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4
24화
“파이어 필드.”
매지션의 초반 광역 마법이지만, 대미지가 약해 잘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무 몹의 어그로를 끌기엔 충분했다.
연달아 들어가는 대미지에 타격을 입은 몹은 노네임을 붙잡고 있던 가지를 회수해, 행복이 있는 곳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풀려난 노네임은 서둘러 달려와 리디안의 곁에 붙었고, 그사이 몹 무리에서 빠져나온 이노센트가 날아와 주먹을 내리꽂았다.
“와, 심장 쫄깃하네.”
노네임은 한순간 500 아래까지 떨어졌던 자신의 HP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리디안의 ‘자애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아마 벌써 누워 있었을 거다.
고작 두 마리뿐이었던 터라, 자토가 직접 움직일 필요까진 없었다. 이노센트는 강력한 공격기로 순식간에 몹을 처리한 뒤, 다시 자토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두 번째 타임도 무사히 끝이 났다.
멀리서 지켜보던 마제스티는 리디안의 상황 파악 센스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에 와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냥터를 자주 돌아다녔다더니,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고 행동한 것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주변을 살핀 것도. 칭찬할 일이었다.
그 예로, 노네임이나 행복은 후방에 서있는 마제스티를 믿고 주변을 전혀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나 레벨 올랐어. 고속버스 최곤데?”
노네임은 55가 된 자신의 레벨에 신기해했다. 그동안 크라이그를 따라다니며 알뜰하게 경험치를 쌓은 덕분이었다.
“어째 진수 오빠 전용 쩔이 된 느낌인데……. 언니랑 자토랑 리디는 어때? 괜찮아?”
“응. 괜찮다, 여기.”
“와, 언니 여기 완전 빨라요. 리디 님도 빠르죠?”
리디안은 순식간에 소량 상승한 EXP 게이지를 보며 바보처럼 네, 대답했다.
“여기 맵도 넓으니까, 자리 잡고 해도 느긋하게 괜찮겠다. 여차하면 길마 오빠가 도와주기도 할 테니, 전멸할 위험도 없을 거 같고. 아까 같은 상황도 리디가 중계해 준 덕분에 처리도 빨랐고.”
“그러게. 리디안 님 반응 빠르네요.”
“그동안 사냥 꽤 다니셨나 본데. 그쵸?”
행복과 자토의 칭찬에 리디안은 볼을 긁적였다.
“그냥 몇 번. 페페 님 따라다니면서 조금 배웠어요.”
겸연쩍은 웃음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조금 떨어져 있던 마제스티도 다가와 흥미를 보였다.
“오, 페페 님이랑 아는 사이예요?”
“네에. 저 초기에 많이 도와주신 분인데. 운 좋게 여기서도 뵙게 되어서… 최근에 따라다니면서 조금 배웠어요.”
“아~ 어쩐지. 되게 침착한 게 페페 분위기 난다 했더니, 제자였구나?”
“네?! 제자까지는… 아니에요.”
손사래 치는 리디안의 모습에 마제스티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모탈 형님한테 세세한 거 더 배우고, 템 세팅 제대로 더 맞추면 완벽해지겠는데요?”
“에이, 설마요. 전 아직 70인걸요.”
부담스러운 웃음에 마제스티와 이노센트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씩 웃었다.
“레벨이야 올리면 그만이죠.”
“그치. 빡세게.”
두 사람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비틀어졌다. 리디안은 말실수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 * *
이노센트를 주축으로 한, 레기온 여성 플레이어 파티는 일주일 이상 유지됐다.
노네임은 동생들의 구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고, 길드 마스터 마제스티는 3일 차부터 따라다니지 않았다.
한동안 길드원들과 함께 사냥터를 전전하다 보니 리디안은 그들과의 사냥이 제법 익숙해졌고 또 친해졌다. 가장 허물없이 대해 주는 이노센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엔 어색했던 언니라는 칭호도 이제는 입에 붙었다. 게임이라는 이유로 관계 맺는 걸 부담스러워했었는데, 막상 친해지고 나니 이만큼 든든한 것도 없었다. 다소 관계를 우려했던 행복과 자살토끼 역시 상당히 친해져 이제는 언니로 부르고 있는 상태였다.
서른넷인 행복은 길드 마스터 마제스티와 오래전부터 게임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누나, 동생 사이로 오랫동안 함께 게임을 하다 노르드 월드 오픈 후, 초대받아 왔다고 한다.
그녀는 길드 맏언니답게 포용력 넓고 온화한 성격으로 길드원들 대다수가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이었다. 리디안 역시 이지적이고 상냥한 그녀의 모습에 금세 벽을 허물게 되었다.
이름의 민감한 단어 때문에 보통 줄여서 자토라고 부르는 그녀는 리디안보다 한 살 위인 스물다섯 살이었다. 아담하고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자토는 털털하고 시원스러운 성격인 데다, 가장 또래와 근접해 부담스럽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같은 길드원인 ‘또치’와 최근 분홍빛 기류를 만들어 내고 있어 종종 리디안에게 연애 상담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태 솔로인 리디안이 그럴듯한 조언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현실 세계의 친구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리디안은 레기온 길드 분위기와 사람들과의 교류에 천천히 적응해 갔다.
며칠 후.
페페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리디안은 편지를 받은 밤부터 들떠, 약속 시각보다 일찍 광장으로 향했다.
헤른과 함께 했던 파티가 파투 난 뒤로 오래 연락하지 않았고, 별도로 길드에 대해 말한 적이 없기에 리디안은 페페의 반응에 사뭇 긴장했다.
다시 만난 페페는 별생각 없이 바라본 리디안의 정보 창에 레기온 길드 마크가 떠있는 것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도 못한 이적에 매우 놀란 눈치였으나, 그 과정에 대해 듣게 된 페페는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했다.
“그래도 레기온으로 가서 다행이네요. 축하드려요, 리디안 님.”
“따로 말씀드린다는 게, 이것저것 경황이 없다 보니…….”
“거기 정신없는 바바리안분이 계시죠?”
쿡쿡 웃는 페페의 말에 리디안은 곧장 이노센트를 떠올렸다. 역시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페페 님은 이적 안 하세요?”
“음. 그러잖아도 요즘 ONE 길드랑 얘기 중이에요.”
무척 좋은 소식이지만 페페는 조금 난감한 기색이었다.
“근데 제가 사실 태양 길드 출신이라서요.”
“아. 그러고 보니 옛날에 잠깐 그쪽 길드 달고 계셨었죠?”
“네. 반년 정도 몸담았는데, 길드 탈퇴할 때도 그쪽 부길마가 엄청 아니꼬워했거든요. ONE 길드로 가는 거 아니냐고요.”
“ONE이랑 태양이랑 사이 안 좋다는 말은 들었어요.”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제 태양이랑 상관없긴 한데. 뒷말이 나올 것 같아서 좀 꺼림칙하네요. 근데 뭐 사실… 최근에 제가 ONE 길드랑 너무 어울려 다녀서 그것도 크게 의미 없긴 하죠. 그래도 뭐, 좀 그러네요. 리디안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돌연 떨어진 물음에 리디안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잠시 당황했으나 그녀는 차분하게,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어디든지. 페페 님 이 마음 편한 곳에, 페페 님을 필요로 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외롭지도 않게…….”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너무 단순한 것 같아 리디안은 부끄러워 볼을 긁적였다. 속마음은 같은 길드였으면 좋겠다, 였지만 페페는 게임 시절부터 ONE 길드와 더 인연이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힐러 원탑인 페페에게 있어, ONE만큼 잘 어울리는 길드도 없었다.
다행히 페페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갈 곳은 정해졌다. 더욱이 리디안의 의견에 더욱더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페페는 내심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ONE으로 들어가 리디안을 데려갈 걸 그랬다고. 늦은 후회가 들었다.
ONE의 신규 길드원으로 들어가도 사람 한 명 데려올 정도의 힘은 있었고, 리디안 정도라면 ONE에서 크게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페페는 리디안의 레기온 길드 마크를 아쉽게 바라봤다.
“레기온은 어때요? 지낼 만해요?”
리디안은 헤헤 웃어 보였다.
“처음엔 납치 비슷하게 가게 되어서 부담도 되고 걱정스러웠는데, 다들 너무 잘해 주세요. 정말 너무 좋은 분들이에요. 특히 언니들이 제일 잘해 줘서 좋아요.”
“다행이네요. 레기온은 편 가르기도 없고 마제스티 님이 워낙 대인배라 성격도 좋으세요. 간부들도 꼼꼼해서 막내 길드원들까지 세심하게 챙겨 주시는 분들이죠. 정말 좋은 곳 가신 거예요. 저도 처음에 레기온으로 갔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페페 님, 레기온에 가입할 뻔한 적이 있으세요?”
“초창기에 레기온, 태양 두 군데서 권유받았거든요. 그때는 길드 랭킹이나 하이 랭커 수만 보고 태양에 가입했는데 길드 분위기가 영 별로더라고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힘들었고, 그래서 한동안 고생 좀 했죠. 통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서 나중에 탈퇴하고 응급실 창설했죠.”
“…아쉽네요. 그때 레기온 가셨으면 지금 저랑 같은 길드였을 텐데.”
푹 숙인 고개 아래에서 그런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페페는 수줍은 그녀의 말에 잠시 얼굴을 붉혔다. 염치없게도 잠시 입매가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페페는 부릅뜬 눈으로 도리도리 고개 저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이 얼마나 양심 없는 감정인가. 서른하나, 페페는 철없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 제가 전투 길드로 들어가 버렸으니 이제 페페 님이랑 파티도 못 하겠죠? 레기온도 당연히 규정이 있을 테니…….”
귀여운 발언에 페페는 다시 한번 가슴을 붙잡았다. 시무룩해진 얼굴을 보며 기분 좋게 웃은 페페는 자신 있게 목을 세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봬도 제가 세인트 유망주잖아요. 마제스티 님이랑 개인적으로 친분도 있고, ONE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ONE은 레기온이랑 큰 마찰이 없어서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와, 페페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자부심이…….”
“에이, 웃자고 하는 말이죠.”
실없는 농담을 하며 두 사람은 정답게 도시를 걸었다. 걷는 내내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때마침 웃음을 터트리며 지나가는 일행을 잠시 눈여겨본 페페가 쓰게 웃었다.
“벌써 두 달이 넘었네요, 이쪽 세상에 갇힌 지도.”
“그러게요.”
“처음에는 다들 죽을 것처럼 절망하더니, 그래도 이제 다들 적응했나 봐요. 사냥터에도 점점 사람이 많아지고.”
“혼자가 아니니까요.”
리디안은 아련하게 웃었다.
그래, 혼자가 아니었다. 의지하고 기댈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 왜 진작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는지, 리디안은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저도 처음에 헤른 아니었으면 혼자 적응 못 하고 땅 파고 있었을 거예요. 아, 헤른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아, 그분. 프리피케로 갔다고 했죠?”
“네. 깜짝 놀랐어요, 정말.”
정말, 모든 건 헤른 덕분이었다. 적극적이고 실행력 넘치는 헤른이 곁에 있어 사냥터에도 가보고, 타인과 파티도 맺고 어울릴 수 있었다.
혼자서 못할 건 없겠지만, 그래도 헤른이 중간에 있어 모르는 사람들과 더 섞이기 수월했다. 길드만 하더라도. 헤른이 등을 떠밀어 주지 않았으면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거절하고 다시 혼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리디안은 부끄러운 웃음을 숨겼다.
“아, 여기 여관에 머물고 계시죠? 들어가서 얼른 쉬세요.”
두런두런 얘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여관 앞에 다다랐다.
길드 아지트를 잃은 리디안이 한동안 묵던 여관이었고, 언젠가 페페가 데려다주었던 곳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페페의 세심한 모습에 기분 좋았지만, 리디안은 아차, 싶었다.
“아, 페페 님! 저 집 샀어요.”
덜컥 멈춘 페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진짜요? 와, 리디안 님 부자였네요.”
“아이템에 투자 안 하고 자린고비처럼 모아 둔 결과죠……. 페페 님은 어디서 묵고 계세요?”
“저도 집 하나 구해 놨어요. 초반에 여관 살이 해봤는데, 영 불편하더라고요.”
“맞아요, 시끄럽고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느낌이잖아요.”
“모셔다 드릴게요. 어디예요?”
여러 갈래의 분기점을 바라보며 페페가 고개를 기울였다. 리디안은 그 친절에 얼굴을 붉혔다.
“에이, 페페 님도. 위험한 곳도 아닌데 뭘요.”
쑥스러운 미소에 페페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본인도 꽤 머쓱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최근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어 리디안을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아직 소문 못 들으셨나 보네요. 요즘 먹고살 만해지니까 여자분들한테 추근대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요.”
“네? 추근대요?”
페페는 잠시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던전데이트라고, 알고 계시죠?”
“아. 그 친목 길드요? 거기 원래 소문 안 좋은 길드 아니에요?”
“맞아요. 게임 때도 번개 유도해서 이상한 만남 주선하고 그러던 길드였어요. 운영자한테 경고도 몇 번 받았을 거예요.”
“그럼 그 길드 사람들이 지금……?”
“네. 전투 길드 잘못 건드려서 문제가 되고 싶진 않겠지만, 이상하게 게임 때보다 정도가 심해졌더라고요. 요즘엔 대놓고 여관이랑 거리에서 헌팅하고 그래요. 다들 자포자기하고 막 나가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희 길드 여성분도 최근에 불쾌한 일을 겪었거든요.”
“응급실 길드원한테요? 응급실이면 다 랭커 세인트잖아요.”
경악하는 리디안의 모습에 페페는 쓰게 웃었다.
“랭커라고 해도 응급실은 전투 길드도 아니고, 인원도 적잖아요. 인맥만 좀 있을 뿐이지. 그리고 어린 여자분이다 보니까 그쪽 사람들 보기엔 좀 만만했나 봐요.”
“너무하네요…….”
“그러니까 리디안 님도 조심하세요.”
“에이… 제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런 사람들이…….”
페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심하세요. 여기서도 어느 정도 접촉이 가볍게 되는 모양이에요. 악용해서 추행하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가능한 길드원들이랑 붙어 다니세요.”
생긋 웃는 그의 충고에 리디안은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갈까요, 그럼?” 여전히 데려다주겠다는 페페의 의지에 리디안은 네― 하고 즐겁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