번 작전에서 세경이 해 준 일이 참으로 많았다.
외부에서 유일하게 요람으로 들여오는 품목이자, 사람을 숨겨도 본래의 무게 덕분에 들통날 일이 없는 광석.
그리고 그것들을 보관하는 창고의 관리자이자 은신처로 삼은 적색 동굴 기관까지 관리하는 존재.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1순위 포섭 인물이 바로 세경 워커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심이 담긴 눈빛에 세경은 한숨 섞인 질문을 던졌다.
“…확실한 거냐.”
“내 검과, 내 명예,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하지.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반드시 자네도 데리고 나갈 걸세.”
그 말에 세경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이 감옥을 나갈 수있다라…….’
골족의 다른 죄인들이 10년의 파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과 달리, 세경에게 내려진 건 영구적인 추방이었다.
짧지 않은 여생을 요람에서 보내야 하는 그에게 이번 일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
“…믿어 보지.”
작게 답한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세경이 사라진 뒤, 파울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오셨습니까?”
동굴 안쪽에서 수십 명이 파울을 반겨 주었다.
파울이 그중 한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몇 조까지 출발했지?”
“3조까지 갔고…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겁니다.”
“늦지는 않았겠군.”
만족스럽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파울이 닫힌 문 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닷새인가.”
* * *
“알고 있겠지만, 이쪽에서 끌어 줄 수 있는 시간은 최대 5일뿐이다.”
그건 20명의 인원을 앞에 둔 페터가 처음으로 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이틀 간격으로 두 명의 당직 교대자를 처리한다고 해도 흑검병단 측에서 늦어도 하루 안에 이상을 알아차리고 움직일 거다. 그러니…….”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5일 안에 미궁의 심층까지 내려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페터는 자신의 말을 끊은 이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의 소녀.
아니, 이제는 소녀의 티를 벗고 성숙한 티를 내는 여인.
자신감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스치듯 응시한 페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이 길었군. 가라, 앞서간 두 조가 길을 열고 있을 거다.”
“예!”
짧게 외친 붉은 머리 여인을 필두로 20명은 이내 허리에 두르고 있던 벨트를 벗어 놓고 미궁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놓고 간 허리띠를 페터와 함께 있던 젊은 흑검병이 주워 들었다.
“이건 봐도 봐도 신기하네요, 착용자의 기운을 지워 주는 허리띠라니.”
암녹색의 보석이 박힌 가죽 허리띠.
층운대(層雲帶)라 이름 붙은 이 기물이 바로 수많은 동지가 요람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게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이었다.
“이런 건 대체 누가 만든 거지?”
“떠들 시간에 움직여라.”
“…네, 알겠습니다.”
이미 한 번 페터에게 제대로 찍힌 젊은 흑검병은 찍소리도 못 하고 빠르게 층운대를 수거해 자루에 쑤셔 넣고 사라졌다.
층운대가 필요한, 아직 은신처에 숨어 있을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젊은 흑검병이 사라지고.
“…….”
말없이 미궁의 입구를 내려다보던 페터 레만은 몸을 돌렸다.
* * *
타탁-.
미궁의 진입로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20명의 인원.
가볍게 지면에 안착한 몸놀림은 그들의 경지가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게 스무 명이 전원 미궁 진입을 완료하고.
“이쪽이군.”
앞서간 이들이 남긴 흔적 발견한 한 사람이 손짓했다.
이내 그 앞으로 모인 인원.
금방이라도 돌입할 줄 알았던 그들은 어째서인지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걸치고 있던 옷을 벗는 게 아닌가.
사박사박-.
수십 명이 동시에 옷을 벗고 이를 뒤집자 놀랍게도 그 안에서 백색이 드러났다.
이를 그대로 주워 입고 정비를 마친 이들은 온통 백색 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의(白衣).
이는 그들의 정신이자 뿌리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렇게 환복이 끝난 순간, 무리를 이끄는 자가 검을 뽑아 들며 작게 읊조렸다.
“하얀 옷을 피로 물들여.”
이에 나머지 사람들이 후창하니.
“새로운 세상을 연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를 낸 이들이 통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같은 시각.
지하 1층.
촤악-!
50기의 한 기수는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는 자신의 것이었고.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이게 뭘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순간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답을 알지 못했다.
대신 그 답을 알고 있는 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누구…….”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베어 낸 백의를 입은 존재.
기수가 힘겹게 던진 질문에 백의를 입은 이가 덤덤하게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백검병단 14조 조장.”
백검병단(白劍兵端).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50기 기수에게 백검병단이 무엇이고, 저 조장이라는 이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게 되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에게 중요한 사실은 오직 하나뿐.
“왜… 날…….”
바로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였다.
이에 백검병단 14조 조장이 무심하게 답하였다.
“그저 네게 쌓인 업보를 청산해 주었을 뿐이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지?
자신이 쌓은 업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게 무엇이기에 이리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억울함이 치솟았지만, 50기 기수는 이를 토해 내지 못했다.
털썩-.
마침내 쓰러진 이를 서늘히 내려다보던 백검병단의 조장이 등을 돌렸다.
한편, 그가 떠나간 자리.
작은 개울이 되어 흐른 핏물이 서서히 검은 흔적으로 변해 갔으니.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 *
지하 4층.
어느 한 통로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옘병, 좋은 예감은 개뿔. 대체 언제 나오냐?”
4층에 내려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첫 번째 진명로를 찾은 이후 좋은 예감과 함께 수색에 나섰던 유리.
그 과정에서 4층에 기거하고 있는 죄수는 단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에 비례하듯 진명로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가 발견한 건 4층 전역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격한 싸움의 흔적뿐이었다.
이를 토대로 그는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
바로 4층에서 다른 죄수들을 사냥한 이는 단 한 사람이란 것과.
흔적이 남은 시기가 대략 5년에서 10년 정도 전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걸 안다고 어디다 써먹냐?’
그래 봤자 옛날 일이고.
자신에게 중요한 진명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하아아…….”
긴 한숨을 내쉬며 유리가 축 늘어진 어깨로 막 한 모퉁이를 돈 순간.
“응?”
저 멀찍이, 통로의 중앙에 나타난 황금빛 광채.
이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 있던 유리가 신이 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
“찾았다!”
이게 얼마 만의 진명로란 말인가.
추가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유리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다는 데 희희낙락거리며 진명로를 향해 폴짝폴짝 뛰어갔다.
다만 그는 곧 달리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그걸 우리한테 양보해 줄 수 없을까?”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으잉?”
유리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진명로 너머, 통로의 반대편 모퉁이.
그곳에서 갑자기 다수의 인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것들 뭐야?”
지하 4층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아니, 정확히는 죄수도 아닌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유리는 연신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유리와 반대편 무리가 진명로를 사이에 두고 어느 정도 거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어?”
저들의 앞에 선 붉은 머리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유리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랍쇼? 난봉꾼 애인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