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71
371화
연말인 만큼, 리조트는 어딜 가도 붐볐다. 미드가르드의 어지간한 인구는 죄다 이곳에 몰려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변과 가까운 펍으로 가기 위해선 리조트의 남문 쪽으로 걸어야 했는데, 남문 인근은 수영장이 있어 비치 웨어 차림을 한 플레이어가 많이 보였다.
어딜 봐도 휴양지 분위기라 리디안은 들뜬 마음으로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잠시 후 대로를 지나 석조 다리를 건너니, 울타리 너머 수영장의 모습이 보였다. 도시 특성상, 밤에도 환한 곳이라 수영장의 풍경은 낮처럼 눈에 훤히 들어왔다.
리디안과 일행은 매미처럼 울타리에 달라붙어 내부를 구경했다.
전문적인 풀장만 없을 뿐이지,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이나 튜브 같은 용품이 제법 갖춰져 있었다. 발만 담글 수 있는 해변보다 훨씬 놀기 좋은 곳임은 분명했다.
“저런 게 여기서 구현되다니. 진짜 신기하다.”
“엄청 재밌어 보이는데. 우리도 나중에 가서 놀 수 있겠죠?”
“일단 렙업부터 해야…….”
지긋지긋할 정도의 강박증이었다. 울타리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하나둘 우울한 얼굴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반쯤은 장난에 가까웠다.
하이 랭커들은 헤임달과 맞서 싸우겠다는 선포에 책임을 느끼며 결과를 증명하는 것에 더 집중하려는 것뿐이다.
울며 돌아섰던 사람들은 다시금 웃으며 시시덕거렸다.
조만간 늦게라도 가보자며 삼삼오오 짝지어 나름 구체적인 일정을 짜는 동안, 비로소 남문을 빠져나와 해변의 펍에 도착했다.
외관은 짚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지붕을 뒤집어쓴 나무 건물이었다. 하얀 조약돌을 두른 인공 연못도 있었고 근처엔 야자나무가 풍성했다.
내부는 꽤 현대의 풍경과 흡사했으나 주변 풍경 자체는 해변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대체로 펍 전체가 비슷한 분위기였기에 분위기에 이끌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늦은 밤인데도, 대부분의 펍은 나무 데크 테이블까지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리디안과 일행은 적당히 걷다 비교적 한적한 14번 펍으로 향했다. 인원이 많아 외부 데크에 주르륵 둘러앉으니, 테이블 상석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문 창이었다.
점원 NPC가 와서 주문을 받는 미드가르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그에 리디안이 신기해할 무렵, 상석과 가까운 마제스티가 인원수대로 ‘그것’을 먼저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 분도 되지 않아 문제의 음료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리디안은 긴장을 삼키며 미지의 음료를 자세히 살폈다.
공식 명칭은 ‘노르드 전통주’. 애주가들의 마음을 흔들 만한 이름이었다. 일단 모두가 흔히 아는 유리 맥주잔이었다.
그 안에 하얗게 거품이 올라온 노란 액체가 가득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맥주 같았다. 그 친근함에 몇몇이 반가워하며 잔을 들었다.
엉겁결에 잔을 들어 올린 리디안은 수상한 음료를 요리조리 살폈다. 곧장 파파가 제일 먼저 격렬하게 반응했다.
“우욱. 개똥 맛이라더니. 냄새도 이상한데요?”
리디안도 음료에서 퍼지는 수상한 냄새에 잠시 숨을 멈췄다.
썩은 과일을 넣은 것인지, 잔 안에서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쓸데없이 리얼한 후각 효과에 사방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맛도 비슷하다는 누군가의 귀띔에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썩어갔다.
이미 경험해본 자들이 웃으며 반응을 기대했고, 리디안은 경계심을 가득 담아 조심스럽게 홀짝였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멈췄다.
“개노맛이네.”
“맛있는데?”
어째 반응이 갈렸다. 리디안은 ‘개노맛’ 편에 속했기에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한 모금 들이켠 음료에선 쓰고 떫고, 시고 달콤한 맛이 동시에 감돌았다.
그러나 리디안에게는 쓰고 떫은맛이 더 강렬했다. 예민한 사람들은 버베나처럼 불쾌한 맛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저도 이건 좀…….”
어지간한 음료는 다 잘 마신다는 페페도 기상천외한 맛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대다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와중에도 소수의 취향은 주목받았다. 레기온의 이터널리스트가 그 소수에 속했다.
“난 먹을 만한 것 같은데……?”
노네임과 파파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혀가 썩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터널리스트처럼, 의외로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리디안은 내부는 물론, 다른 펍에 바글바글 모여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맛은 이래도 생각보다 매출이 잘 나오는 듯했다.
“이쪽 NPC한테 들었는데. 이게 노르드 월드 공식, 상급 전통주래요. 이쪽 사람들한테는 진짜 술이라나 뭐라나. 미미르 산맥에 있는 이발디. 걔가 이걸 기똥차게 잘 빚는다고…….”
진작 파라디스 아일랜드를 탐험한 테세우스가 쓸데없는 잡지식을 꺼내놓았다.
그 말에 애주가들이 입을 모아 분노했다.
“이게 술이라고? 소비자 우롱이다, 정말.”
“아무래도, 노르드 월드는 건전한 목적의 게임이잖아요. 애초에 RPG이기도 하고요.”
“그런 거 관련해서 아직은 규정이 되게 까다로운 걸로 알아요. 찾아봐도 몇 개 없을걸요? 그마저도 리얼 커뮤니케이션이 목적인 게임이 대부분일 거라 퀄리티는 그닥일 듯.”
“아, ‘방구석 체크아웃’ 같은 거요? 근데 그건 게임보단 소통이 더 목적 아닌가? 뭐, 그래도 비슷한 거 있으면 한번 체험해보고 싶네요. 아니, 내친김에 돌아가면 찾아봐야지.”
“헐. 멘탈도 좋다. 이 꼬라지 겪고도 또 가상현실 들어갈 생각이 나?”
대화하던 헤른의 웃음에 페이지가 경악했다. 페이지는 다시는 게임 같은 거 로그인하지 않겠다며 학을 뗐다. 질색하는 페이지의 반응에 대다수가 쓰게 웃었다.
리디안도 헤른의 말에 놀란 상태였다.
만약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현실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무서워서 다시는 게임에 로그인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쓴웃음이 난무하는 광경에서 자토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흐음… 뭔가 슬프다. 돌아가면 어떻게든 노르드 월드 섭종 될 텐데. 우리 이제 어떻게 연락해요?”
“뭘 어떻게 해. 연락처 다 있잖아.”
심드렁한 이노센트의 대꾸에 자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게임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라면서 말이다.
그 말에 행복이 옅게 웃었다.
“그럼 다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이라도 찾아볼까? 가상현실 말고, 좀 가볍게 할 수 있는 걸로.”
자토와 레기온 길드원. 덩달아 함께 온 타 길드원들도 그 의견을 반겼다. 마제스티는 벌써 자기가 아는 게임 이름을 줄줄 나열하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디안은 배시시 웃었다. 현실로 돌아가면 어떤 형태로든 단절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인연들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게임은 게임이라며, 스스로 선을 긋고 현실로의 확장에 관심 없어 했을 텐데. 지금은 행복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계속해서 연락하고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너무 설레고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와. 그럼 우리 나중에는 본명 부르면서 연락하겠죠? 왜 이렇게 벌써부터 어색하지? 내가 이런 거 처음이라 그런가?”
자토는 갑작스럽게 얼굴이 빨개져선 배를 잡고 웃었다. 같은 상황을 떠올린 사람들도 민망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게임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훗날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편, 자토의 어색함을 이해하지 못한 백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이름이 어때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 않나?”
“에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걸요.”
“어, 맞네. 나 모르는 사람 많음. 일단 자토 이름 모르고, 리디안 님도 모르고. 음… 그냥 거의 다 모르네.”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노네임이 손을 들어 눈을 깜빡였다. 손가락으로 짚으며 세다 보니 꽤 많아, 노네임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자토가 싱글벙글 웃었다.
“제 이름은 ‘연주’예요.”
“어? 갑자기?”
“왜요. 모른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갑자기 훅 들어올 줄은 몰랐지. 어쨌든, 연주. 확인함. 아, 그러고 보니 또치가 가끔 부른 것 같기도 하다?”
뒤통수를 긁적인 노네임이 슬쩍 리디안을 바라봤다. 자토가 스스로 밝혔으니 리디안의 반응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덩달아 따라온 여러 시선에 리디안이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그러나 이름을 말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리디안과 가까운 사람들, 특히 레기온 여자 길드원들은 대충 서로의 본명을 다 알고 있다. 서로 이야기하다 자연스럽게, 별생각 없이 입 밖으로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진 않았다. 이노센트는 본명이 더 편하다고 말했지만, 행복이나 자토, 괴자가 꼬박꼬박 아이디로 부르는 편이라 그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일부가 궁금함을 내비치는 가운데, 리디안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진아요. 유진아…….”
기억력 좋은 이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리디안이 길드 가입 후, 첫 소개에서 반쯤 언급한 이름이라는 걸.
그래서 몇몇은 대충, 이름을 예상했다. 이노센트, 행복, 자토가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 일에서 기인한 사소한 물음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밝힌 리디안은 한참을 낯부끄러워했다. 어쩐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본모습을 제 입으로 직접 밝힌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게 꺼려지거나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설레는 일이라 리디안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참에 다 말해보자.”
기회라고 여겼는지 노네임이 실실 웃으며 사람들을 쳐다봤다. 레기온 길드원들은 별 거부반응 없이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바람에 펍으로 따라왔던 타 길드 사람들도 본의 아닌 본명 공개 시간을 갖게 됐다. 리디안은 옆에 앉은 페페의 차례가 오자 살짝 기대했다.
하지만 페페는 이런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바로 옆 리디안이 몹시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페페의 생각이 달라졌다.
“아… 저는 연우…요.”
페페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앞에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다.
반발 없이 바로 바뀌는 다음 차례에서 리디안만이 옆에서 이름이 예쁘다며 박수쳤다.
페페는 그 반응이 고마워 빙긋 웃었다. 그래서 똑같이 리디안을 칭찬했고, 리디안에게만 작게 소곤거렸다.
“최연우예요.”
최연우. 낯선 이름에도 리디안은 여러 번 그 이름을 곱씹으며 신기해했다. 고작 이름뿐인데, 페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빠르게 지나가 기억에 남은 이가 그리 많진 않았지만. 적어도 타 길드 사람들에게 느끼는 호감은 전보다 더 짙어졌다.
다소 어색한 시간이었지만, 실명을 오픈해서 그런지. 사람들끼리도 더 가까워진 느낌이 뚜렷했다.
특히 친화력 좋은 사람들은 이름을 핑계로 서로 말을 놓기 시작했다. 일부를 제외하곤 대다수가 그걸 반기는 눈치라 한동안은 정말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도 크라이그는 혼자 조용했다. 아닌 게 아니라, 크라이그의 이름은 처음부터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노네임이 꺽꺽대며 웃었다.
“야. 너는 내가 하도 이름으로 불러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치?”
“진짜요. 진수 오빠 오고 나서 자꾸 윤재, 윤재. 이러니까 사람들이 크라이그 님 본명 다 알잖아요. 가끔은 저도 모르게 윤재 님. 이럴 뻔했다니까요?”
박장대소하며 맞장구치는 자토의 말에 리디안도 내심 동의했다. 크라이그는 처음에만 잠깐 크라이그였지. 이후로는 거의 ‘모두의 윤재’였다.
“이참에 그냥 윤재로 통일하자. 크라이그, 솔직히 오글오글하잖아.”
농담 반, 진심 반. 노네임의 발언에 모두가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 당사자인 크라이그만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웬만해선 볼 수 없는 표정이라, 마주보고 있던 리디안이 기회다 싶어 짓궂게 웃었다.
“정말, ‘윤재 님’이 부르기 더 편할 것 같아요.”
“그럼 저도 진아 님이라고 부르죠, 뭐.”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곧장 튀어나온 대꾸에 리디안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사실 가까워 보이고 편한 호칭이긴 한데, 갑자기 자신의 본명이 상대의 입에 오르니 굉장히 민망해지고 말았다. 리디안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냥 크라이그 님이라고 할게요.”
하지만 크라이그는 눈치가 빨랐다.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에 리디안은 절망했다. 참 화기애애하고, 어떤 의미로는 뜻 깊은 연말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