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20
420화
헬라는 표독스럽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거인은 금세 시무룩해져 무릎 꿇고 주저앉아 땅만 바라봤다.
부들부들 떨리는 거인의 등을 박회장이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당신은 이곳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가온 신사가 냉정하게 판단했다.
신사의 관점에서 공성전 레이드를 함께 한 거인의 능력은 크게 메리트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맵 이동 제한이 없다는 가정에서 판단해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거인이 플레이어들의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 만약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미드가르드로 데려간 거인의 거취도 큰 문제다.
더군다나 나스 산맥 공성전에서 보여준 거인의 낮은 ‘마력’은 장기전이 될 파프니르 레이드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게 결정적이었다.
신사는 함께 싸울 든든한 아군을 원한 거지, 돌봐줘야 할 아군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 그냥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희는 거인 님이 침식당하지 않고 끝까지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행여나 신사가 곧이곧대로 말할까 봐. 염려한 대장군이 재빨리 나섰다.
그 발 빠른 대응에 마제스티와 풍월주가 슬며시 엄지를 치켜세웠다.
반면 군주는 따듯한 말에 감명해 울먹거렸다.
“너희 정말… 좋은 이방인들이구나……?”
“꼴값 떨지 말고. 용무가 끝났으면 당장 내 집에서 꺼지렴.”
헬라는 역시 헬라였다. 갑자기 끼얹은 찬물에 미소 짓던 플레이어들이 단박에 정색했다.
그 말은 군주도 함께 떠나라는 뜻이었다.
이 이상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던 신사는 강력하게 경고했다.
“저희가 드리는 보석은 저 거인의 체류 값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종류를 받고 싶으시다면 신변 문제없이,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아하는 보석을 거들먹거리며 협박하자 헬라의 말문이 막혔다.
바보가 아니라면 일 순위로 탐내던 다이아몬드를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아먹었을 거다.
결국 헬라는 우악스럽게 표정을 찌푸리며 조용히 돌아섰다.
순식간에 마무리된 상황에 오딘은 신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거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신사는 거인을 향한 감정보단 그저 귀찮기 싫어서 그리 대답한 거지만, 거인은 그걸 호감으로 느꼈는지 신사를 향해 뜨겁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용무가 끝났음을 확인한 오딘이 손짓했다. 한참 전부터 헬헤스트와 다정하게 붙어 있던 슬레이프니르가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훌쩍 올라타는 오딘의 모습에 헬헤스트가 상당히 아쉬워하는 듯했으나, 헬라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터덜터덜 돌아갔다.
저렇게 사이좋은 말들처럼 오딘과 헬라의 사이도 원만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리디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일이 잘 해결되어 다행이군. 무운을 빈다.”
다시 만나자는 말을 덧붙이며 오딘이 말고삐를 흔들었다.
슬레이프니르는 여덟 개의 다리를 구르며 허공을 향해 길게 울었다.
하얀빛의 입구가 다시 나타났고 오딘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스가르드로 떠나버렸다.
“당신들도 돌아갈 차례입니다. 우트가르드 로키 님께는 당분간 머물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강글로트가 손짓했다.
친절하게 문을 가리키는 태도에 박회장이 썩은 얼굴로 웃었다. 사실 이야기가 모두 끝났기에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무너스키의 칭얼거림을 시작으로 하나둘 이동하기 시작했다. 돌아서던 리디안은 헬라를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헬라 님.”
그제야 헬라가 힐끔 리디안을 쳐다봤다.
“내 오른눈이란다. 잘 간수하렴.”
“음… 몸조심하라는 말로 들으면 되겠죠?”
리디안이 멋쩍게 웃자 헬라는 입가를 비틀었다. 무안하리만치 차디찬 반응에 리디안은 시무룩하게 돌아섰다.
“이방인들… 금방 다시 돌아올 거지?”
“네. 오래 안 걸려요. 괜히 나가지 말고 여기 꼭 붙어 있으세요.”
어쩔 수 없이 엘류드니르에 남아야 하는 군주, 우트가르드 로키와 인사한 뒤, 플레이어들은 비로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헬라의 저택을 떠났다.
생각지 못한 큰 소득을 얻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드래곤 레이드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 * *
나스 산맥 원정대가 귀환했다.
최근 돌아올 때마다 좋은 소식을 들고 오는 하이 랭커들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싱글벙글 웃었다.
특히 사람들은 신 헬라를 만나 지원받기로 했다는 사실에 가장 환호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세세하게 알지 못해, 그저 흐름대로 드래곤 레이드에 대비해 스펙을 높이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의욕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이제 파프니르만 패 죽이면 나갈 수 있는 건가?”
누군가는 희망 가득한 눈으로 두근거리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을 달려가는 때도 아니었고 최후의 결전 자체가 성공이 보장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기대감이 가득한 상황에서 실패한다면 상실감이 어마어마하겠지만, 워낙 일이 잘 풀리다 보니 사람들은 막연한 기대감에 휩싸였다.
“일단 나스 평야 레이드부터 재도전하겠습니다. 이번에도 C 구역입니다.”
다시 들려온 레이드 소식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갸웃했다.
다 밝히기엔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많아, 길드 마스터들은 최대한 간단하게만 공표했다.
그 과정에서 결혼식 돈 버그가 밝혀졌고, 늘 그랬듯 철없는 일부 플레이어들이 하이에나처럼 등장했다.
뭐, 주절주절하는 말이야 뻔했다.
결론은 자신들도 해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우리도 결혼식 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돼요? 솔직히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이 특수 상황을, 철없는 몇몇이 이벤트, 훈장, 트로피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언제 이런 진귀한 경험을 해보겠느냐며, 이왕 하는 김에 조금 기다려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는 얄미운 청에 리디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간부들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이젠 저런 개소리에 일일이 대꾸해줄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 소동을 전해 들은 가을 길드, 돈게스는 착잡하게 한숨지었다.
“이제 마지막이라 우리도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데… 저런 병신 새끼들은 진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저런 새끼들 나대는 거 꼴 보기 싫기도 하고. 목숨 걸고 돌아다니는 동생들 기운 빠질까 봐 감추려고 나섰구만. 사람은 진짜 다양하다, 다양해.”
이제는 어지간한 길드 마스터들과 말을 놓고 지내는 돈게스가 짠 웃음을 내보였다. 당연히 돈게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눈치 없는 또라이들 때문에 팍 식다가도, 저런 분들 덕분에 다시 힘이 나더라고요.”
간부들과 돈게스가 허심탄회하게 속사정을 주고받는 동안, 크라이그는 돈게스 같은 사람이 있어 참 다행이라며 잔잔히 웃었다.
리디안도 돈게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절로 웃고 있어 바로 동의했다. 가을 길드의 따듯한 마음은 현실로 돌아가서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퀘스트가 시급하니, 해지기 전에 바로 나스 평야 출발하겠습니다.”
결혼반지의 재료만 얻으면 그만인 일이라, 굳이 난도를 높여 갈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을 급조해 재도전한 C 구역의 레이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스 평야 레이드를 처음 진행하던 당시와 상황이 다르니 당연했다.
80레벨 플레이어가 부쩍 늘어나 신스킬, 신스펠이 수두룩했다.
몇몇 패턴에 있어 애로사항이 꽃폈으나, 최종적으로는 희생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운 좋게 실패 없이 퀘스트를 완료한 백검, 이노센트 부부는 돌아가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예약했다.
* * *
헬라를 만난 다음 날인 23일 오전.
100% 순수한 마음으로만 진행했던 저번 결혼식과는 달리, 파라디스 아일랜드에선 세상에서 가장 불순한 결혼식이 진행됐다.
노르드 월드의 결혼식에 작게 흥미를 보이던 이노센트는 이제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결혼식이야 실제로 해봤으니 그걸로 됐지. 우리 결혼식으로 용 잡는 데 보탬이 된다는 게 의미 있는 거지. 안 그래? 그러니까 볼일만 보고 바로 끝낼 거니까. 괜히 놀러 올 생각 말고 진지하게, 보석만 잔뜩 갖고 와요.”
대놓고 금전을 요구하는 이노센트의 모습에 레기온 길드원들은 저마다 땀을 흘리며 웃었다.
그 말대로 부부의 두 번째 결혼식은 대단히 무미건조했다. 웃음과 축하가 끊이지 않아야 할 결혼식장에는 비장한 욕망이 가득했다.
모두 결혼식 돈 버그를 이용해 작업하려고 축의금 NPC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보석을 쓸어 담아 온 리디안 역시 긴 뒷줄에서 눈을 빛냈다.
하지만 작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어? 스무 개가 맥스인가 본데요?”
일등으로 자리 잡아 신나게 낄낄거리던 파파가 당황한 눈으로 돌아봤다. 개미 떼처럼 줄지은 행렬은 그 소식에 바로 야유했다.
축의금으로 넣은 보석이 개당 오백만 원으로 돌아오니, 최대 수량을 생각하면 인당 1억밖에 만들 수 없는 셈이다.
문제가 확인되자 길드 마스터들은 곤란한 시선을 나눴다. 한계치를 생각 못하고, 그저 혼란을 막으려 50명을 선별해 작업한 건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사람들 다 동원하자.”
긴 고민 끝에 백검과 이노센트 부부가 거리로 청첩장을 뿌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축의금으로 보석만 낸다면 누구든 들어와도 좋다는 조건에 미드가르드가 들썩였다.
어차피 낸 축의금은 모두 부부에게 가게 되어있으니, 장난질만 아니라면 굳이 거를 일이 없었다.
다행히 보석이 보조재료라 쉽게 구할 수 있어 그런 건지, 급조된 플레이어들은 안내에 따라 착실하게, 보석 스무 개를 올려놓고 입장해 웨딩홀 이벤트를 만끽했다.
물밀듯 밀려오는 하객을 다 받으니, 축의금은 몇십억 정도를 웃돌다 순식간에 오백억 가까이 뛰었다.
그마저도 웨딩홀 규모에 따른 하객 제한 수가 걸리는 바람에 거기서 그쳤다.
덩달아 개별 골드 소지 한도가 걸려, 금고는 물론 간부들까지 부랴부랴 나눠갈 정도였다.
잠깐, 어수선했던 광경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야. 이거 게임이었으면 다들 영정 당했겠지?”
“웃을 때임? 나가면 우리 진짜 영정 당할지도 모름.”
“영정 당하고 끝나면 다행이지. 목숨값 싸게 먹혔다고 봄.”
“빨리 나가고 싶다.”
“근데 헤임달 지금 개빡쳤을 듯. 헬라 끼어들었고, 지금 우리가 용 먹이로 쓰려고 금괴 만들고 있는 거 모르진 않을 거 아니야?”
“보고 있나, 헤임달?”
들뜬 사람들이 폭소하며 떠드는 동안 임무를 마친 리디안은 간부들과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어제 바로 확인하지 못한, 헬라의 ‘술트르’를 시험해봐야 했다.
* * *
인적이 드문 어느 초보 사냥터.
리디안은 길드 마스터들의 눈짓에 따라 손가락을 술트르에 갖다 댔다.
정체불명의 나이프를 손에 대는 게 사실 조금 두려웠지만. 책임감을 상기한 리디안은 질끈 눈 감은 채 살짝 그었다.
“으…….”
자기 손도 아닌데. 곳곳에서 타인의 신음이 들려왔다. 꽤 따끔하다고 생각하면서 리디안은 미리 정해둔 자의 이름을 불렀다.
“시구르드.”
칼날에 맺힌 작은 핏방울이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은색이었던 칼날은 붉게 변해 불길한 안개를 뿜어냈다.
놀란 크라이그가 당장 검을 버리라며 손을 뻗은 찰나, 삽시간에 바닥으로 퍼진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검은 그림자를 빚어갔다.
엘류드니르 앞에서 강글로트와 강글라티가 등장하던 상황과 흡사했다. 리디안은 괜찮을 것 같다며 손을 저었다.
예상대로, 검은 그림자는 점차 색을 입어가며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프니르와 헤임달을 처음 만났던 그날. 산맥 초입에서 마주한 시구르드가 나타났다.
박회장은 정말로 소환된 시구르드의 모습에 몹시 반가워했다.
헬라의 말대로. 그 힘에 묶여 소환된 시구르드는 겉보기에 아무 문제 없는 듯했다.
하지만 리디안은 당장 시구르드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 정보]이름 : 리디안 / 길드 : 레기온
레벨 : 80 / 직업 : 세인트 / 보조직업 : 재단사
HP : 3117 / MP : 3324
정보창을 확인한 리디안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지금 이 소환으로 깎인 MP는 3천. 무난하다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리디안의 게이지를 주시하고 있던 마제스티와 레온도 입을 쩍 벌렸다.
“…방금 20이 더 깎였는데. 유지용으로 분당 깎이는 것 같아요.”
넋 나간 채 게이지를 관찰하던 리디안이 허무하게 말했다. 간부들은 더 놀라 웅성거렸다.
리디안의 MP면 시구르드와 군나르, 동시 소환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소환 유지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MP가 빠져나간다면, 하나를 한 시간 동안 유지하는 동안 1200이 소모된다.
뭐, 리디안의 엠틱이 높으니 그만큼 다시 보충될 거고, 무리하게 한꺼번에 둘을 소환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둘의 소환을 유지하며 회복 스펠까지 주력으로 써야 하는 리디안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