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65
265화
“보리 님. 전보다 한결 표정 좋아지셨네요. 어제 일 때문에 좀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일거미와 사마귀를 물리친 뒤. 별언덕 중앙을 통과하던 때, 페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리디안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헤헤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만 해도 보리알은 내내 찌푸리거나 무표정하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오늘은 길드 성에서부터 쭉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보리알이 지금의 파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뚜렷한 표현이기도 했다.
거기다 아직은 슈퍼문 길드를 달고 있는 보리알로 인해, 몇 명이 낯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파티의 분위기도 좋았다.
게임 시절, 레이드 진행 관련으로 이미지를 좋게 보지 않았던 파파나 이노센트 역시. 어제 이후로 박혀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싹 지운 상태였다.
출발 전, 대장군과 흑도에 관한 이슈. 그리고 태양 연합과 신세계에 대한 불만으로 적당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큰 도움이었다.
“왠지 내가 열 내면 그놈들이 더 좋아할 거 같아서요. 그리고 어차피 이제 마주칠 일도 없는 놈들이잖아요. 그냥 똥 한 번 길게 밟았다고 생각하고 털어냈어요.”
따거와의 관계, 베누스의 성격 등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다. 앞서가는 현명한 판단에 리디안이 감탄했다.
그러나 이제 마주칠 일이 없다는 말이 조금 걸렸다. 해석하기에 따라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에 리디안이 고개를 기울이던 때였다.
“저도 그냥 길드 탈퇴하려고요.”
상큼한 선언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몇 걸음 떨어져 앞서가던 적혈구와 딜러들도 놀라 우뚝 멈췄다.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보리알은 해탈한 사람처럼 빙그레 웃었다.
“슈퍼문에서 나온다고요?”
잘못 들었나 싶어, 페페가 확인차 되물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보리알은 그럴 거라며 다시 한번 못 박았다.
보리알은 슈퍼문 길드의 초창기 창설 멤버이자,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만큼 길드 마스터인 무너스키와 각별한 사이였고 그녀의 남편 역시 무너스키와 호형호제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가족 아니냐고 할 정도로, 의리와 정으로 가득한 관계였다.
그런 보리알이 무너스키에게서 돌아선다는 건 특종감이었다. 대장군과 핑크푸크의 깨진 관계처럼 말이다.
물론 보리알이야 그동안 연합 내에서 당한 수모가 많기도 했고. 매번 분노로 표현하는 걸 무너스키가 어영부영 달래 넘어갔기에, 태양 연합 입장에선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연합’에서의 탈퇴지, ‘슈퍼문’에서의 탈퇴라곤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윤재야. 우리, 리디 꼬셔서 저분 우리 길드로 가입시키자.”
놀란 페페와 리디안이 이것저것 묻는 사이, 이노센트가 크라이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이노센트는 최근 보리알과 리디안이 친해졌으니, 잘만 말하면 넘어오겠거니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이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누나 말대로 저 정도 힐러가 오면 좋은 일이지만, 무너스키 때문이라도 굳이 우리나 레온네 길드로 들어가진 않을 거예요. 차라리…….”
크라이그가 말끝을 흐리기가 무섭게, 보리알이 자신의 향후 계획을 밝혔다.
“탈퇴는 오늘이나 내일 안에 할 거고, 상황 보고 나중에 잠잠해지면 대장군 님네 길드 들어갈 거예요. 솔직히 이쪽 연합에 가입 요청할까도 했는데. 무너 오빠랑 레온 님 관계 생각하면 뒤통수쳤다는 얘기 나올까 봐…….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씁쓸한 웃음에 리디안은 아쉬움을 삼켰다. ONE이나 레기온. 둘 다 보리알 같은 세인트를 마다할 리 없었다.
하지만 보리알과 먹구름, 무너스키의 관계가 깊었던 만큼, 그들이 레기온 연합에 들어오게 되면 시선도 시선이거니와 보리알 본인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을 거다.
“워……. 그럼 슈퍼문에서도 꽤 빠져나가겠네요? 먹구름 님은 당연히 보리 님 따라갈 거고.”
적혈구의 물음에 보리알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몇 안 돼요. 저랑 구름이 포함해서 네 명만요.”
“켁. 그렇게 인원 많은 길드 아닌 거로 아는데. 네 명이면 비율 높죠. 그리고 나가는 사람, 거의 다 세인트일 거 아니에요?”
“아뇨……. 세인트는 저랑 구름이뿐이고. 나머지 둘은 열혈전사랑 저레벨 동생이에요. 나머지 세인트들은 길드에 남아 있을 거예요.”
그 대답에 적혈구가 놀라워했다. 환몽이나 오열 등. 모두 보리알의 가르침으로 자라난 세인트들이었다. 겉으로 보리알을 잘 따르는 것처럼 보였던 세인트들이라, 좀 의외긴 했다.
그래도 보리알과 먹구름이면, 슈퍼문의 주력 세인트가 빠지는 셈이었다. 무너스키 개인뿐만 아니라 태양 연합으로서도 어마어마한 전력 손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박인데? 그럼 태양 연합 애들. 지금쯤 완전 초상집 분위기겠네? 대장군 패밀리에, 보리알 님이랑 먹구름 님까지 빠진 상태면… 이제 걔넨 레이드 같은 건 꿈도 못 꾸겠는데요?”
파파의 헛웃음에 이노센트도 그러네, 하고 신기해했다. 이 정도면 거의 ‘폭망’ 아니냐며 다람이 깔깔 웃었다. 그에 고독한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이트랑 에밀리아가 남았으니, 그쪽도 숨 쉴 구멍은 있겠네.”
“에밀리아는 잘 모르겠네요. 그 사람도 컨트롤 중시하는 타입이라, 같이하기 싫어하는 느낌이 강했어요. 새벽에 잠깐 듣기로도, SSR도 거의 손 떼려는 분위기라……. 근데 또 모르죠. 따거도 거의 퇴출이고, 신세계랑도 돌아섰으니. 다시 마음 바꿀 수도 있겠네요.”
적나라하게 들춰지는 민낯에 이젠 할 말도 없었다. 태양 연합은 그냥 붕괴 직전이었다. 자존심 센 핑크푸크의 성격상 또다시 사람을 모으려 하겠지만, 리디안은 그게 쉽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진짜 윤재 형 말대로네요. 핑푸네, 이제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서 엑스트라 역할이나 할 듯.”
핑크푸크. 점점 비참해지는 말로에서 남은 끝은 또 어디일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 인물이었다.
* * *
“보스 구역 진입이요.”
적혈구의 주의에 리디안은 조심스레 걸음을 늦췄다.
뿔거미 족장이 있는 곳은 맵에서 아홉 시 방향. 별이 떨어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가장 높게 솟아오른 굴 언덕이다. 탁 트인 전경 때문에 멍하니 하늘을 감상하기엔 최고 명당자리기도 했다.
보리알과 파파가 버프를 새로 덧씌우는 동안, 먼저 앞서간 적혈구가 큰 바위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곧, 보스 구역에 들어왔다는 신호로 굴 안쪽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쾅쾅 벽을 치는 듯한 충격음과 함께 입구로부터 괴상한 생명체가 등장했다.
“어우, 난 쟤 눈. 너무 느끼해서 싫더라.”
한숨 쉰 적혈구의 중얼거림에 크라이그와 이노센트가 동감이라며 끄덕였다.
뿔거미 족장은 반인 반충답게 하체는 거미, 상체는 인간으로 구성됐는데 하체는 일거미와 똑같다. 노란 줄무늬가 더 진하다는 걸 빼곤 말이다.
그에 비해 상체는 누더기를 걸친 근육질의 몸매이며 얼굴은 쓸데없이 이목구비가 짙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빛은 물론, 자신만만하게 올라간 입매며 거만한 팔짱 때문에 솔직히 비호감이었다.
특히나 메인 퀘스트에서 조우하던 때, 별에 대한 숭배와 예찬으로 시간을 퀘스트 시간을 잡아먹어, 플레이어들에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보스였다.
굴을 등지고 선 뿔거미 족장은 제 구역에 침입한 플레이어들을 보며 화를 냈다. 설정상 거미족의 언어라, 리디안 일행이 알아들을 순 없었다.
오랫동안 씩씩대던 뿔거미 족장이 여덟 개의 다리를 타닥타닥 좌우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게 공격 직전의 행동임을 파악한 적혈구가 냅다 뛰어들었다.
“용기의 외침!”
“오예! 거미 사냥이다!”
후다닥 방정맞게 따라 뛰어간 다람이 디버프 필드를 깔아댔다. 색색의 디버프 필드가 차례대로 지면 위에 그려졌다.
촐싹대며 뛰어간 것과는 달리, 다람은 진지해진 얼굴로 가장 활용적인 스펠을 위주로, 가장 적합한 무기를 스위칭해가며 시전했다.
다람이 정확하고 깔끔하게 제 임무를 마치고 후다닥 되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근거리 딜러들이 달려 나갔다.
뿔거미 족장이 경쾌하게 얻어터지는 동안, 시우와 도도는 각각 좌우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공격했다.
“여신의 손길!”
뿔거미 족장은 시작부터 전체 공격과 함정을 사용했다. 땅 위로부터 꿀렁거리는 비루한 충격파에도 파티원들의 HP가 쭉 내려갔다.
여태 해오던 레이드보다 난도가 낮은 만큼. 전체 공격의 텀이 길어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리디안은 엄살쟁이 다람을 위해 열심히 손길을 외웠다.
“아, 거미줄이다.”
발아래서 하얀 거미줄 더미가 생겨났지만, 리디안은 침착했다. 함정 패턴이지만 걸리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만 없을 뿐. 스펠이나 스킬 사용은 가능했다.
보스와 딜러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다람이나 파파라면 모를까. 리디안 같은 세인트들은 사실 크게 불편할 것 없었다.
“신성한 축복.”
페페는 함정에 걸린 딜러들부터 먼저 푼 뒤에 세인트들의 해제를 도왔다. 암만 타격이 없다 해도, 재수 없게 보스의 거미줄 분사 패턴이 정면으로 이어지면 꼼짝없이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분사 패턴은 속박하는 거미줄 때문에 디버프로 더 유명하지만, 맞으면 HP가 40%나 줄어든다. 라피아 화산 던전의 ‘야광 거미’가 뿜던 산성 거미줄 공격이 합쳐진 느낌이었다.
함정 패턴은 한 번에 꽤 많은 이를 붙잡는 터라, 페페는 오랫동안 신성한 축복을 복창했다. 하지만 속박 상태가 이어진 건 잠시였다. 빠른 반응 속도로 처리한 페페는 어느새 다시 보조 힐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버프 담당인 보리알도 비슷한 처지였고, 리디안이라 해서 그렇게 바쁘진 않았다.
‘어제 신전이나 지하 도시에 비하면 여긴 뭐…….’
파티원들의 HP 닳는 속도가 느리니, 리디안이 바쁘게 힐을 넣지 않아도 충분했다.
페페나 보리알이 여유 있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라, 솔직히 넋 놓다가 전체 공격 패턴이나 분사 패턴이 나올 때 한 번씩 손길을 써도 그만이었다.
농담으로 눈 감고도 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혼자 탱커 역할을 하느라 고생하는 적혈구를 위해, 혼자 신나 뛰어다니느라 아슬아슬한 다람을 위해. 리디안은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힐 급한 상황 아니니까. 쿨타임 차면 영역 마음대로 쓰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동안 제가 초손 쓰면 되죠.”
스펠 특성상, 멋대로 영역을 쓸 수 없는 리디안을 향해 보리알이 먼저 제안했다. 그러잖아도 언제 쓸까, 기회를 엿보고 있던 리디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하다고 인사한 리디안은 바로 실행에 나섰다.
“여신의 영역!”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여신의 영역은 참 활용도 높은 효자 스펠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영역 효과에 딜러들의 텐션도 올라갔다. 뿔거미 족장의 HP는 보다 더 수월하게 줄어들었다.
“보스 피, 잘 빠지네.”
가만히 진행 상황을 지켜보던 파파가 히히 웃었다. 보스 수준보다 데려온 딜러들이 저 정도니, 잘 빠지는 게 당연했다. 대충 계산하기로도 30분 안팎이면 잡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변수가 문제였다.
“아악!”
뿔거미 족장의 HP가 87%가 됐을 때. 쭉 뻗어 나온 거미줄에 이터널리스트가 붙잡혔다.
이터널리스트는 허공으로 붕 뜬 자신의 모습이며, 코앞으로 불쑥 다가온 뿔거미 족장의 얼굴에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저런. 이제 빨대 꽂히겠네.”
파파가 쯧쯧, 혀를 찼다. 리디안도 곧 있을 의식을 알아 침울해졌다. 흡수 패턴에 의해 잠시 무적이 된 뿔거미 족장의 모습에 딜러들이 하던 행동을 멈췄다.
족장은 거미줄에 말린 이터널리스트를 거꾸로 매달아 그의 발목을 앙, 깨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흡수하듯 쪽쪽 빨아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