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3
32화. 입도 (1)
뿔 나팔 소리의 진원지는 저 멀리 부둣가에 정박한 흑색의 범선이었다.
‘저건……?’
선체는 물론 돛까지 전부 흑색 일색인 범선은 멀리서 보아도 그 크기가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그 근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열렸다!”
“서둘러!”
순식간에 분주해진 부둣가.
유리가 멍하니 서서 이를 관찰하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냐?”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리는 퉁퉁 부은 얼굴이 아려 왔다.
고개를 돌리니 병째로 술을 들이켜는 요한이 있었다.
꼴꼴꼴-.
“크하! 좋구나.”
“…사람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 신나셨습니다?”
“내 앞에서 칼 들고 설쳐 놓고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라. 다른 놈이었으면 진즉 조상님과 대작하고 있었을 테니.”
“우으…….”
유리가 부들부들하는 모습을 안주 삼아 한 번 더 술을 들이켠 요한.
그가 입가에 흐르는 붉은 술 방울을 훔치며 말했다.
“따라와라.”
“어딜?”
“어디긴, 요람 안 갈 거냐?”
그리 말하며 요한의 시선이 흑색 범선에 닿았다.
이에 유리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설마 저게… 요람에 가는 배야? 예비 기수들이 타는?”
“그럼 저 인간들이 할 일 없어서 개미 떼처럼 저리 바글바글 모여들었을까?”
요한이 턱짓으로 흑색 범선에 승선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를 가리켰다.
이에 유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다행이다. 늦진 않았구나.’
조금만 늦었어도 배에 타지 못 할 뻔했다.
유리가 기적적으로 제때 눈을 뜬 자신을 칭찬하는 사이 요한은 범선이 있는 방향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요한을 놓칠세라 유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점차 흑색 범선이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대화 소리가 유리의 귓속으로 흘려들었다.
“도련님, 힘내세요!”
“아가씨, 건강하셔야 해요!”
“5년 뒤에 만나자꾸나!”
부두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사람들과.
“갔다 올게!”
“다녀오겠습니다!”
자신감 가득한 얼굴, 긴장된 얼굴 등, 저마다 다양한 표정으로 배 위로 오르는 사람들까지.
한참 동안 배 위에 오르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유리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손을 들었다.
“영감, 나 질문!”
“갑자기 뭔 질문?”
어이없다는 듯 타박하면서도 요한이 살짝 걸음 속도를 늦췄다.
그 옆에서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걸으며 유리가 매우 의아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영감, 저 배에 타는 사람들 전부가 이번 요람에 들어가는 50기인 거지?”
“그럴 거다.”
“그럼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내가 대충 주워들은 거로는 요람에서 무사히 5년을 버티고 나오는 사람이 한 해에 고작 스물 남짓이라고 했거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한 해에 많아야 스물쯤이니까.”
“그럼 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한테 추천받고 들어가는 거야?”
대충 보기에도 지금까지 배 위로 오른 사람은 못해도 200명이 넘어 보였다.
아직 오르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족히 그 몇 배가 되는 인원이 이번 요람의 신규 기수일 터.
하지만 과거부터 한 해에 고작 20~30명 내외의 졸업자가 나왔다는 요람의 특성상, 저 많은 이들이 용패 추천으로 신규 기수가 되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 많은 사람이 추천받고 신규 기수가 되었다면, 최소 10년 동안 배출한 기수들이 이번에 전부 용패 추천을 했다는 소리가 되는 거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유리의 질문에 요한이 피식거리며 답했다.
“쯧, 이리도 세상의 이치를 몰라서야.”
“응?”
“네가 보기엔 저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들인 거 같으냐?”
요한이 손가락을 뻗어 범선으로 오르는 사람들과 배웅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유리의 눈이 다시 한번 그들을 빠르게 훑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대의 배웅하는 이들.
대개 10대 혹은 20대로 보이는 예비 50기 기수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지만, 유리는 그들을 슥- 한 번 훑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의 입에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튀어나왔다.
“황금 고블린.”
“…그게 무어냐?”
역으로 날아온 질문에 유리가 눈을 끔뻑였다.
“엥? 황금 고블린을 몰라?”
“뭔데, 그게?”
“전설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에 값진 보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노란 고블린이 있었대. 그거 하나 잡으면 제대로 팔자 피는 거였다더라고. 근데 지금에 와서는 털어먹기 좋은 부자들을 그렇게 불러.”
“호오? 어째서?”
“길 가다가 어깨 부딪히고 드러눕거나, 마차로 뛰어들어서 대충 생채기만 생겨도 몇 달 동안 벌 돈을 한 방에 땡길 수 있거든. 운만 좋으면 제대로 호구 잡는 거지!”
“…….”
유리의 설명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요한.
게슴츠레해지는 그의 시선에 살짝 당황한 유리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웅얼거렸다.
“…라고 친했던 용병 아저씨가 알려 줬어.”
“…너도 했냐?”
“에헤이! 사람을 뭘로 보구! 친했던 용병 아저씨가 하는 얘기를 듣기만 했다니까!”
“그게 친했던 용병 아저씨 맞아? 친했던 자해 공갈 사기꾼이 아니고?”
“아니라니까!”
극구 부정하며 시선을 요리조리 회피하는 유리의 모습에 요한은 확신했다.
‘이 새끼… 했네, 했어.’
이 어린놈의 새끼는 꼴랑 열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뭔 짓거리를 하고 다녔단 말인가.
대체 어떤 풍파를 겪었어야지 이리 닳고 닳았을 수 있을까?
‘허허, 내 말실수를 했구나. 이 자식이 세상 이치를 모르기는 무슨!’
유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주 짙고 어두운 쪽으로 발랑 까져서 그렇지.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쉰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무언가 비유가 이상하기는 했다만, 네 말대로다. 저런 부류를 보고 소위 ‘있는 집 것들’이라고 하지.”
“그래서?”
“요람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졸업자의 용패 추천. 그리고 두 번째로는 기부 추천.”
“기부 추천?”
“공인 7단 이상 실력자의 추천장과 오천 골드 기부. 그게 기부 추천의 조건이다. 기부 추천은 시험도 안 보고 바로 통과야.”
“오, 오천 골드?!”
평생 1골드는커녕, 금 쪼가리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하물며 오천 골드라니!
어마어마한 액수에 유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친… 요람에 한 번 들어가겠다고 그 많은 돈을 쓴다는 거야?”
“있는 집 인간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뭔지 아냐?”
“뭔데?”
“내 핏줄이라면, 내 자식새끼라면 충분히 재능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오호?”
“실제로 그 자식새끼들은 좋은 선생의, 좋은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놈들이라…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지.”
“…….”
“하지만 그딴 주입식 교육의 성장은 진짜 재능 있는 이를 마주했을 때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다. 그걸 직접 겪어 보기 전까지는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 그들은 모를 거다.”
“직접 뛰어들어서 대가리 깨져 가며 깨달아야지 된다는 말이네.”
“그래, 프흐흐. 요람이 기부 추천의 기회를 열어 둔 이유는 혹여 나타날지 모를 진짜 보석을 찾아내기 위함이자, 그냥 소소한 용돈벌이 정도인 거다.”
“…용돈벌이치고는 아주 황금을 쓸어 담는구만.”
유리의 의문이 해결됐을 즈음.
두 사람은 흑색 범선의 함미에 다다라 있었다.
거기서 발걸음을 멈춰 요한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 난 여기까지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이리 헤어지지만 다음에…….”
“응, 알았어. 다음에 봐.”
요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유리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름 분위기를 잡고 있던 요한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유리의 어깨를 잡아챘다.
“야, 이놈의 새끼야. 그래도 반년 넘게 함께한 정이 있건만, 벼룩 오줌만큼이라도 아쉬운 척하며 헤어져야 할 거 아니냐!”
요한의 호통에 돌아온 것은 시큰둥하고 아니꼬운 유리의 목소리였다.
“뭐래? 하늘도 날아다니는 인간이 고작 섬 하나 숨어들지 못할까.”
“…….”
“애초에 영감도 안 들키게 들락날락할 자신이 있으니까 날 요람에 들여보내는 거 아냐?”
“…….”
“영감탱이 성격이면 분명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 나 괴롭힐 게 뻔한데, 뭘 아쉬워해?”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기에 요한이 되레 할 말이 없어졌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걸어가서 유리.
순간 그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오른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내려쳤다.
“아, 맞다! 영감, 혹시 2기 선배님으로서 요람 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나 같은 건 없어?”
“…그런 거 없다.”
시들시들한 요한의 목소리에 유리가 히죽거렸다.
“뭐야, 삐쳤어? 지금이라도 좀 아쉬워하는 척해 줄까?”
“이 빌어먹을 놈이 날 뭘로 보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내보려다가 실패해서 삐진 쫌생이 늙은이.”
“쪼, 쫌생이?”
“쫌생이 아니면 알고 있는 정보 같은 거 있으면 좀 불어 봐.”
부들부들.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여기서 주먹을 썼다가는 왠지 정말로 좀생이가 되는 것 같아 인내하는 요한이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후우… 알려 주고 싶어도 알려 줄 게 없다. 너, 살면서 여태껏 요람 내부 사정에 관해 들어 본 적 있냐?”
요한의 질문에 유리가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요람 내부 사정이라…….’
용의 요람이 엄청 대단한 곳이다!
…라는 건 많이 들어 보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없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유리의 답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괜히 그런 거 같으냐?”
“그럼?”
“요람의 졸업자는 졸업과 동시에 비밀 서약을 한다. 요람에서 있었던 5년간의 일을 알리지 않겠다고.”
“발설하면 어떻게 돼? 누가 말했는지 지들이 어떻게 안다고?”
“네놈이 나중에 해 봐라. 세계 최고라는 요람의 정보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을 거다. 거기다 겸사겸사 흑검병단의 척살대가 왜 악마라 불리는지도 알게 될 거고.”
“…….”
“그리고 이놈아, 내가 요람 2기다. 네놈이 50기고! 자그마치 48년이 지났는데 그사이에 뭐가 어찌 바뀌었을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도 그렇네.”
“그러니 요령 따위는 피울 생각 말고 내가 한 말이나 까먹지 마라.”
“영감이 뭐랬는데?”
“네놈 귀걸이!”
“아, 귀걸이 빼지 말라고? 알았어! 그거 대충 아흔아홉 번은 들은 거 같구만.”
“그럼 한 번 더 들어서 백 번 채우자. 네놈 귀걸이…….”
“예이, 그러니까 제 육신에 자리한 마나 핵의 응집력이 영혈 속 핵의 응집력을 넘어설 때까지는 절대 뺄 생각 말라는 거잖습니까? 그랬다가는 마나 로드 못 돌린다고?”
“혹여, 피치 못해 빼야 할 상황이 온다면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해 둬라. 내가 나중에 다시 끼워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나한테도 방법 알려 주면 안 돼? 무슨 귀걸이 하나 끼었다 빼는 데 영감까지 있어야 하는 건데?”
“이놈아, 그게 평범한 귀걸이였으면 구멍 뚫린 네 영혈을 어찌 땜빵 하겠냐? 귀걸이가 작동하게 하는 올바른 사용법이 있는 거고, 네놈은 알려 줘도 못 하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네네, 알겠습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를 보고, 살짝 인상을 쓴 요한.
‘이놈의 자식이 걱정을 해 줘도!’
뿌우우우-.
승선을 재촉하는 뿔 나팔 소리가 다시금 울리자 요한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뒤틀렸다.
“아, 그리고 말이다.”
“또 뭐? 지금 얼른 타라고 하는데?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영감.”
승선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고 살짝 초조해진 유리.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 움찔거리는 그의 귓속으로 요한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려들었다.
“너, 그 샤리란 게 정확히 뭔지 알고는 있냐?”
요한의 물음에 유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샤리? 보석 아냐?”
“보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뭔데?”
여전히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앞만 바라보며 걷는 유리.
둥글둥글한 그의 뒤통수를 향해 요한은 재차 음흉한 미소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