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42
442화
미드가르드 중심가.
멈춰버린 게이트 옆 공터에 모여든 사람들은 고개 들어 한 곳을 응시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오딘의 손짓 한 번에 생겨난 ‘무지개다리’였다.
하지만 높이며 폭이며, 올라가기엔 조금 위험해 보였다. 그에 플레이어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오딘이 안심시키듯 말했다.
“올라가면 더 넓은 공간이 나올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며 오딘이 먼저 계단에 올라섰다.
그가 사뿐한 걸음으로 2미터 남짓 올라간 순간, 신기하게도 구름 너머로 몸이 쏙 빨려 들어갔다.
낯선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잠시였다. 길드 마스터 몇 명이 먼저 차례대로 오르자, 나머지 사람들도 줄지어 계단을 밟았다.
리디안은 조금 기다렸다가 마지막쯤이 돼서야, 길드원들과 정답게 올라섰다.
일곱 빛깔의 구름다리는 융단처럼 푹신푹신했다. 그러나 몇 걸음 올라서자, 부쩍 높아진 시선에 약간의 공포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까마득해 보이는 지상 풍경에 넋을 놓을 뻔한 때, 어느 순간 맑은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가 바뀌었다.
“와…….”
무지갯빛 구름다리 옆으로 창공에 둘러싸인 거대한 나무 꼭대기가 보였다. 언젠가 미드가르드에서 본 것이었다.
리디안이 기억하기로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분명했다.
세계수의 머리 꼭대기와 같은 눈높이인 위치도 위치거니와, 리디안은 넓은 구름다리 옆으로 뻥 뚫린 하늘 배경에 당황했다. 조금 전 있던 곳과는 천차만별의 허공이었으나, 신기하게도 공포감은 들지 않았다.
“저거 설마 미드가르드야?”
누군가 구름다리와 세계수 아래를 가리켰다. 멀어 흐릿하긴 해도 숲과 어우러진 여섯 개의 도시가 저 아래에 존재했다.
겨우 몇 걸음 걸어 올라왔을 뿐인데 순식간에 이런 높이라니. 모두가 놀라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디안 역시 ‘이세계’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조심스럽게 공간을 살폈다. 그중, 같은 시야에서 바라본 세계수의 머리 아래로 처음 보는 구역이 있었다.
미드가르드와는 까마득한 높이였고, 구역 아래론 하얀 구름이 경계선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곳은 세계수의 기둥을 중심으로 원반처럼 넓은 면적을 지녔으며, 맑고 푸른 호수를 품은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허공엔 폭포가 떨어지는 녹색 섬 여러 개가 둥둥 떠다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오딘은 그곳을 ‘아스가르드’라고 소개했고, 박회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스템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선두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리디안은 플레이어 정보창과 인벤토리 등 일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신사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헬라 앞에 섰다. 진작 신사를 따라다니며 협박하던 헬라는 모든 보석을 받아내고 나서야 싱글벙글 웃었다.
침식에서 풀려난 지금 저런 거래가 가능할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무지개다리는 중간지역과도 같아, 차원과 차원을 잇는 연결점에선 교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거울 세계의 지성체가 직접 자기 의지로 건네주는 건 문제가 없다며 오딘이 부연 설명했다.
리디안은 아이처럼 기뻐하는 헬라를 보며 나지막한 한숨을 뿜었다.
“물론, 훗날 우주신에게 발각되어 균형 위반으로 압수당할 가능성은 있지만…….”
한심스러운 오딘의 뒷말에도 헬라는 개의치 않았다. 헬라는 거래 대가는 꼭 받아야 한다며 자신의 아공간에 보석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보다 못한 일반 플레이어들도 그걸 보곤 자신의 인벤토리에 있던 보석류를 적선했다. 그래도 저 사람 덕분에 귀환하게 됐다면서 말이다.
헬라는 조금 자존심 상해하는 것도 같았지만, 당장 손안에 보석이 가득 쌓이니 금세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헤임달이 제법 괜찮은 생각을 했어.”
오딘은 그 망언에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다소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눈 돌린 오딘이 손끝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러자 불투명했던 창공의 한 면이 황금빛 공간으로 바뀌며 물결쳤다. 그 공간은 플레이어에겐 마치 빛나는 게이트처럼 보였다.
“저곳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희의 세계다.”
그 말이 끝나자, 누군가 인파를 헤집어 뛰어나갔다.
놀란 레온이 멈춰 세웠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황금 공간 안으로 완벽하게 사라지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웠던 걸음은 차차 빨라졌고, 일부는 전속력으로 달려 황금 문으로 몸을 던졌다.
곧이어 여러 사람이 우르르 내달리기 시작하자 헬라가 입술을 실룩였다.
“어차피 저 문은 오딘이 닫지 않는 한 열려 있을 텐데, 좀 더 머물다 가지 그러니? 많은 요정족이 너희에게 고마워하는 눈치란다. 놀기 좋아하는 요정족들이니 당연히 성대한 축제를 열어줄 거야.”
헬라가 달콤한 목소리를 흘리며 웃었다.
“이발디와 빌 우드는 너희에게 사과하고 싶어 한단다. 침식에 휘둘려 몹쓸 소리를 했다고. 또, 엘로나와 벨로나는 너희가 로크바를 무찌르고 눈을 되찾아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단다. 브륀힐드도 마찬가지지. 아, 운이 좋으면 군나르와 시구르드가 명예 대결을 하는 걸 볼 수도 있겠어.”
어쩐지 플레이어들을 남아 있게 하려는 유혹 같았다. 그 말에 박회장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헬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원한다면 아예 이곳에 남아 살아도 된단다.”
“헬라.”
오딘이 작은 목소리로 역정을 냈다. 플레이어들은 도무지 영문을 모를 말에 당황했다.
“아니, 여태 돌아가고 싶어서 우리가 생고생한 걸 몰라서 하는 소린가?”
어이없다는 이노센트의 중얼거림에도 헬라는 씩 웃었다.
“낮과 밤. 두 신의 입회 아래, 영구적인 이주 계약을 맺는다면 다른 차원의 지성체라도 이 세계의 주민이 될 수 있단다. 인간 종족이 아예 없는 세계에선 이런 식으로 종종 계약이 이루어지지. 중간지역에서의 계약은 우주신의 승낙이나 다름없어,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 말렴. 여담이지만… 헤임달이 오딘에게 요구했던 게 바로 이 계약이기도 하지.”
“헬라……!”
입 다물라는 오딘의 눈총에도 헬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때? 우리 세계를 겪어본 아이들이니 선택권을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곤 뱀처럼 웃으며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계약을 하게 되면 모든 기억과 가진 능력을 잃게 될 거란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너희 세계보다 근심, 걱정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될 거야. 그리고 원한다면 특별한 능력을 부여해줄 수도 있지. 마음만 먹으면 브륀힐드나 시구르드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단다.”
그럴듯한 제안에도 여러 사람이 피식 웃어넘겼다.
“헬라가 보석 맛을 보더니, 헤임달처럼 진화, 번영욕에 눈독 들인 게 아닐까요?”
박회장이 작은 목소리로 추측했다.
제법 그럴듯했다. 시스템이라는 힘이 없어도, 헤임달의 논리대로 인간이란 종족이 뿌리내리면 어느 세계든 발전할 수밖에 없다.
탐욕적인 헬라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러나 오딘이 허락할 리 없다는 걸 알아 모두가 웃음으로 넘겼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힘든 현실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여기선 고생해서 돈 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아… 그치. 시구르드 멋있었지. 나도 아무 걱정 없이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일부에겐 제2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에 몇몇 사람들이 진지하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조금씩 흔들리는 분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피식 웃어넘기던 전투 길드원들의 낯빛이 점점 창백해졌다.
급기야 누군가가 손을 들어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자 박회장이 오딘을 쳐다봤다.
“설마, 진짜 계약할 거 아니죠?”
“그럴 일은 없다. 설령 너희들이 원한다고 해도, 내가 거부하면 그만인 일이다.”
단호한 오딘의 태도에 헬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사자가 직접 이주를 요구하면 네가 거절할 권한은 없지 않나?”
“그만하라, 헬라. 너도 헤임달처럼 타락하고 싶은 것이냐?”
두 신은 아웅다웅 언쟁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딘의 강경한 반응 덕분에 헬라가 말한 ‘이주 계약’이 이뤄질 일은 만무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흔들린 뒤였다.
플레이어 대다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넘어갔으나, 현실의 삶이 고달파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쉬움, 미련이 가득한 그들의 표정에 마제스티가 직접 나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다들 돌아갑시다. 여태 우리 돌아가려고 고생했잖아요. 그리고 가족들 생각해야죠. 안 그래요?”
‘가족’이라는 단어는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괜한 기대를 품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돌아섰다.
한편, 리디안은 살짝 아래를 내려다봤다.
현실과는 괴리감이 느껴지지만, 굳이 따지고 따져 현실과 비교하자면 꽤 괜찮아 보이는 세계. 확실히 현실이 힘든 사람들에겐 대단히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당장 본인만 해도 헬라의 얘기를 듣자마자 와― 하고 짧은 감탄이 나왔으니까.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상상이 갔다.
‘만약 내가 여기에 남게 된다면…….’
천천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려던 순간. 리디안은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감각에 번쩍 정신 차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크라이그였다.
이상하리만치 당황하는 리디안의 모습에 크라이그는 설마, 하는 시선으로 리디안을 쳐다봤다.
“엉뚱한 생각 하고 있었던 거 아니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리디안이 땀을 뻘뻘 흘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정말 남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헬라의 말에 살짝이라도 흔들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뭔가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들킨 기분이었다.
리디안은 흔들림 없는 사람들을 힐끗거리며 창피함에 고개 숙였다. 크라이그는 그런 리디안을 지그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음. 리디안 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현실로 돌아가면 지인들이나 친구들이 더 늘어나는 거라 사실 무척 기대돼요.”
갑작스러운 말에 리디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문하는 리디안의 반응에 크라이그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유진아’라는 사람이랑 더 가까워질 걸 기대하고 있고요.”
리디안은 잠시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 나가서도 리디안 님이랑 쭉 연락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느냐는 웃음 섞인 물음이 따라왔다. 리디안은 살짝 화끈거리는 얼굴을 황급히 진정시키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신기하게도, 이곳 노르드 월드에 남아 있게 된다면― 하고 생겨나려던 엉뚱한 상상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대신 현실에서 크라이그를 비롯한 새 인연들과 마주할 일들이 무궁무진하게 상상되기 시작했다.
그 상상은 조금 전 허무한 상상보다 더 현실감 있고 순수한 행복을 안겼다. 무엇보다 ‘유진아’로선 무척 기대되는 일투성이였다.
리디안은 ‘노르드 월드에서의 세계’를 완전히 떨쳐냈다. 그러곤 활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 * *
망상에서 벗어난 리디안은 그 즉시 설득 팀에 합류했다. 아직 소수의 인원이 제자리에 남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급실 출신인 어느 세인트 한 명을 열심히 설득하던 페페는 리디안의 등장에 작게 안도했다. 정신없던 와중에 두리번거리다 홀로 우두커니 뒤를 돌아보던 리디안을 목격했으니까.
아마 지금의 리디안이라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전염성 짙은 분위기 속에서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다행히도 리디안은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페페의 설득을 거들었다.
죽상이 되어 자신의 고충을 푸념하던 세인트 나무는 한참을 고민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얼굴에 여전히 그늘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터덜터덜 황금 문으로 넘어간 나무의 모습에 리디안과 페페가 기뻐했다.
그즈음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설득되었다. 현실 도피자, 자칭 패배자라며 스스로를 비하하던 사람들은 차례차례 현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얄궂게 제안한 헬라는 지원자가 하나도 없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로 별별 투정과 역정을 내다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신이었어요.”
헬라 때문에 괜한 시간 낭비를 했다며 풍월주가 분통을 터트렸다. 길드 마스터들이 모두 동의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대강 정리된 분위기에 안심한 페페가 리디안을 바라보며 웃었다.
“괜찮으시죠?”
리디안은 그 물음의 의미를 알아채곤 머쓱하게 웃었다. 페페도 굳이 언급하지 않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리디안 님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해서 다행이에요.”
“그중에 페페 님도 있어요!”
급히 말한 리디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페페 님은 저한테 정말 좋은 스승님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좋은 친구였으면 좋겠어요.”
리디안에게 있어 페페 역시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이었다. 물론 여기서 나간다고 그간의 친분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겠지만.
크라이그를 통해 용기를 얻은 리디안은 페페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좀 더 연장자다 보니, 여러모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페페는 그 요청을 몹시도 반겼다.
“그렇게 먼저 말해주시니, 저야말로 고마운걸요.”
똑같이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망설이고 있던 페페가 환히 웃어 보였다.
그 허락에 리디안의 용기가 더 커졌다. 활짝 웃은 리디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직도 한참 많았다.
우스꽝스럽게도 대다수가 같은 마음이었는지, 하나둘 목소리를 모아 ‘재회’를 약속했다.
어쩌다 우연스럽게 만나게 된 인연. 이 많은 인원이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하나가 되어, 이제는 다퉜던 일화까지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노르드 월드에서 얻은 희귀한 선물 같다며 리디안이 옅게 웃었다.