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02
301화. 흑과 백 (3)
유리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 서 있는 구릿빛의 건강한 미인은 나름 그와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요람에 들어온 첫날, 유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여인.
그리고…….
“땡! 또 틀렸어. 저번에 알려 줬잖아, 전 애인이라니까?”
괴츠 뢰턴의 ‘전 애인’이자 얼마 전에 요람을 수료한 46기의 선배.
난데없는 그녀의 등장에 유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반대편의 무리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수료해서 나간 사람이 여긴 어떻게 들어왔대?”
“옛 생각이 나서 잠깐 놀러 왔달까?”
“옛 생각이라고 해 봤자 몇 달 되지도 않았을 텐데? 거기다 그 꼴은 뭐고?”
늘상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지낸 탓일까.
저들이 입은 흰옷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유리의 질문에 그녀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예쁘지 않아? 우중충한 검은 옷보다는 이쪽이 훨씬 괜찮잖아?”
“뭐…….”
살짝 말끝을 흐린 유리의 목소리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예쁘라고 그림도 그려 놓았네?”
유리는 새하얀 의복 곳곳에 묻어 꽃처럼 번진 붉은 방울을 놓치지 않았다.
그게 단순히 붉은 안료가 아님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저 피가 누구의 것인지도 대충이나마 추측이 갔다.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용기가 대단하네? 아니면 자살 희망자인가? 들어온 건 어떻게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빠져나갈 수는 있겠어?”
“그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네 걱정이나 하는 게 나을걸?”
“글쎄? 내가 딱히 걱정할 일이 있을까? 아, 그쪽 뒤에 있는 저 눈깔 부리부리한 놈들을 걱정해야 하나?”
유리의 시선이 여인의 뒤쪽에 포진한 이들을 훑었다.
‘강한 놈들이다.’
20명에 가까운 이들이 평균적으로는 4~5단급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중 두 사람이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으름장을 놓듯,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뿜어 대는 흉포한 기세.
유리는 그들을 눈여겨보았다.
‘한 명은 공인 7단급, 나머지 한 명은 어쩌면 그 이상…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거지?’
흑검병단을 제외하고 이만한 실력자들이 한 단체에 소속되는 경우가 흔한가?
그렇게 유리가 견적을 내듯 훑어보는 것을 알아차린 붉은 머리 여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 권터 라이더를 꺾은 너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겠지.”
“알면…….”
“그런데 다른 애들도 그럴까? 예를 들자면…….”
그녀가 조소를 지었다.
“네가 친하게 지내는 그런 애들?”
“…….”
“설마 이 위험천만한 곳에 딸랑 우리만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붉은 머리 여인이 보내는 눈웃음에 유리는 딱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눈빛이 살짝 굳는 건 그 역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내려온 건 저들뿐이고 위층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다는 소리군.’
피가 묻은 옷과 무기류.
그걸 보아 위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유리가 아무런 말이 없자 백검병단 중 한 사람이 붉은 머리 여인의 어깨를 짚었다.
“너무 시간을 끄는군. 움직여야 한다.”
“아, 죄송합니다.”
짧게 사과를 한 붉은 머리 여인은 유리를 향해 물었다.
“저거 우리가 가져가도 되는 거지?”
“가져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져갈 거냐?”
“아니,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야.”
붉은 머리 여인은 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진명로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옆으로 공인 7단이라 추정된 중년 사내가 호위하듯 따라붙었다.
유리는 의외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진명로에 다다른 여인이 이를 캐내어 품에 챙기고.
중년 사내는 유리를 주시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려 둔 상태.
스극 스극-.
마침내 여인이 진명로를 완전히 캐내어 품에 챙기는 것을 본 유리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었으면 이제 그만 갈 길 가시지.”
“재촉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이쪽도 할 일이 많거든.”
진명로를 챙겨 무리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던 여인이 잠시 멈춰서 유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거참, 궁금한 게 드럽게 많네.”
“이게 마지막 질문이야.”
“뭐냐.”
“너, 내가 준 초대장 왜 안 쓴 거야?”
“초대장?”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 유리.
그의 머릿속에 검은색 배경에 기괴한 도형이 그려진 카드가 떠올랐다.
“아아, 그거?”
언급된 초대장이 일전에 그녀가 주고 간 그 기괴한 카드임을 알아차린 유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원래 잘 알지 못하는 께름칙한 건 멀리하자는 주의라.”
유리가 여인의 반대편, 무리 지은 이들을 슥 훑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지금 보니 내 선택이 틀리지 않은 거 같네.”
여인이 수료 전 준 초대장.
그건 분명 저들 무리에 가입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그런가…….”
유리의 답변에 여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 너라면 훌륭한 동료가 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그녀가 아예 고개를 돌리며 옆의 동료에게 말했다.
“되도록 고통 없이 보내 주세요. 듣기로는 듀란 비코비치의 서류와 직인을 훔쳐 온 게 저 녀석이었다네요.”
이를 들은 그녀의 중년의 사내가 살짝 놀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 이번 일의 숨은 공로자였군? 그렇다면… 알았다, 말끔하게 보내 주지.”
그 답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은 백의 무리에게로 달려갔고.
이내 중년 사내를 제외한 그들 무리가 전부 통로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유리와 단둘이 남게 된 중년의 사내.
스르릉-.
검을 뽑아 들며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유리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어이, 이렇게 된 거 하나만 물어보자.”
“뭐지?”
“니들 정체가 뭐냐?”
그 질문에 중년인이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이거 참… 소설을 보면 꼭 이런 상황에서 정체를 물어보는 장면이 나오던데 그게 영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군.”
그가 유리를 향해 웃음기 담긴 시선을 보냈다.
“흠, 보자, 이럴 때는 이렇게 답해 줘야 하는 건가? 마지막 가는 길, 궁금증은 풀어 주겠다고?”
“이야, 이거 생각보다 유쾌한 아저씨였네?”
“한 번뿐인 인생, 심심하게 살아서야 쓰겠나.”
“뭐, 그건 인정. 그래서 정체가 뭔데?”
“우리는 백검병단이다. 내 인적 사항이 궁금한 거는 아닐 테니… 답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덤덤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에 유리는 피식 웃었다.
“백검병단이라… 혹시 흑검병단 따라 한 거?”
“하하, 나도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해 봐서 부인은 못 하겠군. 그래도 흑검병단보다는 멋지지 않나?”
“그게 그건데? 검둥이나 흰둥이나.”
“듣는 흰둥이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 하는군.”
가볍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유리의 눈은 상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역시 7단인가.’
순식간에 주위로 퍼져 나가는 영역의 잔재가 그가 완벽한 공인 7단임을 증명해 주었다.
유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전부 달려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8단급으로 추정되는 이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전부 떠나고, 공인 7단급과의 일대일 대치.
이는 유리가 진명로를 순순히 포기하면서까지 원한 최고의 상황이었다.
‘한 명만 남기고 갔다는 건 저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목적지가 지하 5층임을 그들이 떠나간 방향으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진명로 하나가 아깝기는 하지만…….’
백의 무리가 사라진 방향을 흘낏거린 유리의 눈에 아쉬움이 살짝 깃들었다 사라졌다.
‘…신경 쓰지 말자.’
지금은 진명로를 내주었다는 사실보다, 그걸 놓고 저들과 싸우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속전속결.’
턱-.
유리가 검 자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소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응?”
난데없는 대화 시도에 중년 사내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일말의 긴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눈앞의 상대에게 자신이 질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는 이의 여유였다.
그리고 이는 그가 유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유리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비틀렸다.
“혹시 그거 알아? 소설에서 마지막이니 뭐니, 자비를 베푼다고 지껄인 놈들은…….”
“……?”
유리의 다음 말을 기다린 중년인.
그러던 순간.
“하나같이 뒈진다는 거.”
파측-!
푸른 뇌전이 번뜩이고, 유리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앞의 상대를 시야에서 놓쳤음에도 중년인은 크게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영역을 개화하게 된다면 어차피 시야는 부수적인 요소일 뿐.
사각 따위가 없는 영역이라면 당장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금방 상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터.
그렇기에 중년인은 여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단 1초.
아니, 그조차 되지 않는 찰나에 여유는 씻은 듯 사라졌다.
‘……?!’
중년인은 경악했다.
‘여, 영역이?!’
갑자기 자신의 영역이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이 녀석… 영역을 개화했다!’
그건 찰나의 순간이나마 사고가 마비될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일이란 말인가.
나이 스물도 되지 않은 녀석이 영역을 개화하다니!
심지어 자신의 영역이 상쇄되고 있는 것을 보아 근래에 개화한 것도 아니었다.
‘위, 위험……!’
혼비백산한 그의 본능이 경종을 강하게 울려 댔다.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어서 이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 모든 게 찰나의 사고 속에서 벌어진 일.
유리의 살의는 본능적 경고가 울린 순간 이미 중년인에게 닿아 있었다.
서걱-.
미약한 절단음.
순식간에 중년인을 지나친 유리는 가볍게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그리고.
툭-.
중년인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내렸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눈조차 감지 못한 그.
하지만 유리는 자신의 살의가 만들어 낸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저런 놈들이 대체 몇이나 들어온 거지?’
조금 전 마주친 이들 개개인의 실력은 절대 얕잡아 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유리에게는 큰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다르다.
만약 저 정도의 실력을 지닌 무리가 무더기로 들어왔다면 지금 위층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늦지 않기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유리.
그가 향하는 곳은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다.
* * *
뒤에 남은 이가 유리를 처리했으리라 철석같이 믿은 백검병단의 3조.
그들은 유리의 예상대로 지하 5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리 길지 않은 계단을 지나 지하 5층에 진입한 이들.
그들 무리가 5층 초입을 지나 조금 깊숙이 발을 들인 순간.
“아…….”
일행을 이끌고 있던 이가 탄식을 내뱉으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들이 멈춰 선 곳에서 대략 10여 미터 너머.
폭풍이 할퀴고 간 듯한 너른 공터에 한 노인이 눈을 감고 정좌해 있었다.
“아…….”
“아아…….”
노인을 본 이들은 그저 감격에 찬 듯 탄식만 내뱉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번쩍-.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그 속에서 황금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으니.
“헛?!”
갑작스러운 상황에 백검병단 무리가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시간조차 잊고 살았었건만.”
갑자기 말소리가 들리며 그들의 정면,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노인의 형상이 스르륵- 나타났다.
몇 미터 상공에서 백검병단 무리를 내려다보는 노인.
그의 두 눈은 죄의 미궁에 갇힌 다른 죄수들처럼 새까맣지 않았다.
조금은 탁한 빛을 띠고 있어도 흰자위가 있는 보통의 눈동자였다.
다만 사람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무감정할 뿐.
백검병단 무리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나직이 물었다.
“어느덧 약속했던 날이 온 모양이로구나.”
혼잣말처럼 느껴지는 질문.
묵직하고 낮은 저음에 마치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압력을 받은 백검병단.
그들은 곧장 무릎을 꿇으며 감격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충! 단장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