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0
39화. 다단계 (1)
유리의 추측대로 시작의 숲 곳곳으로 퍼져 나간 흑검병들은 예비 기수 전원에게 주머니를 나눠 줬다.
그중 소수의 인원은 유리처럼 물건을 받자마자 금세 그 의미를 깨달았으며, 다수의 몇몇은 물건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골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대다수의 예비 기수들은 별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옳았다.
그렇게 주머니가 배포된 지 하루가 흘러…….
숲의 외곽.
한 소년이 비척비척 눈 쌓인 숲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더는… 더는 못… 버텨.”
땀과 기름, 물로 엉겨 붙은 머리.
움푹 들어간 양 볼과 퀭하게 그늘진 눈 밑.
푸석푸석한 얼굴과 거칠게 갈라진 입술.
거기에 열흘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구멍이 송송 뚫린 의복까지.
정말이지 거지도 이런 거지꼴이 없었다.
유리가 처음 흑선에 올랐을 때보다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물론 소년의 행색이 처음부터 이러했던 건 아니었다.
소년 역시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는 여느 부잣집 자식답게 헌앙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숲을 헤매며 떠돈 결과 단 11일 만에 이런 끔찍한 몰골로 변한 것이다.
“배… 배고… 파…….”
동공이 반쯤 풀린 소년이 기우뚱거리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걸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처음 시험이 시작된 공터였다.
“종… 종을…….”
넋이 나간 소년의 몸은 ‘종을 친다’라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좀비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소년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각이 범람하고 있었으니.
배고프다.
잠들고 싶다.
따뜻한 곳에 눕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머릿속에 가득한 건 포기를 정당화하려는 방어기제였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내가 고작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시험을 치르려고 그 비싼 돈 들여 온 게 아니잖아?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어차피 이미 종을 친 사람이 있잖아?’
‘그래! 나 정도면 오래 버틴 거야.’
‘요람의 시험에서 이 정도면 나름 잘한 거겠지?’
소년은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길을 걸어 나갔다.
그렇게 숲의 끝자락,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종이 있는 곳에 잠시 멈춰 선 소년.
약간의 생기를 되찾은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진짜… 이대로 끝이야?’
그건 소년에게 남은 마지막 한 줄기의 이성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갈등은 너무도 짧았다.
이미 자기합리화의 끝에 도달한 소년은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숲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가자! 난 할 만큼 했어!”
소년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막 숲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에이, 그건 아니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소년의 발길을 억지로 붙잡았다.
“……?!”
흐리멍덩하던 소년의 눈에 경각심이 깃들며 빛을 되찾았다.
비록 의지박약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요람에 들어온 수재.
소년은 빠르게 검을 뽑아 들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겨눴다.
칼끝이 향한 곳을 본 소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넌?”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검은 머리를 치렁치렁 내려 반쯤 얼굴을 가린 소년.
굵은 나무 둥치 옆에 불량스럽게 쭈그리고 앉은 목소리의 주인공.
그는 다름 아닌 유리였다.
“너, 넌 뭐야?!”
흑선 내에서 유리는 제법 유명인이었지만, 지난 열흘간 되레 말끔해진 모습에 소년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편, 유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계 어린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여유로운 얼굴로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쯧쯧, 그래서는 안 되지, 이 친구야.”
“……?”
“딱 보니까 너, 기부 추천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기부 추천에 들어가는 돈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 많은 돈을 내고 왔는데 고작 이 정도에 포기해서야 되겠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유리가 다시 끄집어내자 소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발악하듯 외쳤다.
“내가 포기를 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소년이 분노와 짜증을 쏟아냈으나 유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상관? 당연히 있지. 내가 좀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아아주우우 자애로운 성격의 소유자거든.”
“……?”
“그게 무슨 말이냐! 바로 이 몸께서 널 도와주겠다! …이 소리지!”
“날… 도와? 네가?”
소년의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데없이 나타난 녀석의 분위기는 매우 껄렁껄렁했다.
자신이 비록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는 못 하지만, 저 녀석은 그냥 척 봐도 자원봉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 녀석이 자신이 도와준다고 하니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의심 가득한 소년의 시선에 유리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 역시 있는 집안 자식이라 그런지 조기교육은 확실하게 받았구나? 그래, 그거지! 수상한 사람이 맛있는 거 줄 테니 따라오라고 하면 의심부터 해야 하는 거지, 아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걱정 마.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지금 매우 수상해 보이는데?”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누기에 앞서, 어디 보자…….”
저 자식, 지금 내 말 씹은 거지?
그런 거지?
소년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그사이 다 늙은 아저씨 같은 목소리를 낸 유리가 나무둥치 뒤로 손을 쓱-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리는 게 아닌가.
“우, 움직이지 마!”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소년은 더욱 경계하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하지만 곧 나무둥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물건은 그런 소년의 경계가 무색하게 만들었다.
“어? 그건?!”
유리가 나무둥치 뒤쪽에서 집어 든 것.
그건 잘 구워진, 검지 크기의 토사바였다.
“아뜨뜨.”
유리는 열기가 식지 않은 토사바의 껍질을 조심조심 벗겨 냈다.
슥슥-.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드러난 샛노란 속살.
“아…….”
열흘간 먹은 거라고는 차디찬 눈, 그리고 억지로 씹어 삼킨 침엽수의 나뭇잎뿐이었던 소년에게 따뜻한 토사바는 악마의 유혹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껍질을 벗어 내고 있는 토사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입안 가득 침이 고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꿀꺽-.”
예전에 한 번 먹어 보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게 토사바였다.
하지만 지금은 토사바에서 뿜어지는 저 새하얀 김마저 맛있어 보였다.
꿀꺽꿀꺽-.
미친 듯이 목울대를 꿀렁이는 소년을 보며 유리는 히죽 웃었다.
그가 소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자자,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봐.”
수상한 사람이 먹을 걸 흔들며 이리 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받은 조기교육대로라면 절대 따라가서는 안 되는 상황.
하지만 소년의 몸은 유리의 손짓에 홀린 듯이 움직였다.
저벅저벅-.
한 발, 두 발, 세 발.
마침내 유리 앞에 도착한 소년은 토사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이, 이걸… 날 준다고?”
“그럼, 그럼!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눈앞에서 흔들리는 샛노란 속살의 토사바를 보고 소년은 더는 경계심을 품을 수 없었다.
‘그, 그래… 식으면… 식으면 안 되지!’
대신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건 잘 익은 토사바가 식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토사바를 받아 들었다.
꿀꺽-.
그러곤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재빨리 삼키고 천천히 입가로 토사바를 가져갔다.
스륵-.
그리고 마침내 베어 문 토사바.
따뜻하고 부드러운 토사바가 입안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소년의 미뢰를 타고 폭풍과 같은 맛이 뇌신경을 강타했다.
쿠궁!
소년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이… 이 맛은?!’
토사바는 원래 단맛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열흘 넘게 굶으며 사회의 자극적인 맛을 잊어버린 소년의 뇌는 토사바의 단맛을 극도로 크게 증폭시켰다.
동시에 소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상의 달콤함이다!’
실로 아름다운 맛(美味)이었다.
또르륵-.
어찌나 감동하였던지 소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아…….”
유리가 준 것은 고작 검지 크기의 작은 토사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버린 구운 토사바는 너무도 간단히 식도를 타고 사라졌다.
그제야 천상을 노니는 감각에서 깨어난 소년은 간절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더, 더 없어?”
“더 먹고 싶어?”
끄덕끄덕-.
소년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유리가 웃으며 이번에는 한쪽 바지 주머니에서 구운 토사바를 꺼냈다.
왜 그게 거기서 나왔는지는 따위는 소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 유리가 꺼낸 토사바의 크기가 이전 것보다 5배는 크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
“어, 어서!”
소년이 토사바를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토사바는 없었다.
유리가 소년의 손을 피해 요리조리 토사바를 빼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짓이야!”
“어허, 이 친구, 양심이 너무 없네?”
“…뭐?”
“아까 그건 시식용, 그리고 이건 판매용.”
“판매용?”
소년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이에 유리의 입이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을 해 봐! 이 추운 날! 내가 죽을 둥 살 둥, 목숨 바쳐 구해 온 토사바를!”
죽을 둥 살 둥, 아득바득 열심히 모으긴 했다.
“그것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요리해 온 토사바를!”
굽다가 살짝 졸아서 조금 태운 토사바였다.
“공짜로 먹겠다고? 사람이 양심이란 게 있다면 그래선 안 되지.”
무언가 이상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맛본 단맛에 눈이 돌아간 소년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 그럼?”
“내가 그래도 장사 개시하고 받은 첫 손님이고 하니, 재료비는 빼고 인건비 정도만 챙길게.”
“…나 돈 없는데?”
소년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흑선에 탑승함과 동시에 사회에서 가지고 온 소지품을 반납했었다.
중요한 몇몇 장신구를 제외한 의복과 돈을 요람에서 전부 거둬 간 것이다.
‘가만… 장신구?’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소년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이건 안 돼!”
그는 제 손의 반지를 감싸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배고프다고 해도 고작 토사바 따위와 가문의 인장을 바꿀 수는 없잖아!’
약간의 이성을 되찾은 소년이 잔뜩 경계하자 유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물론 그것도 탐이 나긴 하지만…….”
살짝 튀어나온 본심을 뒤로하고 유리는 본래 목적을 말했다.
“그거 말고, 너, 어제 흑검병한테 받은 거 있지?”
“흑검병한테?”
소년이 눈을 끔뻑이며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아, 분명…….’
배고픔과 피로감, 추위에 허덕일 때, 흑검병이 다녀가긴 했었다.
‘그때 받은 물건이…….’
철그럭-.
소년이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이를 본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역시!’
유리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딱 봐도 별 볼 일 없는 이 자식까지 주머니가 있다는 건… 예비 기수 전원에게 주머니가 돌아갔다는 소리다.’
살짝 미소를 흘린 유리가 구운 토사바를 흔들었다.
“그래, 그거. 이 토사바랑 그 주머니랑 바꾸자.”
“이걸 어디에 쓰게? 이상한 은화던데.”
소년의 질문에 유리는 대답을 회피하며 토사바를 흔들었다.
“그래서 바꿀래? 말래? 고민이 길어질수록 토사바는 식어 갑니다.”
“그, 그건 안 되지!”
소년의 눈이 다급해졌다.
가문의 인장도 아니고, 고작 이상한 은화라면 얼마든지 토사바와 바꿀 수 있었다.
소년은 재빨리 주머니를 건네며 토사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리도 이번에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잽싸게 두 물건을 바꾼 소년은 후후 불어 가며 토사바의 껍질을 벗겨 냈고, 조심히 한 움큼 베어 물었다.
덥석-.
“아아….”
입안 가득 퍼지는 토사바의 맛에 소년이 정신이 팔린 사이 유리는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철그럭-.
주머니 안에는 역시 구멍 뚫린 은화가 들어 있었다.
은화의 모양과 새겨진 그림도 똑같았고, 개수가 10개인 것도 같았다.
‘음……?’
다만, 모든 게 같은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